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당신은 내가 아는 엘리자벳이 아니야
(52/97)
52. 당신은 내가 아는 엘리자벳이 아니야
(52/97)
#52. 당신은 내가 아는 엘리자벳이 아니야
2023.02.28.
“미안해할 필요 없소. 최종결정은 내가 했으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할 이유도 없소.”
클라우디아가 잘라 말했다.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서릿발처럼 매서운 무표정에서 어렵지 않게 그녀의 본심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네가 싫다. 말조차 섞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클라우디아는 그런 캐릭터였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언제나 간단하고 명료한 사람.
어떤 선택이 좋을까 우왕좌왕하지 않고, 제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 미움받는 것도, 욕먹는 것도 개의치 않는 사람.
그런 클라우디아에게 매혹됐다.
책을 읽고 또 읽으며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소설 속 악녀가 되어 최애에게 경멸의 대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는소리 하지 마. 새로운 삶을 잃지 않으려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면 어느 때보다 침착해야 해.’
최애와 다정한 친구가 되는 망상은 끝났다.
최애 손에 죽지는 않겠다는 결심만 남았다.
그러자면 클라우디아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나를 불러냈는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나보다 클라우디아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원작 독자의 이점을 살려보자. 나라면 클라우디아의 행동을 파악할 수 있어!’
머릿속으로 원작을 떠올렸다.
영상을 뒤로 돌리듯 빠르게 흘러가는 장면과 대사들.
클라우디아의 독백과 심리 묘사들까지 빠짐없이 회상했다.
떨림이 점차 가라앉았다.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클라우디아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당신이 예전과는 매우 다르다고 더글라스가 말했소.”
“괜한 말씀을 하셨군요. 클라우디아 님은 타인의 평가보다 스스로 안목을 믿으시는 분이니까요.”
“나에 대해 아는 척하지 마시오.”
백옥같이 매끈하고 하얀 클라우디아의 미간에 미세한 금이 갔다.
두려움이 또다시 심장을 조여왔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여기서 목 날아가는 것 아니야?’
반사적으로 클라우디아의 허리춤을 살폈다.
다행히 검은 없었다.
근위 기사가 아닌 자는 황궁에서 착검할 수 없었다.
브라보, 황궁!
‘클라우디아는 발목과 손목 안쪽에 단도를 지니고 다녀. 하지만 칼이야 있거나 말거나 나 하나 죽이는 건 간단하겠지.’
“더글라스 님의 이름을 빌려 저를 찾으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결투 대리인으로 날 지목한 것이오? 시답잖은 주사위 게임도 아닌데.”
“최강자를 선택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내가 당신을 싫어한다는 걸 모르오?”
“잘 압니다. 싫어하실만한 이유는 차고 넘치니까요.”
클라우디아의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이 졌다.
잠시 두려움을 잊은 채 최애의 미모를 감상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
‘인상 쓰는 모습도 아름다워. 초대형 계를 탔는데 즐기지 못하다니. 아까워죽겠네. 클라우디아의 동료가 되는 게 내 소원이었는데…….’
클라우디아의 키는 내 상상보다 컸다.
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니 178cm는 너끈할 것 같았다.
군살 한 점 없이 잘록한 허리, 탄탄한 어깨.
흰색 기사 제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잘생쁨이란 단어는 클라우디아를 위해 탄생한 말이 아닐까?
황제 제복을 입은 클라우디아를 보고 싶다면 미친 거겠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망상을 하는 내가 어처구니없었다.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되긴 했다.
차가웠던 손발에 온기가 돌았다.
겨우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내가 죄 없는 당신을 미워한다며 길길이 날뛰었지.”
“술에 취해 클라우디아 님을 모욕했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늦었지만 사죄드려요.”
“부끄러움과 사죄라.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데.”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여인의 치장에 대해서 문외한이오만…… 뭔가, 예전과 다르다는 건 확실히 알겠소.”
의외라는 듯 클라우디아가 내 옷차림에 관심을 가졌다.
