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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우리 애 건드리면 용서 안 해 (49/97)


#49. 우리 애 건드리면 용서 안 해
2023.02.17.



“여기가 황태자 궁이군요? 엘리자벳 언니랑 함께 황궁을 산책하다니. 꿈만 같아요.”

수잔이 발그레 달아오른 두 뺨을 감싸며 웃었다.

16살 소녀는 갓 피어난 수국처럼 청초하고 싱그러웠다.

날 바라보는 갈색 눈엔 변함없는 애정이 반짝거렸다.


“저도 수잔을 보니 힘이 나네요.”

“상처는 좀 어떠세요?”

“수잔의 연고 덕에 금방 나았어요.”

“많이 아프셨죠?”

“가벼운 상처였어요. 호들갑 떤 게 민망할 정도로요.”

“언니의 아름다운 몸에 흠이 생기면 안 될 텐데……. 그 나쁜 놈을 만나면 이 주먹으로 때려줄 거예요!”

수잔이 솜인형처럼 작은 주먹을 허공에서 흔들었다.

언제부턴가 수잔은 날 좋아하는 걸 넘어 추앙하는 것처럼 보였다.

센 언니 스타일의 아이돌을 동경하는 아이 같달까?


“상처는 흠이 아니에요, 수잔. 영원한 아름다움도 없고요.”

“하지만 엘리자벳 언니는 평생 아니, 영원히 아름다우실걸요? 제가 장담해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어요? 작은 열매 한 알에도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들어있는 거죠.”

고등학생 때 읽었던 시 구절을 읊조렸다.

두 손을 모은 수잔이 작은 입술을 빠끔거렸다.


“너무 감동적인 시에요! 언니는 문학에도 재능 있으시군요!”

“어디서 주워들은 것뿐이에요.”

“낭송은 아무나 하나요? 오라버니가 권하셔서 몇 번 도전해봤지만 저는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요. 약제사 일은 힘들지 않아요?”

“수석 치료사 제프리 님께서 많이 배려해 주세요. 요즘은 발작도 없고요.”

“무리하면 안 돼요.”

“노력 중이에요. 황궁에 희귀한 연구자료가 많아서 참을 수가 없어요. 제프리 님께서 저처럼 열정적인 약제사는 처음 봤대요. 헤헤.”

뿌듯함과 쑥스러움을 담아 수잔이 분홍색 혀를 살짝 내밀었다.


‘당분간은 문제가 생기지 않겠어. 수잔은 어느 때보다 건강한 상태야.’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로 확인한 결과 초록 연기는 잠잠했다.

스펀지처럼 지식을 빨아들이며 놀라운 속도로 발전 중인 수잔을 배려해 주겠다는 듯.


「몇 년 후에는 제국 역사에 남을 천재 약제사가 탄생할 겁니다! 저도 수잔에게 영감을 많이 받았습니다. 수잔을 천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자벳 양.」

황궁 수석 치료사가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수잔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인재였다.

수잔이 백성들을 살리는 명약을 개발할 수 있을까?

하지만 수잔 몸에는 초록 연기라는 미지의 폭탄이 숨겨져 있었다.


‘병명을 아는 것 말고도 다른 능력이 있으면 좋을 텐데. 두 번째 신물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 신물은 어떤 특전을 가지고 있을까?’

 

 
하얀빛으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모라신시아의 신물을 찾지 못하면 영혼이 소멸한다고.

간이 커진 건지, 배짱이 두둑해진 건지 전만큼 조바심이 나진 않았다.


‘내 영혼이 사라지면 누가 신물을 모으겠어? 여러모로 유용한 날 쉽게 없앨 리 없어.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더더욱.’

괜히 서두르면 될 일도 그르치는 법이었다.

나는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신물을 수색할 작정이었다.

다른 보물도 아니고, 치유의 여신의 신물 아닌가?

영혼도 지키고, 새로운 특전도 얻고.

꿀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언니. 손님이 찾아오신 것 같아요.”

그때 수잔이 굳은 표정으로 내 팔에 매달렸다.


“저 레이디께서 언니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고 계세요.”

