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 백허그, 그리고 (55/97)


#55. 백허그, 그리고
2023.03.10.


나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걸까?

시몬의 검이 옆구리를 꿰뚫기 전에 클라우디아가 몸을 뒤틀었다.


“아, 다행이다!”

탄식과 함께 니콜라이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저거 반칙 아니에요? 옆구리는 급소잖아요?”

“내게 편파 판정을 요구하는 것이냐?”

“너무 비겁해요!”

“수세에 몰리다 반격할 기회를 찾은 것뿐이다. 적당히 해라.”

클라우디아를 응원하는 내가 못마땅한지 니콜라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다시 바람을 일으켰다.


“으아압!”

시몬이 기합을 터뜨렸다.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클라우디아가 시몬의 검을 막았다.

-챙! 챙!

시몬은 궁지에 몰린 맹수처럼 클라우디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클라우디아는 여유롭게 방어하며 시몬의 목을 노렸다.

-쐐액!

클라우디아의 검 끝이 시몬의 끈에 닿는 순간, 기쁨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이제 됐어!”

하지만 시몬이 제 목을 움켜쥐고 거꾸로 도약했다.


“어림없다!”

“끈질기군.”

클라우디아가 낮게 읊조렸다.

시몬은 간단하게 승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의 실력은 허풍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쁜 호흡을 몰아쉬는 시몬과 달리 클라우디아는 평온, 그 자체였다.

얼음 조각처럼 서늘한 무표정.

바람에 휘날리는 하늘빛 은발.

나는 주먹을 움켜쥔 채 클라우디아를 응원했다.


“목을 잘라버려요!”

“상대를 죽이면 실격패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저는 괜찮으니까, 끝장내버리세요!”

“전 재산을 걸어놓고, 간이 부었군.”

“클라우디아 파이팅!”

울타리에 배를 걸친 채 두 손으로 손나팔을 외쳤다.

클라우디아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목이 찢어져도 괜찮았다.

상체가 귀빈석 난간 밖으로 반쯤 기울었다.

기분 탓이겠지만, 내 목소리가 커질수록 클라우디아의 공격도 매서워지는 듯했다.


“크윽!”

시몬이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클라우디아의 몸놀림은 더욱 빠르고 예리해졌다.

승리는 거의 기울었다.


“시몬, 이 망할 놈아! 너 같은 놈은 내 자식도 아니다!”

패배를 직감한 브렌든 후작이 울부짖었다.

파이프 후작과 블랙폴드 백작이 미묘한 눈빛을 교환했다.

최후의 한방을 기대하며 고개를 길게 뺐다.

니콜라이가 경고했다.


“그러다 떨어진다, 엘리자벳.”

“승리의 순간을 똑똑히 지켜봐야지요.”

“간이 관람석이라 위험……!”

그가 말을 끝내기 전에 우지끈, 위태로운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내가 기댄 울타리가 아래로 푹 꺼졌다.

심장이 철렁 주저앉았다.


“아앗?”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내 몸도 아래로 떨어졌다.

아니, 떨어지고 있었다.

니콜라이가 뒤에서 날 끌어안기 전까지.


“엘리자벳!”

단단한 근육이 내 허리를 옥죄었다.

왈칵 밀어닥치는 니콜라이의 체취.

발아래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아앙!

나무 골조와 황제의 문장이 찍힌 깃발들이 맥없이 추락했다.

내 구두 한 짝도 그 위로 툭, 떨어졌다.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매캐한 흙먼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고함.

등줄기로 식은땀 한 방울이 굴러떨어졌다.


‘니콜라이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추락했어. 다리뼈가 부러졌을 거야. 더 위험했을지도 모르고…….’

본능적으로 니콜라이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의 옷자락을 쥔 손이 뒤늦게 떨려왔다.

떨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니콜라이가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쓸어내렸다.


“이젠 괜찮다.”

토닥토닥.

그의 손길이 터질 듯 박동하는 심장을 어루만졌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지켜줄 테니.”

 

 
차분한 중저음이 뺨을 타고 들려왔다.

