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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너부터 끝장내 주마 (50/97)


#50. 너부터 끝장내 주마
2023.02.21.


맞은 건 뺨인데 등에 있는 상처가 왜 벌어지겠는가.

사실 뺨도 맞은 것도 아닌데, 왜?

얼떨떨한 눈으로 수잔을 바라봤다.

수잔이 날 향해 한쪽 눈을 찡끗했다.


‘착한 사슴인 줄만 알았는데, 다 컸구나!’

찐한 동질감이 밀려들었다.

친동생이 있다 해도 이토록 대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것들이 날 놀리는 것이냐?”

로즈가 씩씩 콧김을 뿜었다.


“마마. 진정하시지요!”

안절부절못하던 로즈의 시녀가 주인을 말렸다.

음유시인들이 찬양하는 ‘황제 폐하의 연인’이 다칠까 봐.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두려운 기색이었다.

그 예상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무슨 소란이냐?”

차갑게 굳은 중저음이 좌중을 사로잡았다.

나는 왼쪽 눈꺼풀만 슬쩍 올려서 니콜라이를 바라봤다.


‘사신단 접견이 있다더니 제복을 갖춰 입었네. 박력 장난 아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제복을 입은 니콜라이는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빛무리를 흩뿌렸다.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정리된 검은 머리카락은 금욕적이면서도 관능적인 매력을 풍겼다.

어깨를 장식한 황금색 수술.

가슴을 가로지르는 붉은 띠.

소매의 금 단추 하나까지 그의 미모를 돋보이게 했다.

물론 사신단을 알현할 시간에 황태자 궁에 나타난 이유는 짐작할 수 없었다.


“제국의 하늘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로즈가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인사를 올렸다.

두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와 수잔을 몰아세우던 멧돼지가 한 떨기 장미처럼 수줍어하는 꼴을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


‘이런 황비들이 셋이나 남았다는 거야? 그 밖의 황비들은 셀 수 없이 많고? 이래서 여자관계 복잡한 남자랑은 엮이면 안 되는 건데.’

니콜라이는 로즈의 인사를 깨끗하게 무시했다.

그가 내게 다가왔다.

익숙한 체취도 함께였다.

그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을 때, 여기저기서 낮은 신음이 터졌다.


“엘리자벳. 무사한 것이냐?”

봄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보드랍고, 갓 뽑아낸 솜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날 바라보는 눈길에서도 꿀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황홀한 달콤함에 잠시 아찔했다.


“그대의 비명을 들었다.”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왜 놀랐지?”

“그게…….”

“설마 누군가에게 손찌검을 당한 건 아니겠지?”

모든 걸 지켜본 사람처럼 니콜라이가 물었다.

초록 눈동자에 가득하던 꿀물은 자취를 감췄다.

빈자리를 흉흉한 살기가 채웠다.

로즈와 수잔이 어깨를 튕길 만큼 살벌한 기세였다.


 


“말해보아라, 엘리자벳. 그대를 해치려 한 자가 있다면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저는 괜찮아요, 폐하.”

“나는 괜찮지 않다.”

“다치지 않았어요.”

“해치는 것에는 위협과 협박도 포함한다.”

“폐하께서 불필요한 소문에 휘말릴까 염려됩니다.”

두렵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니콜라이가 힘주어 말했다.


“폭행은 큰 죄다. 처벌이 약하면 범죄가 더 날뛰는 법이지.”

“하지만 황비 마마는…….”

“신분이 높은 자가 악행을 저지르면 더욱 엄히 다스려야 마땅하다.”

로즈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어버버 거리고 있었다.

로즈의 시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수잔이 두 무릎을 털썩 꿇었다.


“폐하. 제가 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는 네틀톤 후작의 누이 아니냐?”

“부족합니다만 황궁 약제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촉망받는 인재라 들었다. 본 것을 빠짐없이 고하라.”

니콜라이가 준엄하게 명령했다.

수잔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똑 부러지게 답했다.

미리 준비한 대본을 읽는 것처럼.


“황비 마마께서 엘리자벳 언니를 협박하고 폭행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누명입니다! 폐하!”

