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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엘리자벳, 또 뭘 꾸미는 건가? (53/97)


#53. 엘리자벳, 또 뭘 꾸미는 건가?
2023.03.03.



“군중이 모이면 위험하다. 또 칼에 찔리고 싶은가?”

간이 귀빈석에 앉은 니콜라이가 차갑게 말했다.

비어있는 관객석을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신분이 확실한 사람들 대상으로 관람권을 팔았으면 대박이 났을 거예요.”

“그대에겐 역시 엠스터 집안의 피가 흐르는군.”

“돈을 버는 방법이 보이니까요.”

“돈이 필요하면 말하라. 얼마든지 내줄 테니.”

“얼마를 달라고 할지도 모르시면서요?”

“그 정도 능력은 된다.”

니콜라이가 피식 웃었다.

그럴 만했다.

황제 전용 의자, 술과 간식이 놓인 테이블, 우아함을 더하는 화병까지 모든 것이 국보급 보물이었다.

급하게 만들어진 귀빈석인데 언제 이런 걸 준비한 걸까?

니콜라이 주위로 후광이 보이는 듯했다.

돈이라면 나도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 많았다.


“사양할게요. 받는 것보다 버는 걸 좋아하거든요.”

“드레스도, 보석도 사지 않으면서?”

“활동성과 효율을 중시하는 편이죠.”

“그대가 차려입은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군.”

니콜라이의 시선이 내 귓불에 달린 루비 귀걸이에 닿았다.

시선은 천천히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루비 목걸이가 아주 잘 어울린다.”

쇄골 부근에서 반짝이던 루비 목걸이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열기가 모였다.

입술을 깨물고 견뎌야 할 만큼.


‘니사가 골라준 드레스는 가슴선이 너무 많이 보여.’

오늘 같은 날에는 치장에 힘을 줘야 한다는 니사의 조언을 따랐다.

몸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는 보라색 드레스.

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디자인.

팜므파탈이라면 너끈히 소화할 만한 차림이었다.


“그대의 머리카락처럼 붉은 드레스도 어울릴 것 같다. 한 벌 맞추랴?”

그의 눈동자에 불꽃이 담긴 걸까?

아님, 내 심장에 폭죽이 터진 걸까.

가슴 안쪽이 아플 만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온몸에 번진 불꽃을 외면하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뭐든 잘 어울리는 편이에요. 이 정도 미인은 흔치 않으니까요.”

“대체로 동의한다.”

“그리고 여자들이 치장에만 돈을 쓴다는 건 편견이에요.”

“그대는 어디에 돈을 쓰지?”

니콜라이가 흥미를 보였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내가 대답했다.


“생명 연장과 정의 사회 구현이요.”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살기 좋은 세상에서 무병장수하는 게 꿈이에요. 그걸 위해서는 황금이 아주 많이 필요하답니다.”

허풍떨지 말라고 할 줄 알았던 니콜라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채권을 사 모으는 건가?”

“……알고 계셨어요?”

“모르면 곤란하지. 엠스터 상단에서 풀린 돈이 모조리 브렌든 후작 쪽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

하여간 눈치 하나는 엄청 빠르단 말이야.


‘그래서 어쩔 건데요?’

도전적인 눈으로 니콜라이를 바라봤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뜨겁게 얽혔다.

나의 모든 걸 꿰뚫는 듯한 눈으로 그가 말했다.


“뭘 꾸미는 건가, 엘리자벳.”

“고리대금의 늪에 빠진 가엾은 이들을 구제 중이에요.”

“그대를 비호할 세력을 만드는 거겠지.”

“재력만으론 한계가 있더라고요. 귀족들 권력 싸움에 끼어들 마음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끼어들면 좋으련만.”

니콜라이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는 대답 대신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바다와 숲을 닮은 청록색 눈동자에 오후의 햇살이 부딪혔다.

농익은 와인보다 붉은 입술.

배부른 맹수처럼 느른한 표정.

그 모든 것이 내 가슴을 뒤흔들었다.


“무슨 일을 벌이든 나는 그대를 지지한다. 그것만 기억해두라.”

니콜라이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아주 기분 좋을 때만 보이는 호선이었다.

그걸 다른 사람도 알까.

