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내가 왜 그랬을까?
(51/97)
51. 내가 왜 그랬을까?
(51/97)
#51. 내가 왜 그랬을까?
2023.02.24.
“은혜랄 것까진 없어. 널 구한 건 충동이자, 변덕에 불과하니까.”
나는 그리 착하지 않았다.
마냥 착하게만 살고 싶지도 않았다.
니사가 로즈를 고발하지 않았다면, 로즈의 시녀쯤이야 어찌 되든 나 몰라라 했을 거였다.
하지만 니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귀족들은 하찮은 이유로 남의 인생을 망가뜨려요. 하지만 엘리자벳 님의 변덕은 제 목숨을 살렸어요.”
반듯한 자세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지닌 니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건 어때?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했다던데?”
“저는 평생 엘리자벳 님을 모시기로 결심했어요.”
“자작가 영애인 네가 평민을 모신다는 게 알려지면? 아마 시집도 못 갈걸?”
“결혼이야 안 하면 그만이죠. 엘리자벳 님이 아니었다면 그날 끝났을 인생인걸요.”
“폐하는 그렇게 잔인한 분이 아니야.”
“폐하께서 로즈 황비의 최측근인 저를 온전히 용서해주셨을까요?”
“…….”
“생명은 건졌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저희 가문은 작위를 박탈당하고 빈민가로 쫓겨났을 거예요.”
니사가 똑 부러진 말투로 대답했다.
‘모시던 상전이 쫓겨났다는 건, 니사의 앞날도 위험해졌다는 뜻이야. 적극적으로 살길을 찾아야만 해.’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음에도 니사는 나를 선택했다.
미래를 건 도박을 시작한 거나 다름없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니사가 미소 지었다.
“황태자궁 사용인들에게 다 들었어요. 엘리자벳 님은 냉정한 척하시지만, 누구보다 따듯하신 분이라고요.”
“어휴. 네가 왜 로즈의 눈에 들었는지 알겠다.”
“거짓 충성으로도 인정받은 저예요. 엘리자벳 님께는 진심만을 바칠게요. 반드시 도움이 될 거라 자부해요.”
“그것뿐이야? 고작 그게 인생을 거는 이유라고?”
정곡을 찔린 듯, 니사가 얼굴을 붉혔다.
“엘리자벳 님은 분명히 승승장구하실 테니까요. 측근 시녀가 되면 저도 언젠간 빛을 볼 거라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에요.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꾸벅 허리를 숙이는 니사.
그런 니사를 바라보며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뭘 긴장하고 그래. 나는 더 좋은데?”
“……예?”
“은혜를 갚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우겼으면 더 미심쩍었을 거야. 사람 감정이란 게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
“엘리자벳 님……!”
“하지만 네 이익과 미래까지 계산한 결정이라니 안심이야. 네 말대로 나는 더 잘나갈 계획이거든!”
니사는 똑똑한 소녀였다.
게다가 솔직해야 할 때 솔직할 줄 알았다.
나의 능력을 알게 될수록 니사의 충성심은 더욱 강해질 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황궁 내 소식통이 필요했는데. 로즈에게 고마워해야겠네.’
잠시 말이 없던 니사가 감격한 어조로 물었다.
“엘리자벳 님은 두렵지 않으세요? 브렌든 후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염려할 것 없어. 다 계획이 있으니까.”
“엘리자벳 님은 정말 특별한 분이세요. 폐하께서 푹 빠지신 것도 다 이해가 돼요.”
영리한 니사도 내가 ‘황제 폐하의 연인’이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가 내 앞에서 한쪽 무릎까지 꿇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모두 연기일 뿐이야. 날 이용해서 제국의 권력 지형을 바꿀 요량이니까. 황비도 귀족도 아닌 평민. 나야말로 니콜라이가 바라던 최고의 꼭두각시지.’
당신이 꾸민 연극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했다.
얼마든지 이용해도 좋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인데.
나도 모르게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날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닐까? 이 눈빛이 거짓일 리 없잖아? 날 소중히 여기는 것만은 진짜야…….’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희망을 품어봤자 쓰디쓴 허망함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의 손짓 하나, 숨결 하나에 내 가슴은 풍랑을 맞은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하지만 키스의 순간, 니콜라이는 날 피했다.
왜?
벌꿀색 머리카락의 첫사랑 때문에?
나는 이용 대상이자 계약 상대일 뿐이니까?
무엇하나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다정하게 굴 때마다 착각은 또 다른 착각을 낳았다.
의심은 그보다 몇십 배 커다래졌다.
불안이 목을 조를 때면 굴복하듯 스스로 타일렀다.
더는 상처받지 말라고.
그의 사랑을 구걸하지 말라고.
‘그저 날 이용하는 것뿐이라면…… 왜 유혹게임에 기를 쓰고 이기려는 걸까? 단순히 승부욕이라기엔…….’
상념에 잠긴 내게 니사가 말했다.
“브렌든 후작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잘됐지 뭐. 나도 그런 사람이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질문했다.
“로즈 황비가 하옥 당했는데 다들 왜 잠잠한 줄 아니?”
“이상하긴 하네요. 저처럼 브렌든 후작가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걸까요?”
가시지 않는 분노를 삼키며 니사가 대답했다.
안락의자에 등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후작의 세력이 더 커지는 걸 견제하려는 걸 거야. 황후 후보에서 한 명쯤 쳐내고 싶을 테고.”
“그러고 보니 다른 가문 당주님들도 모두 조용하시네요.”
“4분의 1 승률보다, 3분의 1이 훨씬 낫잖아?”
로즈의 성격이 유명한 개차반이더라도.
니콜라이가 진심으로 날 사랑하더라도.