니콜라이의 향기로운 숨결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백허그에 이어서 앞허그까지.

그의 품에 꼭 안겨 있다는 것이 새삼 낯설고 어색했다.

내 몸을 빈틈없이 감싼 팔.

우는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손.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해서 또 다른 떨림이 시작됐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대결이 중단되자, 모두의 이목이 내게로 쏠렸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공공장소에서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니콜라이는 날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남자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호위 기사가 타는 듯한 눈동자로 날 응시했다.

그 안에 담긴 열기가 온몸을 핥고 지나갔다.

소설 속 여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특별하고 귀한 사람이 된 듯했다.

니콜라이, 이 남자 덕분에.


“폐하, 괜찮으십니까?”

“엘리자벳 님 무사하십니까?”

카레스와 근위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콜라이 품을 아쉽게 빠져나오며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너무 무거웠나 봐요.”

“누군가 톱질을 해 두었다.”

니콜라이가 무너진 울타리의 표면을 가리켰다.

지지대가 아래쪽에서 사선으로 반쯤 잘려져 있었다.

급하게 지어졌다고는 하나, 황제를 위한 귀빈석이었다.

누군가 훼손하지 않았다면 무너질 리 없었다.

내무대신인 카레스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송구합니다.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관련자를 심문하라. 목수 한 명 빼놓지 말고.”

“폐하를 노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울타리 따위가 내게 위협이 되겠는가.”

니콜라이가 눈썹을 찡그렸다.

맥이 탁 풀린 내가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저를 노린 거군요.”

카레스는 입을 다물었다.

니콜라이의 눈동자에 씁쓰레한 빛이 스몄다.

또다시 사고가 일어났다.

일망타진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뿐이지만, 아직 납치의 배후조차 처벌하지 못했다.

이것은 나에 대한 위협이 아니었다.

황제의 권위를 짓밟는 도발이었다.


“저 때문에 결투가 중지되는 건가요?”

“그대 때문이 아니다. 암수 때문이다.”

“지하 감옥이 또 가득 차겠네요. 무고한 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배려해 주세요, 폐하.”

니콜라이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평범한 백성의 가면을 쓴 거짓말쟁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걱정 가득한 얼굴로 우리 주위를 서성일지 몰랐다.

발 디디면 안 될 세계에 너무 깊이 빠져든 느낌.

몸부림칠수록 더 깊은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 두려움.

내 표정을 읽은 니콜라이가 말했다.


“결투는 이만 중단한다.”

“안 돼요. 클라우디아 님이 승리하기 직전이었어요.”

“위험하다. 당장 환궁해야 한다.”

“그러라고 울타리를 자른 거겠죠. 경기를 중단시키고 도망치는 우리를 보기 위해서요.”

“엘리자벳.”

니콜라이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가슴을 쭉 펴고 턱 끝을 조금 들어 올렸다.


“저는 무섭지 않아요, 폐하.”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두렵다. 나 때문에 그대가 다칠까 봐.”

니콜라이의 목소리가 심장을 두드렸다.

그의 눈빛이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일렁였다.

이번에는 내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폐하께서 절 지켜주시면 되잖아요.”

“…….”

“제가 다치지 않도록 제 곁에 있어 주시면 되잖아요.”

“…….”

“그게 어려우시다면, 고집부리지 않을게요.”

진지하게 말했다.

내내 굳어 있던 니콜라이가 픽 웃었다.


“고집부리지 않아도, 그리할 것이다.”

“폐하.”

“그대가 원치 않아도. 이제 그만하라고 해도. 내가 그대 곁에서 그대를 지킬 것이다.

내내 겨울인 줄 알았는데 언제 꽃이 피었을까?

꽃내음에 잠시 아찔했다.

봄을 가져다준 남자가 내게 미소 짓고 있었다.


‘당신이 떠나면 난 다시 겨울일 거야. 그래도 춥지 않을 거야. 봄이 가져온 향기를, 따스함과 황홀함을 영원히 기억할 테니까.’

 

***

클라우디아가 무너진 귀빈석을 응시했다.

