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엘리자벳을 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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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엘리자벳을 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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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엘리자벳을 구해라
2023.01.27.
다른 납치범이 벌컥 짜증을 냈다.
“이 여자 말 듣지 말라고 했잖아!”
“삼천만 골드라잖아?”
“바보 같은 놈! 그걸 어떻게 믿어?”
“밑져야 본전인데, 물어보는 것도 안 돼?”
머리도 나쁘고 협동심도 없는 놈들이었다.
행운의 여신이 이번엔 내 편을 들어줄 모양이었다.
“안타깝네요. 아직도 속았다는 걸 깨닫지 못하다니.”
한숨을 섞어 말했다.
자기들끼리 툭탁대던 납치범들이 발끈했다.
“우리가 뭘 속았다는 거냐?”
“내 정체를 알면 천만 골드 같은 푼돈에 만족할 리 없으니까요.”
“푸, 푼돈?”
“중개한 사람에게 가서 따지고 싶은 심정이에요. 가격 책정이 한참 잘못됐다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입을 다물고 있지만, 놈들은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납치당한 여자가 울지도 않고, 살려달라고 빌지도 않는다?
그것만으로 이상한데, 몸값이 너무 싸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내 정체가 궁금해서 미치겠지?
특별히 가르쳐주마, 이놈들아.
“이 상황에 이렇게 담담한 여자가 누군지 궁금하시죠?”
“……!”
“저는 엘리자벳 엠스터예요. 맞아요, 그 엠스터 상단의 유일한 상속녀. 황태자 전하의 교육담당관이 된 최초의 평민. 이제 감이 잡히시나요?”
“거짓말하지 마!”
“금방 들통날 거짓말로 목숨 거는 사람 봤어요?”
“…….”
“얼른 확인해보세요. 몸값이라도 좀 높이게.”
납치범들이 소리 낮춰 수군거렸다.
그들이 분주하게 사실을 확인하는 동안 깜빡 잠이 들었다.
손발이 묶이고 얼굴이 가려진 채 잠들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 신경도 파란만장한 운명에 조금쯤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진짜 엘리자벳 엠스터야! 사방에 이 여자를 찾는 병사들이 쫙 깔렸어!”
“제기랄! 엠스터 상단의 상속녀란 것도 가르쳐 주지 않다니! 진짜 속았잖아?!”
“돈이 문제가 아니야. 황제가 총애하는 계집이래! 황제가 직접 기사들을 끌고 나섰대!”
분위기가 급박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납치범들은 의뢰인과 중개인 모두를 원망하며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그들의 분노가 애꿎은 내게 닿기 전 수를 써야 했다.
“이제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좀 눈치채셨나요?”
“넌 닥치고 있어!”
“내가 닥치고 있으면 당신들은 다 죽어요.”
“너 따위, 죽여버리면 그만이다.”
“흐음. 진짜 대범하시네. 돈도 포기, 목숨도 포기.”
“?”
“이 순간에도 황제 폐하와 근위대가 당신들을 쫓아오고 있을 거예요. 절 죽이면 당신들은 물론 가족, 친구, 동료들까지 모조리 처형당하겠죠.”
“그럴 리가 없어. 넌 황비도 아니잖아.”
확신 없는 목소리로 납치범이 중얼거렸다.
“당신들 완전 초보구나? 납치할 사람의 정체도 모르고, 의뢰인은 왜 납치하는지도 모르고.”
“…….”
“황비도 아닌 여자가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니까 이 꼴을 당하는 거잖아요?”
“너, 너는 황제랑 무슨 사이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도 끈적끈적한 사이죠.”
계약에, 게임에, 원작에 복잡한 사연이 얽히고설켰지만, 대답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저 여자 빨리 넘겨주고 튀자!”
“엠스터 상속녀라잖아! 천만 골드는 너무 싸잖아?”
“시간 끌다간 한 푼도 못 건지고 죽을 수 있어!”
“앞길이 꽉 막혔어. 도망갈 구석이 없다고!”
뾰족한 대책도 없이 납치범들이 우왕좌왕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런 싸구려 아마추어들을 고용한 걸 보니, 의뢰인도 똑똑한 놈은 아니야. 브렌든 후작을 견제하는 놈들일 확률이 커. 아니면 나대지 말라고 협박하는 걸지도…….’
