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맹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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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맹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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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맹세해주세요
2023.02.07.
엘리자벳의 상태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했다.
일류 치료사들 모두가 고개를 저으며 돌아갈 정도였다.
더글라스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엘리자벳의 죽음을 예감했다.
「엘리자벳. 약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부모님께 연락하지 마세요. 대륙 여행 중이신데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하겠습니다. 곧 쾌차하실 테니까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남성들을 매혹하던 선홍색 머릿결은 윤기를 잃었다.
술잔을 내려놓지 않던 하얀 손은 건드리면 부러질 듯 야위었다.
요염한 웃음도, 오만한 눈동자도 나날이 제빛을 잃고 시들어갔다.
꽃과 선물을 싸 들고 엘리자벳을 찾아오던 남자들은 발길을 뚝 끊었다.
더글라스는 그것이 몹시 애달팠고, 아주 조금 기뻤다.
「더글라스 님은 왜 매일 찾아오시는 거죠?」
「엘리자벳이 보고 싶으니까요.」
「이런 꼴을요? 하여간 정말 이상한 취향이야.」
「불쾌하십니까?」
「이젠 익숙해요. 더글라스 님은 책이랑 똑같아요. 바보 같을 만큼 착해빠졌어요. 되돌아오지 않는 사랑만 하는 것도요.」
「책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책을 읽으면 알게 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나중에…… 제가 정말 다른 사람이 되면, 그때 보세요. 귀찮다면 버리시고요.」
「다른 사람이라니요?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 목말라. 시끄럽게 하지 말고 와인이나 좀 가져와요.」
엘리자벳이 딴청을 피웠다.
더글라스는 엘리자벳에게 물잔을 내밀었다.
「당분간 금주하셔야 합니다. 끊으시면 더 좋고요.」
「나중에 후회하실걸요?」
「안 합니다.」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다면 후회하실 거예요.」
「제 마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좋겠네요.」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엘리자벳은 늘 더글라스의 연심을 지긋지긋하게 여겼다.
파혼당하고도 자신만을 쫓아다니는 그를 멸시하고 조롱했다.
하지만 그날만은 달랐다.
더글라스를 바라보는 새까만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애절함이 가득했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아는 사람처럼.
「약속해줘요. 제가 변해도 끝까지 사랑하겠다고요.」
「끝까지 사랑하겠지만, 사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무슨 말을 들은 거예요? 저라고 술주정뱅이로 평생 살고 싶은 줄 알아요?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요!」
「그럼 저는 엘리자벳의 변화를 응원하겠습니다.」
「좋아요. 이제 맹세해주세요.」
의아했지만 그녀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맹세를 할 수 있게 되어 더없이 행복했다.
더글라스가 오른손을 심장에 위에 올렸다.
목소리에 영혼이 담기기를 소망하며.
「나 더글라스 네틀톤은 어떤 모습이라도 엘리자벳을 지금처럼 사랑하겠습니다.」
만족스러운지 엘리자벳이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더글라스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처음이었다.
「당신의 그런 점이 아주 싫지는 않았어요.」
「엘리자벳?」
「그만 가세요. 너무 피곤하네요!」
그 뒤론 엘리자벳을 만날 수 없었다.
기적적으로 회복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을 때도 문 앞에서 쫓겨났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느릿느릿 흘렀다.
산채로 묻힌다 해도 그때만큼 괴롭지는 않을 터였다.
엘리자벳이 방문을 허락했을 때 더글라스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응접실로 걸어들어오는 엘리자벳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분명, 예전의 엘리자벳이 아니었다.
눈빛, 걸음걸이, 분위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손짓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벳. 파혼을 재고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물었다.
그날 나눴던 대화도, 낡은 책도 마치 없었던 일처럼.
「아직도 제게 미련을 못 버리셨나요? 조롱당하는 게 지겹지도 않아요?」
엘리자벳이 붉은 입술을 나풀거렸다.
차가운 목소리였으나, 예전의 엘리자벳이 풍기던 앙칼진 분위기는 사라졌다.
눈동자엔 현명함이 깃들어 더 맑게 빛났다.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사람은 더글라스뿐이었다.
열병을 앓았다고 눈빛이 달라질까?
