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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밤의 황제, 낮의 황제 (47/97)


#47. 밤의 황제, 낮의 황제
2023.02.10.


시몬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부들부들 떨었다.

브렌든 후작이 아들의 팔뚝을 꽉 움켜쥐었다.


‘저 계집에게 말려들지 마라! 보상금만 뜯어내면 되잖니?’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입술을 깨물고 분을 참던 시몬이 경멸 어린 눈으로 날 훑었다.


“나약한 여인과 싸우는 건 기사도가 아니지!”

“발뺌을 하면서 기사도를 운운하다니. 졸렬하신데요?”

“졸렬? 날 도발하려는 모양인데 소용없다.”

“정말 관두시겠어요?”

“악녀의 함정을 피할 뿐이다. 아무도 나를 욕하지 않을 것이다.”

시몬이 씹어뱉듯 말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하지만 싫어도 하게 될걸?’

나는 니콜라이를 등지고, 시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른쪽 눈꺼풀을 찡긋하며 회심의 윙크를 날렸다.

원작 엘리자벳이 가진 능력.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불가항력의 마성!

몇 가지 제약이 있지만, 시몬을 유혹하는 건 너무나 쉬웠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릴게요, 시몬 경. 전 재산과 가문의 명예를 걸고 저와 싸워주세요.”

소낙비에 젖은 한 떨기 꽃처럼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수줍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손 키스도 날렸다.


 
-쪽.

시몬의 눈빛이 돌변한 건 그때였다.


“엘리자벳 양 뜻대로 하겠습니다!”

시몬의 우렁찬 대답에 브렌든 후작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말투도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내 무표정하던 니콜라이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브렌든 후작은 정신이 나가 보이는 아들의 어깨를 흔들었다.


“시몬! 가, 갑자기 왜 그러느냐?”

“엘리자벳 양은 계략 따위를 꾸밀 분이 아닙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저 여자의 계략을 눈치챈 게 너잖아?”

“사내대장부가 어찌 약속을 어기겠습니다. 여기서 도망친다면 저는 평생 얼굴을 들고 살지 못할 겁니다.”

“시몬!”

“애초에 내기를 받아들이신 것은 아버지입니다. 브렌든 가의 당주로서 책임을 지셔야지요.”

“네 놈이 미친 게 틀림없구나! 절대 안 된다! 저 여자가 함정을 파는 거야!”

목 졸린 돼지처럼 시뻘게진 얼굴로 브렌든 후작이 악을 썼다.

그래봤자 마성의 노예가 된 시몬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니콜라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당사자가 응하기로 했으니, 원래대로 속개하도록 하지.”

“황공하옵니다, 폐하.”

내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예를 올렸다.

시몬도 절도 있는 동작으로 허리를 숙였다.

오직 브렌든 후작만이 씩씩거렸다.


“거두어주십시오, 폐하! 기사와 계집이 어찌 싸울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점은 나도 좀 의문이다.”

“오오, 폐하! 드디어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군요!”

“엘리자벳도 모르지 않을 터. 어떤 방식으로 겨룰지 말하라.”

니콜라이가 내게 물었다.

무심한 말투였으나, 초록 눈동자엔 미처 숨기지 못한 걱정과 염려가 어려 있었다.


‘저를 믿어주세요. 다 계획이 있으니까요.’

진심이 니콜라이에게 전달되었길 바라며 시몬을 바라봤다.


“시몬 브렌든 경이 가장 잘하는 것으로 겨루겠습니다.”

“저는 엘리자벳 양께 맞춰도 괜찮습니다만?”

“그러실 필요 없어요. 황태자 전하를 지도하셨을 정도니, 검술이라면 제국 제일이시겠지요?”

“기사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쌓았다고 자부합니다.”

“그럼 검술 대련으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흐음. 엘리자벳 양이 진심으로 원하신다면 할 수 없지요.”

시무룩해진 시몬이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와 싸울 내가 패할 것을 염려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브렌든 후작의 찌그러진 얼굴에 한 줄기 빛이 깃들었다.


“내 아들 시몬은 제국 제일의 검사다! 가당키나 하겠느냐?”

