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 황후의 자질 (45/97)


#45. 황후의 자질
2023.02.03.


니콜라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묵직한 침묵 속에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파이프 후작이나 블랙폴드 백작 중 하나일 거예요. 둘 다일 수도 있고요.”

“리먼 공작은 신중한 사람이지.”

“브렌든 후작은 내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고요. 두 사람을 빼면 파이프와 블랙폴드가 남죠.”

“미안하다. 내가 진작에 처리했어야 했는데.”

면목 없다는 듯 니콜라이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새하얀 치아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새빨갛게 도드라진 입술이 말도 안 되게 선정적이란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

이 순간 그의 입술에 시선을 빼앗긴 나 역시.


“폐하께서 뭐가 미안하세요? 더러운 술수를 쓴 놈들은 오리발을 내밀 텐데.”

“내가 제국을 완벽히 통치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말처럼 간단했다면 선황께서 다 해결하셨겠죠.”

“?”

“세상에 귀족 토호들 때문에 골머리 썩는 황제가 폐하뿐인 줄 아세요? 황제가 무슨 신이라도 돼요?”

“엘리자벳…….”

“하트만 제국 같은 봉건 국가에서는 영주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다고요.”

소설을 좀 읽다 보면 권력 암투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알게 되는 법이었다.

게다가 나는 원작 세계관을 꿰뚫고 있는 애독자 아닌가.

황제가 절대적인 힘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원작 여주 클라우디아도 4대 명문가 당주들 때문에 몇 번이나 위기에 빠져야 했다.

그들은 혁명을 지지하는 척 클라우디아를 이용했다.

클라우디아가 원작 엘리자벳과 니콜라이를 처형하자마자 시커먼 본색을 드러냈다.

그 욕심 때문에 결국엔 멸문당해버렸지만.


‘클라우디아도 했으니까, 나도 할 수 있어!’

근거 있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처음 빙의했을 땐 모든 게 막막했다.

나의 최애이자 최강 여기사인 클라우디아와 겨룰 자신은 없었다.

원작을 비트는 것도, 단두대를 피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두려움은 매일 밤 악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나는 혼자가 아니잖아?’

납치사건 덕분에 오웬이 내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보리츠를 설득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더글라스와 수잔은 무슨 일이 생겨도 내 편에 서 줄 것이다.

어리긴 하지만 황태자인 프란츠와 내무대신 카레스도 빼놓을 수 없었다.

뿐이랴.

세계관 최고 미남이자 권력자인 니콜라이가 내 곁에 있었다.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남편은 더더욱 아니지만.

그가 날 소중히 여긴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승리의 기본 조건은 끈기니까요.”

버틴다고 모두가 승리하는 건 아니었다.

끈질기게 버틴다 해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망하기 십상.

때론 노력보다 행운이 중요했다.

하지만 포기한다면 행운을 거머쥘 작은 가능성조차 사라지는 거였다.


‘엘리자벳의 운명에 굴복하지 않아. 원작도 날 어쩌지 못해. 내 삶은 내 거야.’

어느 때보다 간절히 살고 싶었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으므로.


“그대가 정치 공부를 했을 줄 몰랐다.”

감탄을 담아 니콜라이가 말했다.

볼을 긁적이며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오다가다 주워들은 정도예요.”

“그대는 빼어난 자질과 재능을 지녔다. 명문가 영애들 전부를 합쳐도 그대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과찬이세요.”

“지금까지 여러 미인과 재인을 만났다. 그대만큼 부유하고, 우아한 여인도 있었다. 하지만 대범함과 현명함, 솔직함을 모두 갖춘 여인은 보지 못했다.”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인데 불에 달군 칼날을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뜨끔했다.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그림자가 가슴 한구석을 들쑤셨다.

니콜라이 주변엔 수많은 여인이 있었다.

황제의 손길만을 기다리는 꽃들이 후궁에서 향기를 내뿜고 있을 터였다.


‘날 납치한 자도 그 황비의 아버지겠지. 니콜라이가 날 총애할수록 더 많은 위험이 시시각각 닥칠 거야.’

피할 마음은 없었다.

적어도 클라우디아를 막을 때까지 그의 곁에 머물러야만 했다.

하지만 그 뒤엔?

계속 니콜라이 곁에 있을 수 있을까?


‘당신에게 난 정말 뭔가요? 유혹해야 할 목표물? 첫사랑의 대용? 그것도 아니라면…….’

차마 묻지 못했다.

어떤 대답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처럼 그의 따스한 눈빛과 손길을 붙들고 싶었다.

둘이서만 나누는 포근한 시간을 누리고 싶었다.

이 세상에 오직 우리 둘뿐인 듯한 착각에서 영원히.


“제가 무슨 자질을 가졌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러니까…… 그건…….”

“설마 황후 하라는 건 아니겠죠?”

장난삼아 물었다.

니콜라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동그랗게 벌어진 초록 눈동자가 비바람이 불어오는 날의 버들잎처럼 잘게 떨렸다.

그를 둘러싼 공기마저 딱딱하게 굳었다.


 


‘니콜라이의 뺨이 좀 붉어졌는데? 장작을 너무 많이 넣었나?’

오른쪽 벽면의 벽난로를 살폈다.

은은한 불길이 방안에 온기를 더하고 있었다.

더위 때문이 아니라면, 니콜라이가 이러는 이유가 뭘까?

장난이라도 황후 이야기를 꺼낸 게 불편했을까?


“못 들은 거로 해주세요. 어휴, 황후라니. 상상만으로 끔찍하네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붉게 달아올랐던 니콜라이의 얼굴이 이번엔 새파랗게 질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의 물음은 더 이상했다.