아니면 엘리자벳이 그 소원을 이룬 걸까?
더글라스는 다시 오른손을 심장 위에 올렸다.
‘이 심장이 멈추기 전까지 나는 맹세를 기억할 것이다. 엘리자벳은 엘리자벳일 뿐이니까.’
더글라스는 새로운 엘리자벳에게 새롭게 빠져들었다.
다만 병상에 누운 그녀에게 잘 익은 와인을 건네지 않은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엘리자벳이 준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후회는 극에 달했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돕다 죽었다.
신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했다.
폭군과 놀아나는 방탕한 악녀의 삶일지라도 말이다.」
***
“축하해. 제국 제일의 유명인사가 된걸.”
프란츠가 삐죽거리며 박수를 쳤다.
내가 한동안 자리를 비워서 골이 난 모양이었다.
엠스터 상단의 상속녀가 괴한들에게 납치당했다는 소문이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어딜 가도 부담스러운 시선이 쏟아졌다.
영 껄끄러웠지만 감수해야 했다.
내가 벌인 일이었으므로.
“음유시인들이 엄청 바쁘대. 엘리자벳과 폐하의 러브스토리를 노래하느라.”
“쪼끄만 게.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듣는 거니?”
“하녀들도 시종들도 전부 그 이야기뿐이야.”
“정신교육을 다시 해야겠네.”
“폐하께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펼치셨다며? 황궁 지하 감옥이 범죄자들로 꽉 찼다던데?”
프란츠가 연두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저런 기세로 공부를 하면 전국 일등은 떼놓은 당상일 텐데.
우리 애는 커서 뭐가 되려는 걸까?
“연인을 구하러 적진에 뛰어드는 황제라니. 완전 멋져!”
“적진이라니. 어디 전쟁 났니?”
“로맨스 소설 주인공 같잖아. 백성들이 흥분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니까?”
“악녀에 홀린 폭군이 난동을 피웠다는 소문은 없어?”
“범죄자들을 처벌한 것뿐인데 그런 소문이 왜 나겠어? 오히려 엘리자벳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이는 모양새던데.”
자기가 그런 여론을 만들기라도 했다는 듯 프란츠가 자랑스레 말했다.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상처가 아물어갈 무렵 나는 오웬과 더글라스를 불렀다.
‘두 사람에게 이번 일을 은근히 퍼뜨려달라고 했지. 어차피 나게 될 소문이라면 내 쪽에 유리해야 하니까.’
군중들은 신데렐라를 좋아했다.
지체 높은 분들의 사생활에도 관심이 많았다.
하늘 위 하늘이라 믿었던 황제가 평민 여자를 사랑한다면?
그 평민 여자가 대귀족들에게 핍박을 당한다면?
더글라스의 손에서 이야기는 애절한 러브스토리로 재탄생했다.
탈옥수 신분으로 숨어 살던 오웬은 뒷골목과 빈민가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곳일수록 소문과 이야기에 민감한 법이었다.
더글라스와 오웬 덕에 나는 악녀 캐릭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황제 폐하의 연인’이란 칭호에 낯이 간지러웠지만,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엘리자벳이 납치 한 번 더 당하면 오페라도 만들어질 걸?”
“그게 죽을 뻔한 선생님한테 할 말이니?”
“그러게 날 데려갔어야지!”
“쌍으로 납치되고 싶어서?”
“내가 납치범들을 막았을 거야. 눈치가 워낙 빠르잖아.”
“아무렴 그렇고 말고요. 눈치 빠른 황태자 전하께서 절 지켜주셨을 테죠.”
제법 살이 오른 프란츠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프란츠가 볼멘소리를 냈다.
“걱정 좀 시키지 마! 엘리자벳이 자리를 비우니까,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어.”
“아. 그래서 숙제도 안 하셨구나?”
“…….”
“프란츠. 이게 뭔지 아니?”
책상 위에 쌓인 편지를 높이 들어 올렸다.
프란츠가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황태자 전하의 수업태도가 최악이라는 교수들의 탄원서야!”
“소리 지르지 않아도 들려. 우아하지 못한 거 티 내?”
“우아하게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겠냐?”
“으악, 빨간 늑대가 나타났다!”