좋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간소한 드레스였다.
더 편한 원피스를 입고 싶지만, 교육담당관이란 직책 탓에 어느 정도의 격식은 차려야 했다.
나는 최소한의 장식과 활동성 좋은 스타일을 선호했다.
장신구도 귀에 딱 붙는 진주 귀걸이가 전부였다.
다이아몬드를 주렁주렁 달고 부유함을 과시하던 원작 엘리자벳과는 딴판이었다.
‘내가 변했다는 걸 내 입으로 강조해봤자, 반감만 살 뿐이야. 그냥 내 모습을 보여주고 판단하게 할 수밖에.’
한동안 날 관찰하던 클라우디아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빤히 쳐다봐서 미안하오.”
“괜찮습니다. 결례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교계의 예법에 대해 잘 모르오.”
“저도 그쪽으로 전문가는 아니지요.”
“그건 그렇지.”
클라우디아가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멋쩍다고 생각했는지 곧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마저 내 취향을 강타했다.
“저를 싫어하셔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패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무슨 근거로 그리 확신하오?”
“클라우디아 님은 누구보다 명예로운 기사니까요.”
“…….”
“검투사라면 제 이익에 따라 승패를 결정하겠지요. 하지만 기사는 다르지 않습니까?”
클라우디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더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시몬 경과의 결투를 받아들인 순간 클라우디아 님의 명예도 함께 경기장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고결한 자부심도 함께요.”
“명예와 자부심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승리하시겠지요. 언제나처럼요.”
눈매를 접으며 미소 지었다.
클라우디아 앞에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는 것만으로 큰일을 해낸 것 같았다.
클라우디아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때론 명예를 뛰어넘는 분노도 있는 법이오.”
“동의합니다.”
“내 칼이 그대의 목을 겨눌 수도 있소.”
푸른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클라우디아는 살기 한점 내뿜지 않았다.
그런데도 본능적으로 손발이 오그라들고 가느다란 경련이 찾아왔다.
“저를 베고 싶으신가요?”
“가끔은.”
“더글라스 님 때문인가요?”
“천만에.”
“한 번 더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당신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모두가 유익한 삶은 사는 건 아닐 텐데요.”
“당신은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겼지. 이제는 폐하 곁에 있으니 더 위험하오. 당신의 아름다움은 제국을 파멸로 몰 수도 있소.”
“그래서 찾아오신 거로군요. 저를 죽일지, 살릴지 결정하러.”
내가 좋아한 클라우디아는 원작과 똑같았다.
살의와 능력이 있음에도 함부로 검을 뽑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의 첫사랑을 짓밟은 악녀라도 마찬가지였다.
만나보니 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클라우디아에겐 내가 변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감정보다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아무리 내가 악녀의 모습을 벗고, 환경을 바꾼대도 그녀가 여전히 날 사회의 악으로 인식한다면 내 미래는 죽음뿐이었다.
도박을 걸 순간이 왔다.
계약과 게임, 내기도 하는데 뭘 못하랴.
“판단이 끝나셨으면, 어서 베십시오.”
온몸에 힘을 빼고 두 팔을 늘어뜨렸다.
클라우디아의 눈썹이 휘어 올라갔다.
“뭐 하는 거요?”
“발버둥 쳐 봤자 저는 클라우디아 님을 당해낼 수 없어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며 살아가느니 편안히 떠나고 싶어요.”
“이건…… 함정 같은 거요?”
“함정을 팔 생각도 시간도 능력도 없어요. 최강의 기사 앞에서 무슨 함정이 쓸모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
“부디 고통 없이 거둬주세요.”
두 눈을 감았다.
날 떠나지 않던 불안이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 흩어지는 안개처럼 서서히 걷혔다.
이상하리만치 포근한 기운이 날 감쌌다.
클라우디아가 내 등 뒤로 성큼 다가왔다.
목덜미에 닿는 섬뜩한 감촉.
