소설리스트

42. 오직 그대만을 위한 선물 (42/97)


#42. 오직 그대만을 위한 선물
2023.01.24.



“백작님 그림은 지금도 엄청난 값에 팔려요. 모작도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요.”

“그게 무슨 소용이오? 떳떳하게 나설 수도 없는데.”

“모작을 그리시면 되죠.”

“?!”

오웬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나는 태연하게 찻잔을 입으로 옮겼다.

황궁에서 마시던 차와 비교하면 질이 떨어졌지만, 더없이 향긋하게 느껴졌다.


“나보고 내 모작을 그리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흥분하지 말고 들어보세요. 돈 때문만이 아니니까요.”

“엘리자벳 양은 도통 모를 소리만 늘어놓는구려.”

“백작님의 작품은 워낙 천재적이라 아무나 모작할 수 없다는 거 아시죠?”

칭찬을 곁들이자, 오웬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진품 같은 모작이 등장하면 예술계가 발칵 뒤집힐 거예요.”

“그건 그렇겠지만.”

“진짜 오웬이 돌아온 건가? 설마 그럴 리 있어? 이걸 그린 천재 작가는 누구야? 사교계가 온통 백작님 이야기뿐일걸요?”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오?”

“그때 명예를 완벽히 회복한 백작님께서 황태자 전하와 함께 등장하는 거죠. 그 화려한 모습이 눈에 그려지시지 않나요?”

“!”

“귀족들은 백작님의 작품을 사기 위해 무릎 꿇고 애걸하겠죠. 파티 초대장도 사방에서 쏟아질 거예요. 느긋하게 작품 생활을 하시면서 매일 최고급 요리를 맛보실 수 있다고요!”

두 눈이 몽롱하게 풀린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제시한 핑크빛 미래에 흠뻑 빠진 모습이었다.


‘원작에서 모작 아이디어를 떠올린 사람은 오웬 본인이야. 모작을 그려 혁명자금을 마련했지. 그 덕에 클라우디아는 승승장구했고.’

미안하지만 오웬과 클라우디아는 만날 수 없을 거였다.

만난다 해도 인연을 맺지 못할 터였다.

원작을 비틀었다는 묘한 승리감에 미소가 번졌다.


“백작님의 그림을 사랑하는 팬으로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그럴듯한 제안이지만…….”

“결정만 해주세요. 자질구레한 문제는 제가 해결할게요.”

“……정말 가능하겠소?”

“엠스터의 상속녀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할 것 같나요? 우리 함께 새 역사를 이뤄봐요. 페넬로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자고요!”

오웬이 감격한 얼굴로 내 손을 맞잡으려는 순간, 옆 테이블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렸다.


“꺄악!”

복면 사내들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들은 지금 나를 노린다는 걸.

검은 옷에 검은 장갑을 낀 사내들이 두툼한 마 자루를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웬 놈들이냐?!”

오웬이 사납게 외쳤다.

복면 사내들이 소매에서 짧은 칼을 꺼냈다.

모두 네 명이었다.


‘더글라스와 니콜라이가 떠나는 걸 보고 튀어나온 거야. 방해꾼 하나쯤은 없애버릴지도 몰라!’

백주에 납치를 시도할 만큼 눈에 뵈는 게 없는 놈들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오웬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너희들 목적은 나잖아? 순순히 따라갈 테니까 아무도 해치지 마!”

짧은 순간, 납치범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의 망설임이 오웬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처럼 느껴졌다.


“저 남자를 해쳐서 이득이 있어? 너희 주인도 사건이 커지길 바라지는 않을걸?”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모르겠다.

일단 오웬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머리가 꽉 찼다.


“큭!”

오웬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납치범 중 하나가 오웬의 급소를 내려친 까닭이었다.

놈들이 내 머리부터 자루를 뒤집어씌웠다.

빛이 차단되고,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누군가 나를 어깨에 둘러멨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쏠렸다.


‘나, 이대로 죽는 건가? 심한 꼴을 당하면 어쩌지?’

두려움 따위, 잊은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순간, 가장 보고 싶은 건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린 니콜라이였다.