나만 알고 싶다는 독점욕과 니콜라이가 다른 사람 앞에서 웃을 리 없다는 자부심이 뱃속을 간지럽혔다.


“폐하. 시몬 경이 결투를 늦춰달라는군요.”

시몬의 막사에 다녀온 카레스가 고했다.

고개를 들어 해의 위치를 확인한 니콜라이가 조소했다.


“태양이 두려운 게로군. 허하노라.”

“그게 무슨 뜻인가요, 폐하?”

“시몬의 막사는 동쪽에 있어. 클라우디아 경의 막사는 서쪽이고.”

대광장 중앙에 황제를 위한 귀빈석이 위치했다.

그 아래 증인용 막사가 세워졌고, 양옆으로 새하얀 천막이 처져 있었다.

오른쪽에서 브렌든 후작가를 상징하는 장미 문장 깃발이 펄럭였다.

왼쪽의 클라우디아 기사단 깃발도 힘있게 나부꼈다.

니콜라이가 손가락으로 좌우를 번갈아 가리켰다.


“시몬이 오른쪽에서, 클라우디아가 왼쪽에서 결투를 시작할 것이다.”

“햇빛이 눈을 찌를까 봐 시간을 미뤄달라는 건가요?”

“아마도.”

“시간을 정해놓고 싸우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전쟁이 나면 어쩌려고요?”

“제도에서 검술가로 이름을 날린 시몬. 실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클라우디아. 그대 덕분에 그 차이를 내 직접 확인할 수 있겠어.”

 

 

***

브렌든 후작이 증인 막사로 들어섰다.

그리고 리먼 공작, 파이프 후작, 블랙폴드 백작을 차례로 노려봤다.


“공기가 탁하군! 배신자들이 모여 있어서 그런가?”

브렌든 후작이 괜한 트집을 잡았다.

며칠 사이에 부쩍 수척해진 그에게 리먼 공작이 술잔을 건넸다.


“화를 가라앉히시오. 로즈 마마의 일은 안타깝게 되었소.”

“죄 없는 내 딸이 얼음탑에서 죽어가는 데 안타깝다고?”

“무고하다면 풀려날 것이오.”

“프레이아 마마가 갇혔대도 샌님 같은 소리를 할 거요?!”

브렌든 후작이 툭 튀어나온 배로 리먼 공을 밀어붙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리먼 공은 씁쓸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어. 머리를 쓰지 않고 저지르는 건 제 아비를 똑 닮았으니까.”

파이프 후작이 비아냥거렸다.

그 소리를 흘려들을 브렌든 후작이 아니었다.


“우리 가문과 전쟁이라도 하자는 거요, 파이프 공?”

“몰락 중인 가문과 전쟁이라니. 옛정을 생각해 참아주지.”

“뭐라?!”

“도박꾼의 9할이 클라우디아에게 걸었소. 만약 시몬이 승리한다면 극소수는 돈방석에 앉게 될 것이오. 하늘이 깨진다 해도 그럴 일은 없지만.”

“감히 내 아들을 놓고 도박을 하다니!”

브렌든 후작이 파이프 후작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블랙폴드 백작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이 무슨 추태요? 명문가의 명예를 지킵시다.”

“명예가 있다면 내 딸을 구하는 데 힘을 보냈어야지!”

“이번엔 로즈 마마가 명백히 잘못했소.”

“그깟 평민 계집에게 굴종하라는 뜻이오?”

“손찌검을 한 것도 문제지만, 목격자를 남긴 것이 더 문제요. 민감한 시기에 황제 코앞에서 무슨 짓이오? 쯧쯧.”

블랙폴드 백작이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혀를 찼다.

브렌든 후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당신들 수작을 모를 줄 알아? 유력한 황후 후보를 없애려는 거겠지! ”

“미안하지만 로즈 마마는 우리 신시야 마마의 경쟁상대가 아니오. 학식으로 보나, 지혜로 보나.”

블랙폴드가 기분 나쁘다는 듯 대꾸했다.

파이프 후작도 열 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 마마가 여러모로 처진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비겁한 놈들이 뭐라 떠드는 것이냐?”

“말조심하시오. 뒷구멍으로 납치사건이나 꾸민 주제에.”

파이프 후작이 리먼 공작의 눈치를 슬쩍 본 후에 말했다.

블랙폴드 백작이 거들었다.


