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자상한 폭군
(44/97)
44. 자상한 폭군
(44/97)
#44. 자상한 폭군
2023.01.31.
내 몸 구석구석을 살피던 니콜라이가 얼어붙었다.
칼에 찔린 상처를 그제야 발견한 모양이었다.
“궁정 치료사를 당장 데려오라!”
니콜라이가 명령했다.
침착하고 준엄한 어조였다.
그 안에 담긴 살기는 심상치 않았다.
지옥의 사신이 강림한다 해도 그보다 흉포한 기운을 뿜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전 괜찮아요. 환궁해서 치료하면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드레스에 피가 묻었다.”
“이래 봬도 튼튼하다니까요!”
두 팔의 근육을 자랑하며 씩씩한 척했다.
그렇게라도 니콜라이의 죄책감을 덜어주고 싶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괜한 허세를 부려서 그런가.
허리가 반으로 꺾이며 아찔한 통증이 밀려왔다.
“읏!”
“엘리자벳!”
니콜라이가 더럭 겁에 질린 얼굴로 날 안아 올렸다.
그의 체취가 다시 한번 내 몸을 감쌌다.
벌써 이 남자의 향에 익숙해져 버렸다.
몸과 몸이 닿는 것만으로 긴장이 풀리고 응어리가 녹았다.
부모에게도 부려본 적 없는 어리광이 슬며시 튀어나왔다.
“저 좀 안 괜찮은 것 같아요, 폐하.”
“당분간 아무 걱정 말고 쉬어라.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겠다.”
“그래도 될까요?”
“이제 누구도 널 해칠 수 없다.”
니콜라이의 품은 따스하고 안전했다.
그래서일까. 스르륵 잠이 몰려왔다.
납치당한 순간부터 내내 니콜라이가 보고 싶었다.
그가 달려와 궁지에 몰린 날 구해주길 바랐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한 번쯤 보호받고 싶었다.
상대가 니콜라이라면 말이다.
‘혼자 아등바등할 필요 없어. 내 곁에 니콜라이가 있으니까…….’
속으로 중얼거리다 의식을 잃었다.
그래서 니콜라이에게 꼭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했다.
***
열 손가락에 반지를 낀 파이프 후작이 어깨를 웅크린 채 뒷골목을 두리번거렸다.
코트 깃을 세우는 몸짓에 짜증이 가득 묻어 있었다.
“왜 밖에서 보자고 했소? 이러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를 기다리던 블랙폴드 백작이 신경질적으로 검은 콧수염을 가다듬었다.
“저택이나 살롱이 더 위험하다는 걸 모르시오?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남들이 보면 안 된단 말이오.”
“빌어먹을 얼간이들! 계집애 하나 납치하지 못하다니.”
파이프 후작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블랙폴드 백작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일이 잘못되면 전부 파이프 공 때문인 줄 아시오.”
“암흑길드 통해 그 여자를 처리하자던 건 블랙폴드 공이었소!”
“파이프 공 뜻대로 사병을 움직였다면 지금쯤 우리도 하옥되었을 것이오.”
“흠흠.”
“황제에게 우리 병력의 10분의 1만 보고했다는 걸 잊었소? 납치보다 그쪽이 더 중죄란 말이오!”
블랙폴드 백작이 파이프 후작을 몰아세웠다.
파이프 후작이 불퉁한 얼굴로 말을 돌렸다.
“리먼 공의 조언에 따를 걸 그랬소. 젠장할!”
“그래서 말인데. 내게 좋은 생각이 있소.”
“뭐든 말해보시오, 블랙폴드 공.”
“우리는 내기의 당사자가 아니지 않소?”
“그래서?”
“브렌든 쪽에서 꾸민 일로 몰아갑시다. 그에겐 동기도 있고, 은원도 있으니까.”
누명을 씌우자는 말에 파이프 후작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그것도 잠시,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이 기회에 브렌든 후작을 완전히 주저앉히자는 말이구려?”
“브렌든 공은 천박한 언행과 비열한 사업으로 4대 명문가의 명예를 더럽혔소. 시몬이 제국 최강의 검사라는 헛소리를 떠들기도 하고.”
“옳은 말이오. 평민 계집과 전 재산을 걸고 내기를 하다니.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쯧쯧.”