비겁한 인간들 때문에 더러운 자루를 뒤집어쓰고 마차 뒷자리를 뒹굴었다.
허리도 쑤시고 손발이 저렸다.
이 피해를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까?
적어도 100배는 뜯어내야 하는데.
일단 나는 얼뜨기 납치범들을 구슬리기로 했다.
“당신들이 살아날 방도를 알려줄게요.”
“…….”
“서둘러. 마음 바뀌기 전에.”
말투를 바꿔서였을까.
머뭇거리던 납치범들이 내 머리에 씌워진 자루를 벗겼다.
강렬한 빛이 눈을 찔렀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 한결 나아졌다.
“후. 이제 좀 살겠네.”
“우릴 속이면 바로 죽여버릴 테다!”
“이봐 초보들. 지금까지 당신들에게 진실을 말한 사람은 나뿐이지 않아? 생각해 봐. 이제 당신들이 믿을 구석도 나뿐이야.”
“이 계집이 입만 살았구나!”
“결박이나 풀어. 내 피부에 생채기가 나면 폐하께서 당신들의 손발을 잘라버릴 테니까. 목부터 자를 가능성이 더 크지만.”
눈매를 곱게 접으며 서늘하게 웃었다.
저승사자를 만난 사람처럼 부르르 떨던 납치범들이 밧줄을 풀었다.
그 손길이 옷 시중을 드는 하녀들보다 조심스러워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다시 말투를 되돌렸다.
“날 얌전히 데려다줘요. 의뢰인이 누군지 불면 수고료로 일억 골드 줄게요.”
“일억 골드라고?!”
“몸값으로는 좀 부족하지만, 약간의 성의 표시라고 생각하세요.”
“함정에 빠뜨리는 거 아냐?”
“당신들의 선택지는 세 가지예요. 첫째, 당신들을 속인 의뢰인에게 날 넘긴다. 헐값을 받고 죽을 때까지 추격대에 쫓기는 거죠.”
“제기랄! 그게 무슨 선택지야?!”
“둘째. 날 죽이고 도망친다. 돈은 날렸고, 황제 폐하의 분노를 사서 결국 죽겠죠. 도망갈 자금도 없이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두고 봅시다.”
“……세 번째는?”
“일억 골드를 받고 의뢰인의 정체를 부는 것. 다른 나라로 건너가 갑부로서 새 인생을 사는 거죠.”
“!”
“원한다면 엠스터 상선에 태워주죠. 대륙 어디든 밀항할 수 있을 거예요.”
무슨 선택을 할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말이 안 통하면 마성을 쓰려던 참에 납치범들이 내 수고를 덜어줬다.
“어디로 데려다주면 되나?”
***
금화가 썩어난다 해도 범죄자 놈들에게 줄 돈은 없었다. 특히 납치범들과 거래를 할 수는 없었다.
내 안전이 보장되는 순간, 놈들의 뒤통수를 칠 계획이었다.
납치범들을 엠스터 상단의 본점으로 이끌었다.
엠스터 상단이 자랑하는 초대형 금고와 귀빈실이 있는 곳이었다.
물론 경호원들도 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일억 골드를 출금하려면 내가 직접 가야 해요.”
“풀어달라는 건가?”
“다른 방법 있어요?”
“네가 우릴 배신하면?”
“당신들이 돈을 받고 난 후에 의뢰인의 정체를 알려주기로 했잖아요? 난 누가 날 납치하라고 시켰는지가 중요해요.”
“……안심할 수 없다. 내가 따라가지.”
납치범 중 하나가 복면을 벗었다.
길에서 마주쳐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평범하고 흐릿한 인상이었다.
동료들과 말을 섞지 않고, 잠자코 사태를 관망하던 남자로 입술이 얇고 눈매가 가느다랬다.
“당신 정도면 내 비서라고 둘러댈 수 있겠네요. 따라와요.”
왠지 모를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태연한 척 앞장서기는 했지만, 손발에 식은땀이 솟구쳤다.
“괜한 짓은 하지 마. 다음엔 더 깊숙이 들어갈 거야.”
내 뒤에 바짝 붙은 남자가 말했다.
순간,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통증이 번졌다.
칼로 찌른 걸까.