“맞는 말씀이에요. 최고의 기사가 허약한 여자와 싸워서 이겨봤자, 욕밖에 더 먹겠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조금 전까지 각하께서 하신 말씀 아닌가요?”

브렌든 후작이 귀신에 홀린 표정을 지었다.

시몬도 얼떨떨했다.

동요하지 않는 사람은 니콜라이뿐이었다.


“황제 폐하. 브렌든 후작이 염려하는 것처럼 제국의 명예로운 기사가 한낱 여인과 결투를 한다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겁니다.”

“그대의 말이 옳다.”

“황제 폐하. 검술 대결의 대리인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윤허하여 주십시오.”

“윤허한다. 누구를 세우겠는지 말하라.”

“클라우디아 로즈로이스 경입니다. 그녀의 승리에 저의 전 재산을 걸겠습니다.”

 

***

클라우디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치미는 불쾌함을 참기 어려웠다.

단순히 엘리자벳이 자신을 꼭두각시로 지목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제도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설마 혁명을 꿈꾼다는 것도 눈치챈 건가?’

지나친 기우라는 걸 클라우디아도 알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단순히 자신을 모욕하고, 이용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명예를 먹고 사는 기사를 싸구려 내기의 검투사로 삼다니.

위험한 일에 직접 손을 담그지 않는 것이 참으로 엘리자벳다웠다.


“더글라스. 네 전 약혼자가 날 진흙탕에 끌어들인다.”

클라우디아가 크리스털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더글라스는 빙그레 미소 지을 뿐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네게 결정권을 주셨다며? 싫으면 거절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사랑싸움인지 권력 싸움인지 모를 것에 내 이름을 들먹였다는 사실만으로 몹시 불쾌해.”

“그건 그렇네. 하지만 네게도 도움이 될 거야.”

“그 알량한 황제 폐하의 연인을 도운 대가로 상이라도 받게 된다는 뜻인가?”

“엘리자벳이 아무 생각 없이 널 그렇게 이용할 리 없어. 그녀는 몇 수 앞까지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니까.”

“근거는?”

“그냥 감이라고 해두지.”

“세상에서 가장 서글픈 남자의 감이로군.”

더글라스는 아직도 엘리자벳을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것도 모자라 이기적인 행동을 옹호하고, 찬사마저 늘어놓았다.

그 희생양으로 친우인 클라우디아가 뽑혔음에도.

뻥 뚫린 가슴 사이로 메마른 모래바람이 스쳐갔다.

까끌까끌한 모래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서걱거리는 모래알을 뱉어내고 싶은데, 보이지 않는 모래알은 점점 늘어만 갔다.

더글라스를 향하는 제 슬픈 연심처럼.


“더글라스. 내가 뭘 고민하는지 너도 알잖아?”

“……반역 말인가?”

“혁명이라고 해야겠지.”

“과연 혁명일까? 제국은 평화로워. 폐하는 소문처럼 문란한 분이 아니시고.”

“황태자 전하를 가르치더니 황실의 하수인이 되었군.”

“라디아. 너야말로 확증편향에 휩싸인 것 같아.”

“빈민가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는 동안 황제는 뭘 했지? 엘리자벳의 치마폭에 둘러싸여 내기 따위나 하고 있잖아?”

“빈민 정책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가난은 황제 폐하 혼자서 해결할 수 없어. 군주를 욕하기 전에 권력을 나누어 가진 자들이 만든 제도부터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충성스러운 신하께 하나 묻지. 황제는 국경을 강화해도 모자랄 판에 남부 국경 수호 예산을 반으로 줄였다. 워든이 침략 전쟁을 걸어 오면 그땐 어쩔 텐가?”

남부 국경은 워든 왕국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데다가 해적떼도 자주 출몰하는 위험 지역이었다.

최정예 기사단과 군대가 주둔해도 모자랄 판에 니콜라이는 남부 국경 예산을 삭감했다.

대대적인 병력이동이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 기사단이 제도로 귀환하면 인테드 제도엔 녹슨 칼을 끌고 다니는 비렁뱅이만 득실거리게 된다.”