“증거가 없다고 안심하지 마시오. 황제 폐하의 개들이 뒤를 쫓고 있으니까.”

“누가 누굴 납치했다고?!”

“브렌든 공이 아니면 누구겠소? 공께서 엘리자벳의 재산을 노린다는 건 천지가 다 아는데.”

“이것들이 작당해서 누명을 씌우는구나!”

“증거가 나와도 큰소리치는지 두고 보겠소.”

“설마 날 모함하려고 가짜 증거를 만드는 것이냐?!”

파이프 후작과 블랙폴드 백작은 침묵을 지켰다.

어두운 낯빛으로 리먼 공작이 질문을 던졌다.


“우리끼리 다투는 모습을 보면 누가 가장 기뻐하겠소?”

“…….”

“제 발로 무대 위 광대가 되지 마시오. 이미 늦은 것 같소만.”

무거운 적막이 막사를 짓눌렀다.

브렌든 후작이 화를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주 섞인 한 마디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 혼자 죽을 성싶으냐? 만약 내가 몰락한다면 너희도 무사치 못할 것이다!”

 

***

증인 막사에서 뛰쳐나오는 브렌든 후작이 보였다.

싸우기라도 한 사람처럼 얼굴이 시뻘겠다.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없으면 서운하지.”

“네?”

“그대를 노린 자들이다. 영혼까지 불살라버릴 것이다.”

“아직 공표되진 않았지만, 납치 배후는 파이프와 블랙폴드라는 증언이 나왔다던데요?”

“브렌든은 세 치 혀로 그대를 모욕했다. 지옥에서 그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니콜라이의 어금니에서 음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적법한 절차를 강조하는 나 때문에 분노를 꾹꾹 누르고 있지만,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범죄자의 증언만으로는 처벌하기 힘들어요. 스스로 무덤을 팔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셨잖아요?”

“나도 안다. 아직 수확 철이 아니라는 걸.”

“무르익을 때가 곧 오겠지요.”

토실토실 잘 익은 벼가 일렁이는 황금색 논을 떠올렸다.

니콜라이가 생각하는 수확은 그게 아니었다.


“뒤룩뒤룩 살찐 저놈들의 목을 모조리 거둘 것이다.”

“폐하!”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내 것을 건드렸으니.”

“제가 왜 폐하의 것이에요?”

어깨를 튕기며 되물었다.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 니콜라이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그대가 내 것이라는 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조작된 소문일 뿐인걸요.”

“황제의 연인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뺨을 쓰다듬으려는 건가?

아니면 입술?

움찔 놀라, 눈을 꾹 감았다.


“반응은 귀여운 연인 같은데.”

니콜라이의 웃음이 조용히 흩어졌다.

화르륵 얼굴이 달아올랐다.

놀림당해서가 아니라, 속마음을 들킨 것이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집중하세요! 시몬 경과 클라우디아 님이 입장하고 있어요.”

위풍당당한 클라우디아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클라우디아는 전신 갑옷 대신 어깨를 보호하는 갑주만 착용한 상태였다.

도도하고 오만한 무표정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목에 묶은 새빨간 끈이 핏방울처럼 도드라졌다.


‘붉은 끈이 너무 잘 어울려. 은색 페르시안 고양이 같아!’

전생이었다면 야광봉을 흔들었을 텐데.

머리띠나 슬로건도 만들고!


 
클라우디아의 검이 언제든 날 노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예전처럼 두렵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녀는 날 위해 결투에 나섰다.

최애의 검술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클라우디아를 응원하게 될 날이 오다니. 원작이 완전히 비틀어진 걸까?’

그날.

목숨을 내려놓은 내게 클라우디아가 말했다.


「무슨 조화인지는 몰라도 당신은 진짜 엘리자벳이 아니야. 아직은 명확한 죄도 짓지 않았고.」

‘맞아요. 저는 당신이 알던 그 엘리자벳이 아니에요.’

말하고 싶었다.

믿어주거나 말거나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다.

아주 잠시만이라도 그녀에게 안겨 울고 싶었다. 옛 엘리자벳이 저지른 악행들을 용서해 달라고 대신 빌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더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클라우디아를 떠올릴 때마다 날 괴롭히곤 했던 불안과 공포도 옅어졌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었다.

날 노려보던 클라우디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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