호화스러운 오렌지색 드레스를 나풀거리며 한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말린 고추처럼 불그스름한 적갈색 머리칼.

다이아몬드 팔찌, 루비 목걸이, 사파이어 귀걸이 등 화려하지만 일관성 없는 장신구.

자기소개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로즈 브렌든.

브렌든 후작의 외동딸이자, 시몬의 여동생이었다.


‘드디어 황비1 등장인가?’

 

***

로즈 뒤에 서 있던 시녀가 완고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황비 마마를 뵈었으면 예를 올리셔야죠?”

“황, 황비 마마를 뵈옵니다.”

화들짝 놀란 수잔이 머리를 조아렸다.

나도 적당히 예의를 차렸다.

로즈는 레이스 부채로 입매를 가린 채 날 위아래로 훑었다.


‘남을 빤히 바라보는 것도 큰 결례인데. 하여간 귀족들이란.’

빙의 후 실감했다.

예의 운운하는 인간들치고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도 없다는 걸.

잘난 핏줄 말곤 내세울 것 없는 허접한 귀족들은 더 그랬다.

떠받들어지길 바라는 것뿐이면서 꼭 고상한 척했다.


‘동방예의지국 출신 앞에서 예의 운운하다니. 저런 애들을 만나면 매운맛을 보여주고 싶어진다니까.’

하지만 상대는 니콜라이의 아내였다.

곧 내게 무릎 꿇게 될 가문의 딸이었고.


“황태자궁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황비 마마.”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들렀지.”

로즈가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동물이 털을 곤두세우듯 온몸에 사치품을 휘감고 왔으면서 우연이라고?

황태자궁에서 멀리 떨어진 후궁을 눈짓하다 살포시 웃었다.


“부르시면 찾아뵈었을 텐데요.”

“내 처소에 너 같은 것이 드나들 수 있을 줄 아느냐?”

“그럼 앞으로도 우연히 들르셔야겠네요.”

날 바라보는 로즈의 눈빛이 한층 더 살벌해졌다.


“폐하의 연인을 만나 뵙는데 그 정도 수고는 감수해야겠지.”

“저는 황태자 전하의 교육담당관일 뿐입니다. 낭설은 흘려들으십시오.”

“백 년 묵은 여우라더니. 저잣거리 낭설도 거짓만은 아니로구나.”

로즈의 비아냥거림에 수잔의 고운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분노를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얼른 눈앞에서 치워줘야겠네.


“그런 말씀을 하려고 오신 것은 아닐 테지요?”

“용건만 간단히 하라는 거냐?”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태자를 등에 업고 기고만장이로군. 황궁이 네 집 같으냐?”

“제 말이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우아한 몸짓으로 고개 숙였다.

로즈가 콧방귀를 대차게 뀌었다.


“천한 계집이 어디서 황실 예법을 좀 배웠나 보네. 원숭이가 흉내 내도 너보다는 낫겠지만.”

“…….”

“감히 우리 가문에 도전하다니. 울며불며 후회해도 소용없다. 오라버니와 아버지께서 널…….”

로즈의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다.

아무도 듣지 않는 소리를 저렇게 오래 떠들 수 있다니.

어떤 면에서 대단한 여자였다.

어젯밤 잠을 설친 탓에 졸음이 몰려왔다.

하품을 참느라 눈에 힘을 줬다.

부산스럽게 흔들리는 로즈의 적갈색 머리칼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태양초 고춧가루랑 똑같은 색이네.’

내가 딴청 피우는 걸 눈치챈 로즈가 앙칼지게 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지?”

“로즈 황비님의 머리칼이 말린 고추랑 똑같…… 아니, 제가 사랑하는 식물을 닮으셨거든요.”

에둘러 변명했다.

로즈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무슨 식물인데?”

“제 고향에서만 자라는 귀한 식물이지요. 빨갛고, 반짝이고, 도도하면서도, 화끈합니다.”

“흐음. 이름이 고추라고?”

“만인이 사랑하는 식물입니다. 없어서 안 될 존재로 추앙받기도 합니다.”

한국인의 식탁에 고추가 빠질 수 없지.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고, 고춧가루를 팍팍 넣은 김치를 생필품으로 여기는 민족 아닌가?


