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네 명의 황비들
(48/97)
48. 네 명의 황비들
(48/97)
#48. 네 명의 황비들
2023.02.14.
그의 무게 때문에 침대가 출렁거렸다.
원래도 신체 조건이 남다른 남자였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더 그랬다.
넓디넓은 어깨.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
두툼한 가슴 근육.
그의 모든 것이 내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니콜라이와 한 침대에 있다는 것만으로 온몸에 열기가 번졌다.
이성이 저 멀리 달아나버렸다.
오늘의 달이 저물고,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날 내려다보는 그를 감상하고 싶었다.
“엘리자벳. 날 미치게 하는 게 재미있나?”
꾹 참았다가 비어져 나오는 목소리였다.
그의 눈동자에서 낯선 갈증이 이글거렸다.
숨을 들이마시는 것도, 내쉬는 것도, 모두 쉽지 않았다.
차라리 멈춰버릴까.
그럼 이 시간도 멈출 수 있을까.
허망한 상상을 애써 지우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폐하께서 미치광이가 아니라, 성군이 되길 바라요.”
“왜?”
“성군인 폐하 밑에서 잘 먹고 잘살려고요.”
거짓말은 그것으로 족했다.
니콜라이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그의 뺨은 따뜻하고 매끄러웠다.
잠시 움찔했으나, 니콜라이는 내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가끔 그가 내 손이 닿는 거리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함부로 황제를 만질 수 있다는 것도, 내 손길을 느끼며 니콜라이가 졸린 고양이처럼 나른한 표정을 짓는 것도 모두 꿈만 같았다.
‘당신이 성군이라 불리는 걸 보고 싶어요. 당신 곁에 나란히 서고 싶어요. 당신의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가슴이 미어지는 통증과 허망한 허무가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콧잔등이 시큰했다.
시야가 희뿌옇게 번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니콜라이의 살결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래, 잠깐만 이 순간을 즐기자.
언젠가 사라질 테니까.
한참 말이 없던 니콜라이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평생 혼인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왜 그런 뜻이 되는 거죠?”
“잊었나? 황비가 아닌 여인은 황궁에 살 수 없다.”
“그래서 황태자 전하의 교육담당이 된 거죠.”
니콜라이가 휙 몸을 일으켰다.
혼자 남겨진 침대가 휑뎅그렁했다.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소유욕은 당신에게만 있는 게 아니에요. 독점욕도 마찬가지죠. 날 두고 다른 여자를 품는 당신을 용서할 수는 없어요.’
차마 뱉을 수 없을 말을 되삼켰다.
쓰디쓴 허탈함이 혀끝에 맴돌았다.
‘평생을 함께하지 못할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나도 싫어요. 그러니 우리는 유혹게임을 계속해야 해요. 그것이 서로 곁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제야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근육을 움직여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저와 혼인하고 싶으시면, 패배부터 인정하세요. 응? 쿨하게.”
본심은 달랐다.
니콜라이가 패배 선언을 할까 봐 조바심이 치밀었다.
이 유혹게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서로를 유혹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 거침없이 스킨십을 나누는 건 오로지 게임 안에서만 가능했으므로.
“그대야말로 내게 반한 것 같은데?”
“착각하셨어요.”
“그대는 반하지도 않은 남자를 함부로 만지나?”
“일종의 전략이죠.”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시몬에게 윙크한 건가?”
니콜라이가 거침없이 물었다.
그건 또 어떻게 봤담?
여기저기 눈이 달린 건가?
“눈꺼풀이 좀 떨린 것뿐이에요.”
“손 키스는?”
“손에 뭐가 묻었나 보죠.”
“그 이후에 시몬의 태도가 돌변했다.”
“아시잖아요. 시몬이 실없고, 변덕스러운 남자라는 걸.”
이번에도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날 바라보는 니콜라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카레스도 비슷한 행동을 했다.”
“……!”
