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사상 최악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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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사상 최악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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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사상 최악의 사건
2023.03.14.
솔직히 기대했다.
의미 있는 목격담을 듣게 되리라 믿었다.
예상은 보기 좋게 틀어졌다.
“폐하께서 엘리자벳 님을 지켜주겠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당당하고, 멋지신지. 제가 여인이었다면 폐하께 순정을 바쳤을 겁니다.”
꿈꾸듯 몽롱한 표정으로 어린 기사가 말했다.
“그게 전부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두 분께서 포옹하는 모습도 봤는걸요?”
“…….”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솔직히 저는 콧대 높은 황비 마마들보다 엘리자벳 님이 좋습니다. 소탈하시고, 친절하게 대해 주시거든요. 또…….”
“그만 됐다.”
“엘리자벳 님의 굳센 성정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바로 뒤에서 지켜봤는데요.”
클라우디아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겨우 진정시켰다.
‘주군의 연애 놀음을 지켜볼 때냐? 너 같은 머저리들 때문에 귀빈석이 무너지는 사태가 벌어진 거다!’
자신이 황실 근위대장이었다면, 기사들은 모조리 영창감이었다.
혁명을 꿈꾸고 있다지만, 클라우디아는 하트만 제국과 예브레이 황조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였다.
같은 기사로서 태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황제가 뛰어난 무인이라는 이유로 전체 호위가 느슨해졌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힘없는 일반인 아닌가? 납치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런 일이 생겨? 근위대장께서는 뭘 하시는 건가?’
으드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어린 기사가 슬금슬금 물러났다.
클라우디아가 허리를 곧게 펴고 정좌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 결투가 끝나지 않았다.
사념과 동요는 검을 겨룰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한순간의 방심도 용납할 수 없었다.
어찌 시작되었든, 클라우디아의 싸움이었다.
이곳이 전쟁터가 아니어도, 상대가 적군이 아니어도 질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패배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검으로는.
“준비하십시오, 로즈로이스 경!”
검을 허리에 차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시몬이 기이하게 변했다는 걸 깨달은 건 그때였다.
***
증인석 옆에 새로운 천막이 세워졌다.
황제의 깃발 수십 개가 열 맞춰 세워졌다.
바짝 긴장한 기사들이 그 주위를 몇 겹으로 감쌌다.
‘경기장이 더 잘 보이긴 하는데…… 민망해서 죽을 것 같아.’
니콜라이 옆에 딱 달라붙은 자세가 어색하고 낯부끄러웠다.
2인용 의자는 언제 준비한 걸까?
푹신한 빌로드 쿠션을 엉덩이로 비비며 몸을 뒤로 뺐다.
준엄한 목소리가 바로 날아들었다.
“한 뼘 이상 떨어지면 환궁이다.”
“하지만…….”
“토를 달아도 환궁이다.”
니콜라이가 딱 잘라 말했다.
검투를 속개하는 대신 그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기사들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니콜라이와 나란히 앉아 있는 건 퍽 고된 일이었다.
‘니콜라이와 단둘이었던 적은 많았지만. 공식적인 자리에 나란히 앉은 적은 없어. 황제의 연인이 아니라고 우겨봤자, 소용없을 거야.’
언제나 그의 곁에 나란히 있고 싶었다.
다른 여인들 없이 그를 독점하고 싶었다.
꿈이 이루어졌음에도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나는 황후도, 황비도 아니었다.
이 자리의 주인은 따로 있다.
그런 생각만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언제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시몬이 좀 이상하다.”
“네?”
“걸음이 부자연스러워. 발끝이 평소보다 더 벌어졌고, 무릎에도 힘이 빠져 있다. 손끝도 떠는 듯하고.”
“지친 거겠죠. 승리는 우리 것이에요.”
턱을 쓰다듬던 니콜라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기치 않은 휴식이 주어졌다. 공세를 이어가던 클라우디아에 비해 이 휴식은 시몬에게 유리한 상황이었어.”
“체력을 되찾고, 끌려가던 분위기를 뒤집을 수 있으니까요?”