칼이었다.
‘니콜라이를 지켜주고 싶었어. 수잔의 병도 고쳐주고 싶었고. 프란츠도 돕고, 오웬도 복권시키고, 보리츠에게 기회도 주고. 나도 새 삶을 살아보고 싶었는데…….’
타는 듯한 아쉬움이 심장을 두드렸다.
하지만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산소호흡기를 넘겼던 전생과는 다른 선택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 이상은 내 몫이 아니야.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겠지. 대체로 힘들지만, 때론 행운도 따르겠지. 다정한 사람들의 온기에 기대어 미소 지을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아.’
내게 들러붙어 있던 두려움의 껍질에 금이 갔다.
이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스러져 떨어지는 회한, 불안, 조바심.
그 안에서 진짜 내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당신은 내가 아는 엘리자벳이 아니야. 진짜 엘리자벳은 어디 있는 거지?”
클라우디아가 처음으로 살기를 담아 물었다.
원작 엘리자벳이 사라진 것이 죽도록 원망스럽다는 듯이.
***
결투 하루 전.
시몬은 황궁 예배당으로 불려갔다.
대리석으로 조각된 초대형 신상들이 기나긴 복도에 늘어서 있었다.
베일로 얼굴을 가린 그녀가 시몬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승리의 입맞춤을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목소리뿐이었다.
“내 것이 되고 싶다고 간청할 때는 언제고. 너도 별수 없는 사내로구나, 시몬.”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에겐 오직 마마뿐입니다.”
“왜 보상금만 뜯어내라는 내 명을 어긴 것이냐?”
“그, 그것이……!”
“그 계집의 계략에 말려들면 안 된다고 일렀잖느냐? 황금에 눈이 먼 네 아비를 설득할 방도까지 알려줬는데. 기어코 결투를 하겠다고?”
서슬 퍼런 추궁에 시몬이 바짝 엎드렸다.
“저도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궁색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로구나.”
“내기를 취소하려 했는데 엘리자벳이 저를…….”
“그 계집이 요술이라도 부렸다는 게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제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시몬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불투명한 유리병에 갇힌 것처럼 눈앞이 흐릿하고 몽롱했다.
“자세히 말해보아라.”
“엘리자벳이 저에게 윙크를 했습니다. 그 이후엔 모든 게 모호합니다.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기억납니다만, 어쩐지 제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말 같지 않은 소리 썩 집어치워라.”
여인이 짜증스럽다는 듯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억울함을 참지 못한 시몬이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내려쳤다.
“아버지도 절 쫓아내려고 하셨습니다! 결투에서 패배한다면 차기 당주의 자리도 아우에게 돌아갈 겁니다.”
“이길 수 있느냐? 상대는 최강의 클라우디아다.”
“허풍입니다. 약해빠진 여자가 검을 좀 쓰니까 찬사를 받는 것뿐이지요.”
“과연 그럴까?”
“국경의 조무래기를 쳐부수고, 엘리자벳을 마마의 눈앞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시몬이 다짐했다.
여인의 베일 아래로 조소가 흩어졌다.
“엘리자벳을 죽이겠다면서?”
“기회를 살피고 있습니다. 허접한 납치범들과 똑같은 길을 갈 수 없으니까요.”
“내가 도와주마.”
“네?”
여인이 작은 가죽 주머니를 시몬 앞으로 던졌다.
시몬이 조심스레 가죽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이게 뭡니까?”
“비장의 무기다. 그것만 있으면 너는 절대 패하지 않는다.”
“마마…….”
“죽음이 두렵다면. 네 목숨이 제일 귀중하다면 몰래 태워버리거라. 선택은 네 몫이다.”
***
시몬 대 클라우디아.
마상 경기장으로 쓰이는 대광장에서 두 기사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누가 이길까?
브렌든 후작의 아들?
엘리자벳의 대리인?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세기의 결투에 열광했다.
결투를 관람하게 해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니콜라이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고도 복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