아찔한 고통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
‘등 뒤에 있으니 마성을 쓸 수도 없고. 어쩌지?’
입술이 바짝 말랐다.
등 뒤의 남자가 마성조차 통하지 않는 미치광이 살인마라면?
상황이 점점 예상치 못한 쪽으로 날 데려가고 있었다.
“날 다치게 하면 더 위험해진다는 거 몰라요?”
두려움을 숨기고 담담하게 물었다.
“죽기밖에 더하겠어?”
“당신 친구들은 생각이 다를 텐데요…….”
“다르지. 그래서 처음부터 널 없애고 싶었어. 네가 잘난 혀를 나불대는 동안.”
등 뒤에서 음험한 살기가 느껴졌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납치범이면 얼굴을 숨길 텐데, 이 남자는 왜 복면을 벗었을까?
목격자가 생기는데.
정말 처음부터 날 죽일 작정이었을까.
“본점엔 경비원들이 많아요.”
“잘난 상속녀님이 있는데 뭔 상관이야?”
“…….”
“금고의 돈을 몽땅 가져와. 안 그러면 손가락을 한 마디씩 잘라낼 거야.”
재미난 농담이라도 하듯, 남자가 쿡쿡 웃었다.
‘위험하더라도 이 남자를 마주 봐야 해. 윙크 한 번, 손 키스 한 번이면 충분하잖아?’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남자가 경고하듯 내 한쪽 팔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읏!”
등에 닿은 칼끝이 더 가까이 느껴졌다.
“까불지 말고 걸어.”
“너……. 이 자식.”
“나는 인간들이 아파하는 걸 좋아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건 더 좋아하지.”
입 안쪽 살을 세게 깨물었다.
등에 구멍이 나더라도 이놈이 즐거워할 모습은 보여줄 수 없었다.
“네 운명을 알려줄까? 돈을 챙기자마자 널 산골짜기로 끌고 갈 거야. 거기서 이런저런 재미도 좀 보고 나서…….”
남자가 일부러 말꼬리를 늘였다.
축축하고 더러운 숨결이 귓바퀴에 닿았다.
송충이 천 마리가 피부를 기어간대도 이처럼 소름 끼치지는 않을 듯했다.
너무 자신만만했던 걸까?
칼을 든 범죄자를 조종할 수 있다고 착각한 걸까?
무릎이 덜덜 떨렸다.
당장이라도 풀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끄아악!”
귀청 터지는 쇳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날 찔렀던 남자가 피가 철철 흐르는 목을 움켜쥔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짓밟힌 벌레처럼 바르작대던 남자가 이내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바람과 함께 등장한 건 니콜라이였다.
“기다리게 했다. 미안하다, 엘리자벳.”
듣기 좋은 중저음이 바짝 얼었던 몸을 녹였다.
니콜라이는 죄책감으로 일그러진 창백한 얼굴도 아름다웠다.
잔뜩 구겨진 눈썹도, 잘게 떨리는 눈동자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폐하…….”
헤어진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니콜라이의 두 뺨은 해쓱했고 눈 밑엔 푸르스름한 그늘이 번져 있었다.
‘얼마나 놀랐던 거야. 얼마나 걱정한 거야…….’
니콜라이는 이성을 반쯤 잃은 채 납치범들을 뒤쫓았을 것이다.
직접 말을 몰고 칼을 휘둘렀을 거였다.
니콜라이의 검에서 뜨거운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들은 모두 죽었을까?
차갑게 언 몸을 웅크렸다.
니콜라이가 황제의 보검을 내동댕이쳤다.
그리곤 두 팔로 날 감싸 안았다.
“엘리자벳…….”
하늘에서 떨어진 유리 인형을 받아내듯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 덕에 천천히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두려움을 털고, 불안을 지웠다.
칼에 찔린 아픔도 잊었다.
납치, 협박, 죽음을 차례로 겪고 났는데도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오직 니콜라이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기적이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폐하.”
“내가 너무 늦었다.”
“적당한 때 오셨어요.”
“많이 다쳤나?”
“약간 긁힌 정도예요.”
“긁혀? 어딜?!”
니콜라이의 목소리가 왈칵 뒤집혔다.
괜히 알려주었을까?
날 다치게 한 놈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