“흥분을 가라앉힐 시간이 주어졌는데 왜 저러는 걸까? 그리 우둔한 기사가 아니거늘.”
시몬의 실력에는 나도 감탄했다.
클라우디아와 아직 겨루고 있는 것만으로 높이 평가할 만했다.
니콜라이의 말을 들어서일까?
시몬의 몸놀림이 정말로 이상해 보였다.
독기가 빠지고, 흐리멍덩해진 두 눈이 특히 그랬다.
“브렌든 후작이 뭐라 했나 보죠. 죽여버린다고 씩씩거리던데요?”
“일단 지켜보자.”
“클라우디아 님이 곧 정리해줄 거예요.”
결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시몬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높이였다.
“갑자기 왜 저래?”
시몬이 바스타드 소드를 휘둘렀다.
검 손잡이를 감아쥔 손등과 이어지는 팔 근육에 푸른 핏줄이 솟아올랐다.
괴력이었다.
시몬의 검을 받아내던 클라우디아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퍼뜩 고개를 드는 클라우디아.
멀리서도 그녀의 당혹감이 느껴졌다.
“으하아아압!”
기괴한 고함을 지르며 시몬이 클라우디아를 압박했다.
힘, 속도, 정교함, 모든 것이 전반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다른 사람이 시몬의 거죽을 둘러쓰고 결투를 펼치는 것 같았다.
-챙!
검이 맞붙자, 클라우디아의 발이 흙바닥에 질질 밀렸다.
시몬의 힘이 그녀를 압도하고 있었다.
“승리자는 나다! 제국 최강의 기사는 시몬 브렌든이다!”
시몬의 두 눈은 자부심이 아닌 광기로 번들거렸다.
브렌든 후작이 눈물을 흘리며 손뼉을 쳤다.
“역시 내 아들! 너를 믿었다, 시몬! 좀 더 힘내거라!”
제 아들 앞에서도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브렌든 후작이 꼴사나웠다.
클라우디아를 몰아붙이는 시몬은 더 미웠다.
‘나의 최애가 질 리 없어! 클라우디아는 시몬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천재라고! 클라우디아도 지친 것 같은데 어쩌지?’
조바심에 손끝을 물어뜯었다.
이대로 가다간 클라우디아가 크게 다칠 것 같았다.
“폐하. 시몬이 왜 저러는 거죠? 갑자기 실력이 이렇게 향상될 수 있나요?”
“어떻게 이런 일이…….”
니콜라이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전에 본 적 없던 긴장감이 불길한 예감을 끌어당겼다.
“폐하. 왜 그러세요?”
“당장 검투를 중단해야 한다.”
“네?”
“나중에 설명하마.”
니콜라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기중단을 선언하기 직전, 클라우디아가 넘어졌다.
시몬의 검이 클라우디아의 목을 노렸다.
붉은 끈을 자르려는 것이 아니었다.
몸통과 목을 분리해버리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검을 저렇게 내리꽂을 수 없을 터였다.
“클라우디아!”
잠시 시간의 흐름이 멈췄다.
느리게 재생되는 화면처럼 모든 장면이 천천히 흘러갔다.
두근, 두근. 두근.
고막에서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음험하고 끈적한 사신의 숨결이 살갗에 들러붙었다.
클라우디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혈관을 조였다.
그녀가 사라지면 원작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 있다.
나는 물론 니콜라이와 프란츠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결말은 싫어. 클라우디아의 개죽음이라니. 말도 안 돼!’
후회하게 되더라도 클라우디아를 살려야 했다.
적어도 나 때문에 클라우디아를 죽게 할 수 없었다.
순간 니콜라이가 무언가 집어던졌다.
-쐐액!
한 줄기 빛처럼 쏘아진 그것이 단도였다는 걸.
나는 시몬이 피를 뿌리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시몬!”
브렌든 후작의 처절한 절규가 하늘을 찔렀다.
까마득한 적막 속에서 모든 이들이 뻣뻣하게 굳었다.
선명해진 사신의 그림자.