허둥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선홍빛 머리칼이 선명하게 빛났다.


‘그 여인은 무사한가 보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엘리자벳.

아니, 엘리자벳을 닮은 여자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런 자신이 껄끄럽고 낯설게 느껴졌다.


‘위험한 여인이야. 엘리자벳과 겉모습은 똑같고 내용물은 완전히 달라.’

엘리자벳이 변했다는 더글라스의 말을 믿지 않았다.

황태자를 구했다는 것도.

대귀족과 맞서 싸웠다는 것도.

사용인들이 다치지 않도록 조치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것이 엘리자벳의 속임수라 확신했다.

직접 보기 전까지.


「부디 고통 없이 거둬주세요.」

자신의 검 앞에서 두 눈을 감은 엘리자벳은 신화 속 여신처럼 고고하고 아름다웠다.

엘리자벳이 아름답다니?

고고하다니?

클라우디아가 붉은 입술을 짓깨물었다.


‘나까지 속아 넘어가는 걸까?’

시몬과의 검투를 받아들였다.

더글라스의 편지와 잉크를 빌려 그녀를 불러냈다.

그녀의 계략을 간파해내고 싶었다.

엘리자벳이 다가왔을 때,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소박하면서도 단정한 옷차림.

당당하면서도 예의 바른 행동거지.

술에 취해 남자들을 희롱하던 팜므파탈의 그림자는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너처럼 훌륭한 기사가 폭군과 악녀를 무찌르는 이야기도 있을 거야. 그렇다면 다시 태어난 악녀가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도 있지 않을까?」

더글라스의 목소리가 가슴 한구석을 파고들었다.

클라우디아는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그렇게 하면 스멀스멀 고개를 내미는 ‘혹시’를 털어낼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빈민가에서 본 여인이 내내 잊히지 않았다.

호감을, 동질감을 느꼈다고 했던가.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던가.

저 여인이 정녕 그날 본 그녀가 맞다면?

아무런 편견이 없던 첫인상이 진실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진짜 엘리자벳은 사라졌다. 더글라스를 물고 늘어지며 괴롭히던 악녀는 그 안에 없었어.’

하지만 더글라스는 여전히 엘리자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대장장이가 만 번을 두드린 강철 검처럼 단단했다.


‘이제 나는 누굴 원망해야 하는 건가? 누구에게서 더글라스를 되찾아야 하는 거지?’

엘리자벳은 악녀였다.

그래서 마음껏 미워했다.

악녀의 술수에 넘어간 더글라스를 동정할 수도 있었다.

그가 나쁜 꾐에 빠진 것이 아니라면.

아름답고 현명한 여인을 연모할 뿐이라면.

클라우디아는 한순간도 솔직하지 못했던 자신과 뒤에서 끙끙 앓기만 했던 시간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로즈로이스 경. 폐하께서 결투를 재개하라 명하셨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막사로 찾아온 어린 기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클라우디아의 영웅담을 듣고 기사가 된 이들이 많았다.

클라우디아는 자신에게 지나친 경외감을 품은 자들을 경계했다.

가끔 그들의 호의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바쁘지 않다면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나?”

“영광이지요. 뭐든 하문하십시오.”

어린 기사가 뺨을 발갛게 물들었다.

좋은 기회였다.


“결투가 왜 중단되지 않은 거지?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릴지도 모르는데.”

“저 같은 말단이 뭘 알겠습니까마는, 엘리자벳 님께서 원하신 듯합니다. 폐하께서는 환궁을 여러 번 권하셨거든요.”

주변을 곁눈질하며 어린 기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결투를 중단시키는 게 놈들의 목적이라더군요. 그러니 도망칠 수 없다고 엘리자벳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꾸몄다? 폐하께서는 왜 허락하셨지?”

“우연히 들은 말이 있는데…… 말씀 올려도 될까요?”

“엘리자벳에 관한 것인가?”

“엘리자벳 님과 황제 폐하에 관한 것입니다.”

목격자의 증언이라.

클라우디아의 입꼬리가 반듯하게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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