 

***



「가라고 해도 안 가요. 염려 말고 다녀오세요!」

니콜라이는 몇 번이나 엘리자벳의 목소리를 곱씹었다.

붉고 도도한 입술.

찰랑거리는 선홍빛 머리칼.

도발적으로 반짝이는 한 쌍의 검은 진주.

봄에 처음 핀 꽃망울을, 한여름의 시냇물을, 무르익은 가을 하늘을, 겨울 정취를 더하는 눈송이를.

그 모든 것보다 사랑스러운 엘리자벳의 향기는 니콜라이를 취하게 만들었다.

물론 낯선 사내의 등장은 적잖이 불쾌했다.

더글라스의 반반한 낯짝도 여전히 속을 뒤집어 놓았다.

혹시 몰라서 붙여놓은 미행이 엘리자벳의 동태를 알렸을 땐, 온몸의 피가 뒤집히는 듯했다.


‘연애도 아니고 데이트도 아니었어. 다른 남자를 사귈 마음이 아닌 건 확실해 보여. 더글라스와도 진짜 친구 사이 이상은 아닌 것 같고…….’

유치한 승리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계약 때문이라 해도 엘리자벳에게는 자신뿐이었다.

아무리 확인해도 불안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변했다곤 해도 엘리자벳은 소문난 팜므파탈이었다.

더글라스처럼 그녀에게 목매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엘리자벳은 절벽에 핀 꽃보다 고고했고, 창공을 가로지르는 새보다 자유로웠다.


‘그에 비해 나는 수많은 황비를 거느린 카사노바지. 엘리자벳이 유혹게임을 관두고 떠난대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

두 눈을 감고 키스를 기다리던 엘리자벳.

당혹스러움과 민망함으로 창백해지던 엘리자벳.

야릇한 순간에 먼저 고개를 돌려버리던 엘리자벳.

어색하고 낯간지러운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떠올릴 만큼 그 모든 엘리자벳이 사랑스럽고, 또 두려웠다.


‘연무장으로 초대해 만회하려 했는데. 이리떼가 꼬이는 바람에 망쳐버렸다. 그냥 죽여버릴걸…….’

밤마다 엘리자벳을 모욕하던 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엘리자벳이 나서지 않았다면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살육극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최근 들어 니콜라이는 제 인내심이 원망스러웠다.

귀족이란 탈을 쓴 무뢰배들의 씨를 모두 말려버리고 싶었다.

제국을 위해서라기보다, 더러운 혀로 엘리자벳을 모욕했기 때문에.

멸망의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뭘 찾으십니까, 손님?”

가죽 앞치마를 두른 주인이 쭈뼛거렸다.

니콜라이는 그제야 마구점을 둘러봤다.

말 편자, 재갈, 굴레는 물론, 말 채찍, 박차 등 다양한 승마용품이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솜씨 좋은 장인이 있다고 들었다.”

“잘 찾아오셨군요. 최고급 재료로 뭐든 만들어드리지요.”

“2인용 안장이 필요하다.”

“그런 건 없는데요?”

“만들면 될 것 아닌가?”

의아하다는 듯 니콜라이가 쏘아보며 말했다.

그 기세에 눌린 주인이 어깨를 움츠렸다.


“하, 하지만…….”

“열흘이면 충분한가?”

“송구하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2인용 안장이라니 장인들도 나서지 않을 겁니다. 주문도 밀려 있고요.”

주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니콜라이가 돈주머니를 거꾸로 들었다.

와르르 쏟아지는 금화 무더기를 보며 주인이 입을 떡 벌렸다.


“할 마음이 생기는가?”

“이렇게나 많이 주신다고요?!”

“앞자리엔 귀한 여인이 탈 것이다. 착석감에 신경 쓰도록 해라. 말에 익숙하지 않은 여인이다.”

“이 정도면 마, 말 수십 마리를 사고 마장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미 많다.”

“예엣?”

“열흘 후에 오겠다.”

얼이 빠진 주인을 뒤로하고 니콜라이가 마구점 밖으로 나왔다.