단도는 급소에 정확히 명중했고, 시몬의 육중한 몸이 그대로 넘어갔다.
‘저건, 더글라스가 선물로 준 그거잖아?’
문병 선물로 앙증맞은 크기의 단도를 더글라스에게 선물받았다.
성의를 봐서 며칠 들고 다니다 말았다.
납치사건 이후엔 매일 빼놓지 않았다.
니콜라이는 포옹할 때 드레스 안쪽에 숨겨둔 단도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허락 없이 빌렸다. 미안하다, 엘리자벳.”
니콜라이가 말했다.
그의 낯빛은 쓰러진 시몬보다 파리했다.
시몬은 정말 죽은 걸까?
니콜라이가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희뿌연 막 뒤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릿했다.
부스스 일어난 클라우디아가 두 손가락으로 시몬의 맥을 짚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 으아아악!”
도살장에 끌려간 돼지처럼 몸부림치던 브렌든 후작이 까무러쳤다.
모든 시선이 니콜라이를 향했다.
호기심 따위는 담기지 않았다.
니콜라이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두려움만 빽빽이 박혀 있었다.
니콜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다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황제가 결투 중인 기사를 살해했다는 소식이 제국을 넘어 대륙 끝까지 퍼지리란 것을.
***
제국이 발칵 뒤집혔다.
쉬쉬해도 소용없었다.
니사와 함께 황태자 궁으로 걸음을 옮기다 시종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시몬 브렌든 경이 죽었다며? 그것도 폐하께서 던진 단도를 맞고?”
“시몬 경이 거의 이기고 있었다는군.”
“폐하께서 클라우디아 경이 승리하도록 손을 쓰신 건가?”
“에이, 설마!”
“클라우디아 경이 지면 엘리자벳의 전 재산이 브렌든 후작에게 넘어간다며?”
“엘리자벳이 뒤에서 사주했다는 말도 있어.”
“그럼 시몬 경은 개죽음당한 거잖아? 그 여자 때문에.”
시종들 뒤에서 니사가 인기척을 냈다.
놀란 시종들이 석상처럼 얼어붙었다.
“엘, 엘리자벳 님?”
귀신을 만난 얼굴들이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송구합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해주십시오!”
부리나케 도망치는 시종들을 보며 니사가 중얼거렸다.
“당분간 시끄럽겠네요.”
“시끄럽기만 하면 다행이게.”
“엘리자벳 님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으셨잖아요?”
“좋은 이미지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야. 누군가가 몰락하는 건 재미난 구경거리지.”
단 하루 만에 니콜라이는 장래를 촉망받는 기사를 살해한 폭군이 되었다.
나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 폭군을 부추긴 악녀였다.
아름다운 이야기일수록 더럽혀지기 쉬웠다.
신데렐라보다 훨씬 자극적인 이야기가 방방곡곡 퍼져나가고 있었다.
‘클라우디아가 무사해서 다행이지만…… 그걸 제외한 모든 것이 최악이야. 이제 어쩌지?’
브렌든 후작가에 대한 동정여론이 급속히 늘어갔다.
브렌든 후작가의 내림세를 관망하며 조롱하던 귀족들도 위기를 느꼈다.
「진상규명을 요청합니다!」
「제국의 근간이 흔들리는 중차대한 사건입니다!」
귀족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황실모독죄가 있기에 노골적으로 니콜라이를 탓할 수 없었다.
귀족들은 황제를 대신할 먹잇감을 찾았다.
나를 끌어내리기 위해 다들 눈이 시뻘게졌다.
어느 정도 예상했다.
하지만 황태자궁 앞에서 이런 일을 당할 줄 몰랐다.
“멈추십시오. 당분간 황태자 전하를 면회하실 수 없습니다.”
경비병 두 명이 내 앞에서 창을 교차했다.
그 뒤에 황태자궁 집사가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잘 모르나 본데, 나는 하나를 당하면 열을 갚아주는 캐릭터야. 그것이 순리라고 믿는, 너희들이 악녀라고 부르는 여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