“황후가 되는 게 왜 끔찍한 일인가?”

“평민 출신 황후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있다면?”

“온 백성이 아우성칠걸요? 악녀를 황후로 삼다니, 제국에 드디어 망조가 들었어! 폭군 황제가 드디어 미쳤다!”

원작 니콜라이는 황비 엘리자벳을 황후로 만들려 했다.

온 제국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귀족도 아니고, 행실도 나쁘고, 온갖 사치로 나랏돈을 탕진하는 여자가 황후가 된다니 그럴 만도 했다.

혁명에 부정적이던 인물들이 대거 클라우디아 편이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엘리자벳의 황후 책봉은 단두대로 가는 지름길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

물론 걱정할 필요 없었다.

니콜라이가 날 황후로 삼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알면서도 다시 한번 못 박았다.


“절 황후로 책봉하실 생각은 아니셨겠지만, 만에 하나 있다면 버리세요. 최악의 결말을 원하지 않는다면요.”

“그대는 악녀가 아니다.”

“그래도 평민이죠.”

“신분이나 핏줄로 얻지 못하는 중요한 자질이 있다.”

니콜라이가 씁쓸한 어조로 답했다.


‘그 자질이 진짜 황후의 자질을 말한 건가?’

괜스레 가슴이 부풀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날 높이 평가한다는 게 싫을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이어지면 안 되는 관계였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노력조차 물거품이 될 게 뻔했다.

우리의 목숨까지도.


“들으셨잖아요. 제가 싫다니까요.”

“…….”

“황후가 되면 매일매일 암살 시도에 시달릴걸요? 뒷배도 없고, 세력도 없는 황후에게 해피엔딩은 없어요.”

“…….”

“그리고 저는 평생을 약속한 단 한 사람과 부부가 되어야 한다고 믿어요. 그래야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니콜라이에게 걷잡을 수 없이 쏠리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다시 유혹게임으로, 계약서로 돌아가야 했다.

그와 함께하는 순간들, 오직 그것만을 기억하자.

사라지더라도 아쉬워하지 말자.

겨울이 오면 낙엽이 지듯 마땅히 찾아올 그 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내 눈은 계속 니콜라이만 좇고 있었다.


“그대 생각은 잘 알겠다.”

니콜라이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밀어낸 것은 내 쪽이었는데.

막상 알겠다고 하니 맥이 툭, 풀렸다.

입안에 굴러다니는 모래알처럼 분위기가 깔깔했다.

애꿎은 실크 가운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제 옷은 어디 있죠?”

“피와 땀으로 더러워져서 버렸다.”

“씻고 싶어요. 땀을 많이 흘렸거든요.”

“그럴 것 같아서 물수건으로 닦았다. 당분간 목욕은 조심해야 한다기에.”

“직접 하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농담하지 말라는 식으로 물었다.

니콜라이가 퍽 자랑스럽다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하나?”

“네?!”

“상처를 소독제로 닦은 사람도 나고, 옷을 갈아입힌 사람도 나다.”

“왜요?”

“그럼 아무에게나 그대의 알몸을 보인단 말이냐?”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뻔뻔한 걸까!

누가 바람둥이 아니랄까 봐!

다시 열이 솟구쳤다.

심장도 위태롭게 덜컹거렸다.

나는 깃털 베개를 니콜라이 얼굴을 향해 던졌다.


“이…… 늑대 같은……!”

 

 

***

밤이 깊었는데도 더글라스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엘리자벳이 납치를 당할 때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쓰디쓴 무력감과 죄책감이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엘리자벳이 구출되었다는 소식에도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 그녀를 구한 건 니콜라이였다.

눈 감으면 준마를 타고 내달리는 니콜라이의 늠름한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바람둥이란 소문이 자자하지만, 더글라스는 호사가들의 입담보다 제 안목을 신뢰했다.

니콜라이에게는 고귀하게 태어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기품과 위엄이 있었다.

한 마디로 타인을 굴복시키고, 당연한 듯 모두를 지배하는 압도적 기운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천재 여기사 클라우디아와 대등하게 일합을 겨룰 유일한 검사였다.


‘알량한 글재주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분이기도 하지. 폐하께 패배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더글라스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더글라스가 엘리자벳의 전 약혼자이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벳은 자신을 친구로 여길 뿐이었지만, 니콜라이는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엘리자벳을 향한 더글라스의 연심을 낱낱이 꿰뚫고 있다는 듯.


‘하지만 포기할 수 없어. 폐하와 함께 있으면 엘리자벳은 불행해질 뿐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은 그녀의 모든 걸 이해해줄 남자야.’

만약 엘리자벳이 입궁하지 않았다면, 황제의 시선을 받지 않았다면, 납치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보다 자유롭고, 더 안전했을 거였다.

니콜라이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에겐 4대 가문 황비들을 포함한 여러 아내가 있었다.

엘리자벳과 니콜라이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해도 둘의 앞길엔 가시덤불뿐이었다.

더글라스가 품에서 작은 구리 열쇠를 꺼냈다.

그날 이후로 한 시도 떼어놓지 않은 열쇠였다.

등불을 들고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서재엔 수잔도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다.

더글라스가 구리 열쇠로 잠겨 있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엔 낡은 책이 들어있었다.


「또 다른 삶이 주어진다면…… 저도 완전히 변하고 싶어요. 이 책의…… 주인공처럼요.」

엘리자벳이 열병을 앓던 때, 가쁜 숨을 토하며 건네준 책이었다.

지은이가 누군지는 적혀있지 않았다.

언제 출판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엘리자벳은 더글라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또 다른 삶이라는 말만 선연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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