“그대에게 지나치게 다정하고 정중해. 원리원칙을 벗어나 편의를 봐주는 일도 서슴지 않지. 나 말고는 아무 관심이 없는 게 정상인데.”
“두 분이 그렇게 다정하신 줄 몰랐네요.”
“카레스가 변했다. 그대 때문에.”
“폐하. 피곤하지 않으세요?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하암…….”
하품하며 눈치를 줬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엘리자벳. 대체 어떤 조화를 부리는 거지?”
“…….”
“내게 뭘 숨기는 것이냐?”
이어지는 추궁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희미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하나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엘리자벳이란 이름조차 진짜 내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접근한 이유도, 그를 성군으로 만들려는 까닭도 고백하지 못했다.
아마도 앞으로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주제에 마음만 깊어졌다.
당신만이 내 진심이라는 걸 누가 믿어줄까.
나조차 나 자신이 혼란스러운데.
“폐하도 모든 걸 털어놓지 않으시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엘리자벳.”
“우리 관계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해요.”
“각자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은 것뿐이라는 건가?”
“계약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니까요.”
니콜라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한순간 욕망에 흔들리고, 다정함에 취하고, 그리움에 애가 닳지만, 우리 사이에 깊고 차가운 강이 흐른다는 걸.
그 강을 쉽사리 건너지 못하리란 걸.
“그렇지. 그대와 나는 계약관계일 뿐이지.”
니콜라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짜르르한 통증이 심장을 휘감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여야 했다.
“방해해서 미안하다.”
“안녕히 주무세요.”
“뭘 꾸미는지는 모르나, 그대의 승리를 기원하겠다.”
***
로즈 브렌든 황비가 라일락 정원에서 티파티를 열었다.
물론 출신이 천한 황비들은 초대하지 않았다.
라일락 정원에서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차를 마실 수 있는 건 오직 4대 명문가 출신 황비뿐이었다.
적갈색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로즈가 다이아몬드 팔찌를 자랑했다.
하지만 새 팔찌에 알은척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신시야 블랙폴드 황비는 꼿꼿한 자세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프레이아 리먼 황비는 멍하니 정원의 경치를 감상하느라, 엠마 파이프 황비는 어깨를 오그리고 주위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책벌레, 넋 빠진 인형, 소심한 바보……. 황후가 될 재목은 역시 나밖에 없다니까!’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로즈가 버터 쿠키를 와그작 씹었다.
“바쁘실 텐데 와 주셔서 감사해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로즈. 오늘도 과자가 참 맛있네요.”
예의를 차리는 건 엠마뿐이었다.
겁에 질린 다람쥐처럼 작은 여자였지만, 똑똑한 척하는 신시야나 혼자 공상에 빠져 있는 프레이아보단 나았다.
“엠마의 요리사도 훌륭했어요. 라벤더 잼 케이크를 아주 잘 굽더군요.”
로즈가 군침을 다셨다.
요즘 부쩍 살이 올라서 코르셋을 죄면 숨쉬기 불편했다.
하지만 달콤한 간식을 포기할 수 없었다.
감옥 같은 후궁 생활의 유일한 낙 아닌가.
“오늘도 음식 이야기만 할 거면 돌아가겠어요. 토론회가 잡혀 있어서요.”
신시야가 책을 탁, 소리 나게 접었다.
책을 옆구리에 낀 신시야가 곧게 뻗은 짙은 갈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술을 깨무는 로즈를 대신해 엠마가 말했다.
“초대한 사람의 정성이 있잖아요? 함께해주세요, 신시야.”
“엠마. 로즈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브렌든 후작가의 운명을 안다면 더더욱이요.”
신시야의 말에 로즈가 발끈했다.
“말씀이 좀 심한 거 아닌가요, 신시야?”
“로즈의 오라버니께서 그 여자와 결투를 한다면서요? 사교계는 물론 저잣거리까지 소문이 파다해요.”