“폐하께서 무슨 생각이 있으셨겠지.”

“더글라스. 너의 선함과 순수함을 좋아하지만, 지금의 넌 선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아. 연심에 눈이 멀어 분별을 잊었을 뿐.”

독설이라는 걸 알면서도 클라우디아는 멈추지 않았다.

더글라스가 씁쓸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정말 엘리자벳을 사랑해서라면 가장 앞장서서 혁명의 깃발을 휘날리지 않았을까?”

“그게 무슨 뜻이지?”

“황제가 실각하면 내게도 기회가 생길 테니까.”

“……!”

“가끔 상상해보곤 해. 엘리자벳을 보호하고, 독점하는 그 남자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내가 그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녀도 날 원하지 않을까?”

클라우디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더글라스는 그녀가 알고 지내던 그 어떤 순간보다 뜨거운 눈빛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욕망의 불길이라는 걸.

남자의 소유욕이라는 걸.

연애 경험이 없는 클라우디아도 직감할 수 있었다.

주위를 아무리 맴돈다 해도 그의 마음 한 조각을 얻지 못하리란 것 또한.


 


“라디아, 너처럼 훌륭한 기사가 폭군과 악녀를 무찌르는 이야기도 있을 거야. 그렇다면 다시 태어난 악녀가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도 있지 않을까?”

“넌 소설을 너무 많아 봤어, 더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자꾸 응원하게 돼.”

“응원이라고?”

“그 악녀에게도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원래 좋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좋은 사람으로 변했을 수도 있지.”

“그렇게까지 엘리자벳을 믿고 싶은 거야?”

“믿고 싶은 게 아니라, 믿어. 그녀가 믿기지 않는 일을 저질렀다 해도 믿을 거야. 그러기로 맹세했으니까.”

더글라스는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다른 사내의 소유가 된 여인을 위해서.

그녀를 위한 맹세를 곱씹으면서.

자신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예리한 비수가 되어 클라우디아의 심장을 찌른다는 건 몰랐다.

그런 건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분노할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입 안쪽 살을 깨물며 클라우디아는 결심했다.


‘엘리자벳의 대리인으로 싸우겠다. 검을 들고 폭군과 악녀 앞으로 가겠다. 기회가 생긴다면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

 

***

막 침대에 누우려던 참이었다.


“클라우디아가 그대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쩔 셈이지?”

카나리아 방에 불쑥 숨어든 니콜라이가 다짜고짜 물었다.

차분한 손놀림으로 잠옷 앞섶을 가다듬었다.

야심한 밤에 외간 남자가 쳐들어오는데도 침착할 수 있다니.

나의 적응력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폐하. 오늘도 달이 밝네요.”

“인사 따위는 집어치우고.”

“뭐가 불만이세요? 저에게 맡겨주기로 한 거 아니셨어요?”

“시몬은 실력자다. 가문만 믿고 설치는 부류와는 좀 달라.”

“다행이네요. 클라우디아 경과 대등하게 싸워야 순순히 패배를 시인할 테니까요.”

“클라우디아를 제외하면 시몬을 이길 기사는 거의 없다.”

“그래서요?”

“다른 기사를 대리인으로 삼으면 그대가 질 수도 있다.”

“그게 걱정돼서 도둑고양이처럼 찾아오셨어요?”

반쯤 열린 창문으로 서늘한 밤바람이 흘러들어왔다.

니콜라이가 머쓱한 얼굴로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공간은 완벽하게 밀폐되었다.

그것만으로 우리를 둘러싼 공기는 농밀해졌다.

밤의 니콜라이는 낮의 니콜라이와 영 딴판이었다.

무생물을 보듯 차갑게 응시할 때는 언제고.

나의 솜털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한 두 눈이 용암처럼 뜨겁게 끓어올랐다.


“그대가 걱정된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 소리에 그의 중저음이 파고들었다.

어딘가 슬프고 애절한 목소리라 가슴 한구석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대 때문에 불안하다.”

니콜라이가 손을 뻗었다.

그 손가락이 내 입술에 닿기 전, 무릎에 힘이 풀렸다.

푹신한 침대 위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가 내 위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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