“귀족원을 움직이면 브렌든 후작을 실각시킬 수 있소. 납치에 대한 가짜 증거를 슬쩍 흘리는 것도 좋을 것이오.”
“뒤처리를 황제에게 맡기자는 뜻이오?”
“그 여자에게 미쳐 있으니 신나서 덥석 물겠지.”
“신시야 황비께서 누굴 닮아 지혜로우신가 했더니! 아버지인 블랙폴드 공을 쏙 빼닮으셨군!”
“리먼 공에겐 말조심해야 하오.”
“날 믿으시오. 우린 한배를 탄 것 아니겠소?”
“우리의 우정과 번영은 영원할 것이오.”
파이프 후작과 블랙폴드 백작이 뜨거운 악수를 나눴다.
파이프 후작은 몰랐다.
블랙폴드 백작이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음을.
블랙폴드 백작 또한 짐작하지 못했다.
자신이 얕보던 파이프 후작이 이미 살 궁리를 따로 마련해뒀다는 걸.
***
그날 나는 카나리아 방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흔들리는 마차 때문에 상처가 악화할 수 있다고 니콜라이가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당분간 엠스터 상단의 귀빈용 침소에서 요양하기로 했다.
그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것이 황명에 따라 결정된 뒤였다.
“……폐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던 니콜라이가 번개처럼 다가왔다.
“움직이지 마라. 상처를 꿰맨 지 얼마 안 되었다.”
그가 다시 날 부드럽게 눕혔다.
그 손길이 얼마나 자상한지 전문 교육을 받은 간호사 같았다.
니콜라이처럼 잘생긴 간호사가 있으면 병원이 꾀병 환자들로 미어터질 테지만.
“계속 제 옆에 계셨던 거예요?”
“그렇다.”
“휴식은 취하셨어요?”
“물부터 마셔라. 갈증은 건강에 안 좋다.”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니콜라이가 물컵을 건넸다.
협탁엔 간단한 간식과 진통제, 소독약이 준비되어 있었다.
젖은 물수건과 찬물이 담긴 대야도 보였다.
‘니콜라이가 번쩍 안아줬지. 공주님 안기라고 했던가?’
화륵, 두 뺨이 달아올랐다.
심장 부근이 간지러웠다.
괜한 쑥스러움에 말을 돌렸다.
“치료사님은 가셨어요?”
“다른 방에서 대기 중이다.”
“저 때문에 여러 사람 고생하네요. 심한 상처도 아닌데.”
실크 가운의 앞섶을 야무지게 여몄다.
상처에 두툼한 붕대가 감겨있었다.
아픔은 크지 않았다.
움직일 때 약간 뻐근한 정도였다.
“혼절까지 했는데, 깊은 상처가 아니라고? 상처가 무려 이 정도였다!”
니콜라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나 대단한 상처인가 했더니.
그의 손가락 사이는 고작 1c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거밖에 안 찔렸다고?
어쩐지 견딜 만하더라니.
호들갑을 떤 것 같아서 민망했다.
니콜라이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그런 끔찍한 부상은 본 적 없다는 듯 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피 얼룩은 동전 크기였다.”
“다행이네요.”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다행이라고?”
“그 정도 상처에 누가 죽어요?”
“……뭐?”
니콜라이의 눈빛이 삽시간에 돌변했다.
밤새도록 잔소리에 시달리게 될까 봐 바로 사과했다.
“잘못했습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팔짱을 낀 니콜라이가 속사포 잔소리를 쏟아냈다.
“감히 납치범을 도발했다지? 일억 골드 운운하면서.”
“그건 어쩔 수 없이…….”
“아무리 겁이 없어도 그렇지! 무슨 짓을 당하려고 놈들에게 밀항까지 제안했나?”
“거기까지 들으셨어요? 하지만 저는…….”
“변명할 생각 마라. 그대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으니까.”
니콜라이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몰아붙였다.
마른침을 꼴깍 넘기며 쓰러진 범죄자들을 떠올렸다.
설마, 모조리 죽인 것은 아니겠지.
“자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는 있었나요?”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이번엔 반드시 배후를 밝힐 것이다.”