‘그 여자’라는 말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후궁에서 엘리자벳의 이름은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총애가 그녀에게 쏠린다는 것 자체가 후궁의 불명예였다.
황후를 노리는 4명의 황비에겐 더욱 그랬다.
“소문이 나서 다행이군요. 우리 가문이 제국 최고의 거부가 될 테니까요!”
“배부른 자는 고뇌하지 않는다더니. 옛말이 틀리지 않는군요.”
신시야가 눈가를 찌푸렸다.
로즈의 눈에 신시야의 삐쩍 마른 몸매와 드레스 밖으로 드러난 빗장뼈가 오늘따라 거슬렸다.
당장 뺨이라도 올려붙이고 싶었지만, 미래의 황후로서 기품을 보여야 했다.
“신시야. 똑똑한 척해봤자 소용없어요. 그 여자가 쫓겨나면 하트만의 심장은 내 것이에요.”
“국법에 따르면 범죄자의 딸은 황후가 될 수 없어요.”
“뭐라고요?!”
“그 여자가 납치당했잖아요. 안타깝게 살아 돌아왔지만. 누가 범인이겠어요?”
“지금 우리 가문을 배후로 모는 건가요?!”
“그 여자를 납치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계산해보면 답은 뻔하죠.”
“말도 안 돼!”
“범죄자들이 잡혀 왔으니, 죄상이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겠지요. 로즈가 연좌의 죄로 투옥되지 않게 기도할게요. 제 기도가 통할지는 모르지만.”
쌀쌀맞은 말을 남기고 신시야가 떠났다.
로즈가 화를 참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황후가 되면 신시야 쟤부터 쫓아낼 거야!”
엠마가 애써 그녀를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로즈. 폐하께서 증거도 없이 브렌든 후작가를 핍박하실 리 없어요.”
“내가 왜 걱정을 해요? 아무 죄도 없는데!”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분명 그 여자의 자작극일 거예요. 천한 몸뚱이로 폐하의 관심을 끌려고 안간힘을 쓴 거예요.”
“이미 그녀는 폐하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는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엠마의 말에 로즈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당신은 누구 편이에요, 엠마! 우리가 힘을 합쳐 그 여자를 없애야 한다는 것 잊었어요?”
“진정해요, 로즈. 괜한 의심부터 살 수 있어요.”
“무슨 의심이요?”
“그, 그게…….”
엠마는 어물거릴 뿐 대답하지 못했다.
풀잎을 꺾어 빙글빙글 돌리던 프레이아가 툭 던지듯 한마디 했다.
“브렌든 후작이 납치 배후라는 의심이지 뭐겠어?”
“프레이아!”
“소리 지르지 마. 여론이 그렇다는 거니까. 누가 만든 여론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정말 예의라곤 쥐뿔도 모르는군요.”
“뭐 어때? 눈치 볼 사람도 없는데.”
프레이아가 치렁치렁한 금발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무례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미모는 햇살처럼 반짝였다.
다른 황비들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미녀였지만 프레이아는 살아 움직이는 인형처럼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뽐냈다.
미모의 프레이아.
지혜의 신시야.
기품의 엠마.
정열의 로즈.
로즈는 다른 황비들의 별명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었다.
자신의 별명도 마음에 안 들었다.
붉은 머리칼은 이제 로즈가 아닌 엘리자벳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으니까.
‘그 여자가 내 모든 걸 빼앗아갔어. 아버지는 얌전히 있으라고 하셨지만, 모른 척할 수 없지!’
마침 시녀가 귓속말을 건넸다.
엘리자벳이 어떤 소녀와 황태자궁 후원을 산책 중이라고 했다.
“죄송하지만, 티파티는 이만 끝내야겠네요. 급한 볼일이 생겨서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로즈가 통보했다.
오늘이야말로 엘리자벳이란 여자의 잘난 콧대를 짓밟아줄 작정이었다.
지금부터 자신이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