프란츠가 방구석으로 도망갔다.
프란츠를 잡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잡아 올렸다.
그때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엘리자벳 님. 황제 폐하께서 지금 알현실로 들라 하십니다.”
***
붉은 융단이 깔린 계산 끝에 황금으로 장식된 황좌가 놓여 있었다.
황좌를 차지한 니콜라이가 길고 늘씬한 다리를 꼬았다.
그 아래 브렌든 후작과 시몬이 머리를 조아렸다.
‘저놈들이 얌전히 있을 리 없지. 수잔의 특제 연고 덕분에 상처는 거의 나았지만.’
반사적으로 니콜라이의 미간을 살폈다.
칼로 새긴 듯 깊은 주름이 그려져 있었다.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져 유감입니다. 하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브렌든 후작이 불만스레 말했다.
니콜라이가 물었다.
“뭐가 그리 급한가?”
“브렌든 후작가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일개 평민 여자에게 휘말려 전 재산을 걸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브렌든 후작이 턱살을 부들부들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소문을 퍼뜨린 것 역시 나였다.
‘내 재산을 날로 먹을 생각에 들떠 있다가 당황했겠지. 싸우기도 전에 패하리란 소문부터 돌았으니까.’
당황하고 흥분하길 바랐다.
그럴수록 내게 유리하므로.
“고정하십시오, 아버지. 황제 폐하 안전입니다.”
시몬이 점잖은 척 제 아비를 말렸다.
브렌든 후작이 아들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시몬! 이 치욕을 하루빨리 씻어야 한다. 네가 승리하면 허튼 소문도 사라지겠지!”
“기사가 허약한 아녀자를 상대로 어찌 싸우겠습니까?”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시몬!”
브렌든 후작이 연극조로 되물었다.
각본을 짜놓은 모양인데, 연기가 형편없었다.
시몬의 대사는 그럭저럭 들어줄 만했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내기였습니다.”
“무슨 뜻인지 자세히 설명해 보아라!”
“제가 저 여인과 검을 겨룬다면 비겁자란 비난부터 쏟아질 겁니다. 바느질을 겨룬다면 웃음거리가 될 테고요. 엘리자벳은 저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 겁니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내기를 제안했단 말이냐? 그건 사기 아니냐!”
브렌든 후작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니콜라이를 올려다봤다.
니콜라이는 석상처럼 무표정했다.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제삼자로서 상황을 관망할 모양이었다.
그에게 심판을 부탁한 건 나였지만 미심쩍었다.
얌전히 있을 남자가 아니었으므로.
“우리가 네 계략에 말려들 줄 알았느냐?”
브렌든 후작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날 쏘아봤다.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미소 지었다.
“이 내기가 브렌든 후작가에 불리한 건 사실이지요.”
“이제야 자백을 하는구나!”
“후작께선 제가 어쩌길 바라십니까?”
“나를 우롱하고 우리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니, 보상금을 내놓아라!”
뭐야? 겨우 목적은 돈이란 말이야?
어쩜 이렇게 뻔할까.
“얼마를 원하십니까?”
“엠스터 상단의 절반을 내놓거라. 관대하게 용서해주마.”
“별로 관대한 금액은 아니군요.”
“대귀족 가문을 능멸한 죄가 가벼운 줄 알았더냐? 두려운 줄 알면 간악한 술수를 부리지 말았어야지!”
벌써 돈방석에 앉은 듯 브렌든 후작이 콧대를 세웠다.
시몬이 날 가르치려 들었다.
“용서받을 길이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시오.”
다행은 무슨 다행.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개 주제에.
“시몬 경에게나 다행이겠죠. 패배의 망신에서 도망칠 수 있으니까요.”
“끝까지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군.”
“저는 공갈 협박범을 마주한 기분입니다.”
“공갈 협박범이라?”
“몇 마디 말로 저의 재산을 강탈하려 하시잖습니까? 납치에 협박까지……. 낮은 신분으로 산다는 게 정말 고되군요.”
“나를 범죄자와 비교하는 것이오?”
“싫으시면 정정당당하게 싸우시면 돼요. 어쩌시겠어요? 아버지 눈치만 보는 기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