새파랗게 질린 로즈가 악을 썼다.

니콜라이가 닥치라는 뜻으로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계속 말하라.”

“저희 네틀톤 가문을 모욕한 건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니를 때리고 욕보인 것만은 참을 수 없습니다.”

“……때렸다고?”

“저뿐만 아니라, 마마의 시녀도 보았습니다. 엘리자벳 언니가 나동그라질 정도로 심한 매질을 당한 것을요.”

니콜라이의 시선이 날 향했다.

열심히 뒹군 덕분에 몸 여기저기에 잔디가 묻어 있었다.

궁지에 몰린 로즈가 납작 엎드렸다.


“살짝 건드렸을 뿐입니다! 천한 것이 황비인 저를 모욕했습니다!”

“자백인가?”

“아버지를 불러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겁니다!”

“황태자 궁엔 왜 왔지?”

“그, 그냥 우연히 지나치다……!”

사색이 된 로즈가 말을 더듬었다.

니콜라이가 뻔한 변명을 들어 줄 리 없었다.

그가 턱짓했다.

대기 중이던 근위 기사들이 우악스러운 손으로 로즈의 시녀를 붙들었다.

시녀가 묻지도 않은 말을 털어놓았다.


“황비 마마께서 엘리자벳 양을 때리는 걸 보았습니다. 엘리자벳 양은 오른쪽으로 세 바퀴 반을 구르셨고요.”

“그리고?”

“황비 마마는 우연히 오신 게 아닙니다. 엘리자벳 양을 짓밟아버리겠다는 말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로즈가 핏발 선 눈을 부릅떴다.


“배은망덕한 것! 내 앞에서 꼬리를 흔들 때는 언제고!”

“저는 황비 마마를 모시고 싶지 않았어요. 브렌든 후작 가에 진 빚 때문에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끌려온 것뿐입니다.”

“닥치지 못하겠느냐?”

로즈는 끝났다고 생각한 걸까.

로즈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잡고 싶었던 걸까.

시녀가 작심한 듯 서둘러 말을 이었다.


“브렌든 후작가가 고리대금으로 하급 귀족들의 피를 빨아먹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급전에 이자가 붙는 게 당연하지!”

“원금의 10배가 넘는 이자를 요구하셨잖아요? 일부러 돈을 갚지 못하게 만들고, 전 재산을 빼앗아가는 건 깡패들이나 하는 짓 아닌가요?”

브렌든 후작가는 돈으로 귀족들을 포섭하고, 귀족원 내의 발언력을 키웠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후작가가 자랑하던 금광은 바닥난 지 오래였다.

영지 살림도 형편없어서 세금도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고리대금이었어? 측근 시녀가 저렇게 일러바칠 정도니 평민들은 대체 얼마나 괴롭힌 걸까?’

우연히 시작된 일이지만, 브렌든 후작가만큼은 꼼꼼하고 철저하게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브렌든이란 이름이 다시는, 누구도 괴롭히지 못하도록.


“폐하. 저 시녀는 잘못이 없습니다.”

내 시선을 받은 니콜라이가 냉정한 어조로 되물었다.


“옆에서 부추기진 않았더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의 악행을 막지 못한 것도 큰 죄다.”

“어떤 시녀가 주인을 거스를 수 있습니까. 부디 황은을 베풀어주십시오.”

니콜라이의 아량은 딱 거기까지였다.


“로즈 브렌든을 황궁 얼음탑에 가둬라.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 아무도 면회할 수 없다.”

 

***

니콜라이는 내 곁에 머물고 싶어 했다.

나도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등을 떠밀 수밖에 없었다.

각국의 사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픈 척하는 것도 퍽 피곤한 일이었다.

니콜라이가 떠나자마자, 나는 수잔과 함께 황궁 밖으로 나왔다.


“엘리자벳 언니. 오늘은 쉬셔야 하지 않을까요?”

흔들리는 마차에서 수잔이 물었다.


“맞지 않았다는 건 수잔이 제일 잘 알잖아요?”

“그래도 쓰러지셨잖아요.”

“쓰러진 척한 거죠. 수잔이 절 걱정하는 척한 것처럼요.”