2인용 안장을 보며 깜짝 놀랄 엘리자벳을 떠올리니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또 다른 여자를 태우려는 거냐고 묻는다면, 오직 그대만을 위해 만든 거라고 대답할 것이다.’

열흘 후가 기대됐다.

엘리자벳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대로 환궁하긴 아쉽군. 꼬치구이집에 다시 갈까? 아, 아직 배가 부르려나? 그럼 어딜 가지? 여자들이 뭘 좋아하지?’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는 문제였다.

정치나 전쟁이라면 모를까, 데이트라니.

낯설고 어려웠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엘리자벳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억만금도 아깝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레스에게 미리 조사를 시켰을 텐데. 대비가 부족해.’

니콜라이가 후드를 눌러썼다.

조마조마한 설렘이 얼굴에 드러날까 봐 염려된 까닭이었다.

걸음을 재촉하다, 우뚝 멈춰 섰다.

강렬한 불안이 심장에 내리꽂혔다.


‘엘리자벳의 향기가 사라졌다!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의문과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숨어서 황제를 호위하던 기사들도 덩달아 뛰었다.

움켜쥔 주먹에 식은땀이 배었다.

행인들이 좌우로 흩어지며 고함을 질렀다.

엘리자벳이 기다리는 카페가 너무 멀었다.

언제 이렇게 멀리 왔을까.

어쩌자고 혼자 남겨두었을까.

불길한 예감과 터질듯한 후회가 가슴을 옥죄었다.

니콜라이가 도착했을 때, 엘리자벳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

납치라니.

이 얼마나 흔한 소재인가.

원작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다.

있다 해도 즐거워했을 것이다.

악녀가 고난을 겪는 걸 싫어하는 독자는 없었다.


‘직접 당하니까 기분 더럽네. 손발에 피가 안 통하는 것 같아. 이 자루엔 대체 뭐가 들었던 거야? 아, 냄새! 머리 아파.’

덜컹거리는 마차 뒷좌석에서 끙끙거렸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라졌다.

날 납치한 놈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심히 다뤄. 이 계집이 몸값이 얼만 줄 알아?”

“천만 골드라고 했지? 황후 몸값이라 해도 믿겠네!”

“목소리 낮춰. 저 여자 깨어나면 골치 아파.”

“대체 누군데 그래?”

“살모사처럼 사악한 계집이라는 말만 들었어. 저 여자 잔꾀에 넘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더군.”

내 몸값이 고작 천만 골드밖에 안 된단 말이야?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엠스터의 상속녀를 뭐로 보고?

까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납치범들은 내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안다면 그따위 푼돈에 만족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날 납치하려 한 걸까?


‘당연히 시몬의 아비는 아니겠지. 내 재산을 노리고 있으니까. 나머지 세 가문 당주 중 한 명인 건가? 그들이 연합했을 수도 있어. 고작 떠올린 게 납치라니. 창의력이 한참 떨어지네. 쯧쯧.’

혀를 차면서 손발을 꿈지럭거렸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나처럼 예쁜 여자라면 더욱 몸조심해야 했다.

다른 건 둘째치고 냄새나는 자루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저기요?”

“뭐야?”

“자루에서 꺼내주세요. 얌전히 있을게요.”

“닥쳐! 수작 부리지 말고.”

쾅,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위협하려는 모양인데 제 손만 아프지.

침착하고도 사무적인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었다.


“자루만 벗겨주면 이천만 골드 드릴게요.”

“이, 이천만?”

“손목 결박 좀 느슨하게 해주면 천만 골드 더 드리죠.”

“뭐?!”

“풀어주는 것도 아닌데 삼천만 골드면 괜찮은 거래 아니에요?”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자루 속까지 들렸다.


‘머리가 복잡하겠지. 미심쩍기도 할 거야. 하지만 흔들리겠지? 너흰 푼돈에 움직이는 잔챙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잔뜩 날 선 대답이 돌아왔다.


“네 말을 어떻게 믿지?”

피라미가 미끼를 물었다.

주도권은 낚시꾼에게 넘어왔다.

게다가 나는 이런 종류의 낚시에 아주 능했다.


“일단 자루부터 벗겨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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