명문가 출신 황비가 평민을 때렸다는 이유로 갇힌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알고도 니콜라이는 무리한 처벌을 내렸다.
‘니콜라이는 귀족들을 찔러 본 거야. 단체로 반발하는지, 아니면 뒤에서 관망하는지.’
니콜라이는 꽃에 둘러싸인 바람둥이가 아니었다.
계산적이고 주도면밀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귀족원은 형식상 우려를 표명했을 뿐, 로즈의 탄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어. 브렌든 후작과 그 하수인들만 폐하를 찾을 뿐이지.”
“매번 쫓겨나는 바람에 체면만 구긴다죠?”
“후작가의 평판도 사정없이 곤두박질치고 있지.”
“엘리자벳 님께서 브렌든 후작에게 빚진 이들과 접촉 중이란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니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번엔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 정말 정보가 빠르구나. 어떻게 알았니?”
“저와 비슷한 처지의 황궁 사용인들이 많았거든요.”
“엠스터 상단을 통해 빚을 갚아주기로 했어. 이자는 받지 않을 거고.”
“저처럼요?”
“대신 노동력을 제공하라는 단서를 달았어. 너처럼 자발적으로 와주면 제일 좋지.”
어차피 돈이야 넘쳐난다.
브렌든 후작에게 흘러 들어간 돈도 어차피 돌려받게 된다.
지금은 유능한 인재를 모아야 할 때였다.
인심도 쓰고, 세력도 모으고.
꿩 먹고 알 먹기나 다름없었다.
“후작은 로즈를 구명하기 위해 막대한 황금을 쓰고 있어. 일부러 빚을 갚지 못하게 하는 계략은 쓸 수 없다는 뜻이지.”
“정말 대단하세요, 엘리자벳 님.”
“아직 놀라긴 한참 이른데.”
“하지만 또 납치당하시면 어떡해요? 범인도 아직 안 잡혔잖아요?”
니사는 새 주인이 화를 입을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암흑길드 놈들이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는 말은 들었지?”
“좀 이상했어요. 황제 폐하의 칙명이 떨어졌는데, 아직도 범인을 찾지 못한다는 게요.”
“진범은 언제 체포당할지 몰라서 잠이 안 올걸?”
“설마 일부러 잡지 않는 건가요?”
“납치 배후는 제법 거물이야. 물증도 없이 몰아세웠다간 역공을 당할 수 있어.”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포위망을 좁혀간다는 건가요?”
“차차 알게 될 거야.”
내 표정을 살핀 니사가 바로 화제를 돌렸다.
내가 말을 아낀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역시 니사는 다른 시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차를 내 올게요. 목이 마르실 것 같아요.”
차를 달여내는 솜씨도 더없이 훌륭했다.
찻잎의 향기로 한숨 돌리는데 시종이 알렸다.
“네틀톤 후작 각하께서 만나 뵙길 청하셨습니다.”
오늘은 문학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오웬 때문인가?
아니면 수잔?
의아해하며 대꾸했다.
“응접실로 모셔줘요.”
“황태자궁 후원에서 기다리시겠다고 전하셨습니다.”
“각하께서 직접 오셨나요?”
“아니요. 엘리자벳 님께 전하라며 서신을 주셨습니다.”
왜 다른 곳에서 만나자는 거지?
니콜라이 귀에 들어가면 시달릴 게 뻔한데.
더글라스는 단 한 번도 나를 불러내지 않았다.
의아함과 호기심이 동시에 차올랐다.
“서신을 살펴봐도 될까요?”
시종이 건네준 서신을 요리조리 살폈다.
‘수잔과 더글라스가 사용하는 편지지야. 잉크 냄새도 똑같아. 인장도 의심할 나위가 없어. 그런데 필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결심을 굳혔다.
로즈가 얼음탑에 갇힌 지금, 내게 허튼짓을 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목숨이 아깝지 않거나, 날 해치고도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
약속된 장소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역시 더글라스는 아니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심장이 쿵쿵, 가슴 안쪽을 두드렸다.
바람에 물결치는 하늘빛 은발.
홀로 창공을 가로지르는 매처럼 고독한 눈빛.
매일 밤 마주했던 그녀가 현실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클라우디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보고 싶었다고?
좋아했다고?
살려달라고?
한겨울 호수 속으로 던져진 듯 입술이 얼어붙었다.
어디선가 몰려온 안개가 눈 앞을 가렸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생각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두려움일까, 분노일까, 억울함일까.
그도 아니면 그리움일까.
심장부터 굳어버린 날 클라우디아가 투명한 푸른 눈으로 응시했다.
장인이 만든 도자기 인형처럼 아름답지만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풍기는 여인.
빈틈없는 자태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천재 검사.
나의 최애.
엘리자벳의 원수.
‘그녀를 황궁으로 불러들인 건 너야! 네가 대리인으로 그녀를 지목했잖아?’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나 혼자가 아니라고, 겁에 질려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아를 마주하는 것만으로 나는 식은땀 범벅이 되었다.
“오랜만이에요, 클라우디아 님.”
침착하려 했지만, 목소리부터 갈라졌다.
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당장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로 간단 말인가?
무슨 수로 최강 여기사를 따돌려?
클라우디아의 무표정한 얼굴이 가시가 박힌 밧줄처럼 날 휘감았다.
그녀 뒤로 단두대 칼날이 번득였다.
“속여서 미안하오. 내가 보자고 하면 거절할 것 같아서.”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야말로 괜한 다툼에 휘말리게 해드려서 면목 없습니다.”
억지 미소 때문에 뺨에 경련이 일었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듭 후회했다.
‘내기에서 이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는데! 바보, 멍청이, 똥개…….’
그때 클라우디아가 입을 열었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