“흐응. 나처럼 아름다운 꽃인가 보구나?”

칭찬 아닌 칭찬에 만족스러워하던 로즈가 턱을 치켜들었다.


“아첨해도 소용없어. 시몬 오라버니께서 승리하실 거야. 오라버니는 제국 최강이시니까.”

“클라우디아 경께서도 최선을 다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말대답은……. 하지만 네 진짜 특기는 침대 위 기술인 거겠지?”

입가의 미소가 사라졌다.

오늘은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어딜 가든 제 명을 스스로 재촉하는 인간이 있었다.


“폐하께서 한 여인을 이토록 가까이하신 건 처음인데, 네 기술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폐하를 사로잡았겠느냐?”

“엘리자벳 언니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잠자코 있던 수잔이 아랫입술을 떨었다.

로즈가 도끼눈으로 수잔을 노려봤다.


“넌 또 뭐야?”

“황궁 약제사, 수잔 네틀톤입니다.”

“네틀톤? 아…… 도박꾼과 돌팔이 약사, 소설가 나부랭이만 득실거리는 그 집구석!”

로즈가 맹렬한 독설을 퍼부었다.

큰 충격을 받은 듯 수잔의 작은 몸이 휘청거렸다.

그것도 잠깐.

수잔이 당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틀톤 후작가입니다. 초대 황제께 신물을 하사받은 5대 가문 중 하나고요.”

“쫓겨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런 소릴 하느냐? 제국엔 오직 4대 명문가뿐이다.”

“그렇지만…….”

“쫄딱 망했다지만 명색이 귀족인데. 넌 자존심도 없니? 천한 여자를 언니, 언니 하며 쫓아다니다니.”

“엘리자벳 언니는 마마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가엾어라. 제 오라비를 먹다 버린 개뼈다귀 취급한 여자에게 살랑대는 꼴이라니.”

겨우 참고 있던 눈물 한 방울이 수잔의 뺨을 가로질렀다.

순간 인내심이 뚝 끊어졌다.

날 건드리는 것도 안 참지만, 우리 애 건드리는 건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참지도 않을 거고.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황비 마마.”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서늘한 목소리가 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갔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지나는 길이셨다니, 얌전히 지나가 주시지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건방진 계집이!”

로즈가 날 향해 손날을 치켜세웠다.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지만 켄싱 백작 부인 때와 상황이 아주 달랐다.

나에겐 로즈를 용서해줄 마음이 없으니까.

-짝.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렸다.

로즈의 오른손이 내 왼뺨을 후려치려는 순간.

입을 가리는 척하며 왼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이 소리는 손바닥과 손바닥이 부딪치며 나는 소리였다.

하지만 풀썩 옆으로 쓰러졌다.

그걸로는 모자라 데구루루 굴렀다.


“아악!”

낭랑한 비명도 빼놓지 않았다.

수잔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엘리자벳 언니! 괜찮으세요?!”

“수, 수잔…….”

“얼굴이 너무 창백해요! 흑흑.”

진짜 얻어맞았으면 빨개졌겠지.

지금 필요한 건 약간의 뻔뻔함과 자신감 있는 연기력이었다.


“괜, 괜찮아요.”

바람 불면 날아갈 듯 가련한 표정으로 수잔에게 기댔다.

내가 시한부 판정을 받기라도 한 듯 수잔이 소리 높여 울었다.


“제대로 맞지도 않았는데 왜 난리야?”

“어떻게 사람을 때릴 수 있죠? 엘리자벳 언니가 잘못되면 황비 마마께서 책임지실 거예요?”

수잔이 제법 앙칼진 눈으로 로즈를 올려다봤다.

수잔의 기세에 움찔한 로즈의 말투가 누그러졌다.


“어머, 얘 좀 봐. 누가 들으면 몽둥이라도 휘두른 줄 알겠네.”

“몽둥이를 휘두르신다고요? 우리 언니를 죽이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소리를 떠드는 거야?”

“납치당할 때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다시 피가 배어 나오는 것 같아요, 언니!”

수잔이 아랫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태자 궁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어떤 남자의 고막을 때리고도 남을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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