다시 생각해도 부끄럽다는 듯 수잔이 얼굴을 가렸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설쳤죠?”

“자랑스러웠어요.”

“정말요?”

“역시 제 동생다웠어요.”

“언니……!”

벅차오른 감동 때문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수잔이 두 손을 포개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영원히 오늘을 잊지 못할 거예요. 언니와 진짜 가족이 되고 싶었거든요.”

“수잔…….”

“오라버니 얘기를 한 건 아니에요. 부담스러우실 테니까요.”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수잔.”

“대신 소원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소원이 뭔데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짝 긴장한 수잔이 기합을 넣어 대답했다.


“부디 하대해주세요! 존댓말은 거리감이 느껴져서 싫어요.”

“수잔은 후작가의 영애고 저는 평민이에요.”

“제가 언니를 존경하고, 언니가 절 아껴주시는데 그깟 게 다 무슨 상관이죠?”

“하지만…….”

“신분보다 성품이 중요하다는 걸 가르쳐준 사람도 언니예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수잔이 간절함을 담아 날 올려다봤다.

그 투명하고 커다란 눈동자를.

맹목적인 호의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좋아, 수잔. 하지만 단둘이 있을 때만이야?”

“정말 고마워요, 언니! 평생의 소원이 풀렸어요!”

수잔이 내 품을 파고들었다.

향긋한 비누 향과 은은한 약초 냄새가 기분 좋게 다가왔다.

내 마음 역시 고향에 돌아간 듯 포근해졌다.

고향은 무의미하고, 진짜 가족은 가져본 적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수잔 같은 여동생이 있었으면 했어.”

“언니는 제가 지켜드릴 거예요!”

“든든하네.”

“보리츠란 농부를 설득해야 한다고 하셨죠? 식물 연구에 관심이 있다면, 저랑 말이 통할 거예요.”

“수잔만 믿을게.”

“기대해주세요. 뭐든 할 수 있으니까요!”

수잔의 발그레한 뺨을 보면서 죄책감을 삼켰다.

수잔의 자살을 막은 것도, 연구를 응원한 것도 모두 계산속이었다.

날 좋아하는 아이니까 앞날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봄 햇살처럼 따스한 수잔의 진심이 내 마음마저 녹여버렸다.


‘수잔이 친동생처럼 소중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명씩 늘어가. 이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걸림돌이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득실을 떠나 수잔과의 인연이 귀했다.

나는 속으로 수잔의 병을 꼭 치료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자면 치유의 여신, 모라신시아의 신물이 필요했다.


 

***

얼음탑은 황궁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감옥이었다.

황족이나 대귀족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만 살벌하기는 지하 감옥 못지않았다.

얼마나 추운지 한여름에도 서리가 낄 정도였다.

하지만 죄수에겐 모포 한 장 주지 않았다.

폐황후 페넬로페 이후, 얼음탑은 오랜만에 손님을 맞이했다.

자연스럽게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로즈 황비가 엘리자벳을 때려서 기절시켰다지?”

“거의 죽을 뻔했다던데?”

“워낙 성질이 나쁜 여자잖아? 언젠간 터질 줄 알았어.”

“이번에도 황제 폐하께서 엘리자벳을 구해주셨다며? 참사랑이다, 진짜!”

“로즈의 시녀가 그 자리에서 처형당할 뻔했대. 엘리자벳이 폐하께 무릎 꿇고 빌지 않았으면 애꿎은 시녀만 죽었겠지.”

“시녀가 무슨 죄? 귀족도 벌 좀 받는 꼴을 봤으면 좋겠어.”

나에게 유리한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번엔 내가 꾸민 일이 아니었다.


“너무 미화된 것 같은데. 이거, 티 나지 않을까?”

밝은 갈색 머리를 길게 땋은 소녀에게 물었다.

로즈의 시녀였던 니사가 환하게 웃었다.


“엘리자벳 님께서 절 거둬주시고, 빚까지 갚아주셨잖아요. 저도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아야죠.”

내 주위엔 은혜를 갚겠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을까?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니사가 보통 시녀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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