“납치범들을 살려두셨다고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형할 때까지 살려둔 것뿐이다.”
니콜라이가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내가 박수로 환영했다.
“잘하셨어요!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당부하는 걸 잊었는데.”
“그대는 내가 무슨 살인마라도 되는 줄 아나?”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한 분이시죠.”
이번엔 니콜라이도 부정하지 않았다.
황제는 제국의 주인이자, 법이었다.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일개 범죄자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게 당연했다.
“엘리자벳. 왜 납치범들을 감싸는 거지?”
“누가 누굴 감싸요? 저 때문에 폐하께서 폭군 취급당하는 게 싫을 뿐이에요.”
“그대 목숨보다 내 명예가 더 중요하다는 건가?”
“가뜩이나 악명이 자자하신데, 그 정도는 관리해야지요.”
훅 바람을 불면 날아갈 깃털처럼 가볍게 말했다.
니콜라이도 그렇게 들어주면 좋으련만.
날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짙은 청록색으로 가라앉았다.
“명예 따위, 다 부질없는 것이다. 그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다오.”
“당연히 제 생명이 제일 소중하죠.”
“그런데 왜 자꾸 모험을 하는 건가?”
니콜라이의 주먹 위로 푸르스름한 핏줄이 불거졌다.
가까스로 노기를 억누르는 그를 외면했다.
“악녀 취급받기 싫어서요.”
“그대를 악녀라 칭하는 자들을 모조리 없애마.”
“그러실수록 저를 악녀라 부르는 자들이 더 늘어날 거예요.”
“탈옥수 오웬 블랙에게 접근한 것도 그래서인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거기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 속마음을 읽은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놀랄 것 없다. 그가 제 입으로 털어놓았으니까.”
“오웬이요?”
“그대가 납치되면서 자기를 지키려고 했다던데?”
“……네?”
“생명의 은인이라며 눈물을 글썽이더군. 볼썽사나웠다.”
“그게 왜 볼썽사나워요?”
“사납다마다!”
니콜라이의 미간 사이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낭패감에 휩싸여 입술을 깨물었다.
‘몰래 반역자와 접촉했으니 화가 날 만도 하지. 프란츠와 함께 니콜라이를 설득할 셈이었는데. 앞으로 어쩐다? 오웬을 복권시켜야 하는데.’
오웬이 얼마나 쓸모 있는 인재인지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니콜라이의 혼잣말은 이번에도 내 예상을 훌쩍 벗어나 있었다.
“허락도 없이 외간 남자를 또 유혹하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다 되물었다.
“유혹이라니요?”
“유혹이 아니면 뭐지? 오웬이란 놈은 벌써부터 그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기세던데.”
“그가 반역자라서 불쾌하신 게 아니란 말씀이세요?”
“반역은 무슨 반역.”
“?”
“폐황후가 전도유망한 화가를 짓밟았지. 폐황후 때문에 신세를 망친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다.”
“오웬을 뒷조사하셨어요?”
“그대 주위에 얼씬대는 놈을 넋 놓고 내버려 둘 것 같은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 뻔뻔한 태도였다.
평소 같았으면 뒷목을 잡았겠지만,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오웬은 천재 화가예요. 그를 미술 교수로 초빙하면 프란츠도 무척 좋아할 거예요.”
“관찰력은 쓸 만하더군.”
“관찰력이라니요?”
“마차를 추적할 수 있었던 것도 그자 덕분이었다. 마차 형태, 바퀴 크기, 복면 쓴 범인들의 체형까지 완벽하게 기억했다.”
오웬은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그 상황에서 납치범의 인상착의와 마차 모양을 기억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오웬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생명의 은인 대우하는 것은 당연하지.”
“저 때문에 휘말린 것뿐이에요. 원망해도 할 말 없어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니콜라이가 딱 잘라 답했다.
도움이 됐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소리 같았다.
그의 관심은 오웬이 아니라, 납치를 사주한 진짜 범인이었다.
“암흑길드 중개인을 체포하면 죄상이 모두 드러날 것이다.”
“과연 입을 열까요?”
“지하 감옥의 고문 기술자들을 믿어봐야지.”
“이미 짐작하시잖아요?”
“…….”
“알고 계시죠? 누가 절 노린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