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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악녀에겐 사이다가 어울립니다 (57/97)


#57. 악녀에겐 사이다가 어울립니다
2023.03.17.


내가 붉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면회라니요. 전하를 지도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중독 사건 이후 황태자 궁의 모든 사용인을 새로 뽑았다.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내 비위를 맞추려 해서 불편하던 참인데.

인제 와서 내 앞을 막아?

자기도 귀족이라는 건가?


“이해해주시지요. 모두 전하를 위해서입니다.”

“제가 전하께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사고를 막으려는 것뿐입니다. 유독 엘리자벳 님 주위에 불상사가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까?”

마치 내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투였다.

목숨을 위협받고, 안전을 침해당한 것은 나였다.

불끈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귀족이었더라도 이런 취급을 받았을까? 내게 가문과 가족이 있었다면…….’

엘리자벳의 부모는 대륙 여행 중이었다.

사실 곁에 있다 해도 특권의식으로 똘똘 뭉친 귀족들을 상대하기는 어려웠을 거였다.

돈은 돈.

출신은 출신.

필요할 때 굽신거리다가 태도를 바꾸는 것들이 지겨웠다.

씁쓸함을 삼키며 물었다.


“집사님의 결정이 폐하께도 보고된 건가요?”

“하아…… 폐하를 걸고넘어지실 줄 알았습니다.”

“결정권자이신 폐하의 의중을 여쭈는 것이 당연합니다.”

“엘리자벳 님. 폐하의 총애가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집사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날 바라보는 눈빛에 지우지 못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지금은 폐하께서 엘리자벳 님의 말씀이라면 뭐든 들어주시겠지요. 하지만 세상에 미녀는 많습니다.”

“알아요. 그래서요?”

“영원한 꽃은 없습니다. 여인의 미모도 마찬가지지요.”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몇 년. 아니, 몇 달만 지나도 폐하의 관심은 다른 여인에게 옮겨갈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요”

집사의 마지막 말은 칼날이 되어 내 가슴을 찔렀다.

아릿한 통증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몇 마디 독설에 울음을 터뜨리는 온실 속 아가씨가 아니었다.

하찮은 도발에 흔들리거나, 쉬 물러서는 성격도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무뢰한을 굽어살필 아량도 없었다.


“그런 충심은 집어치우는 게 좋겠네요. 집사님께 충고받을 위치가 아니거든요.”

집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남에게 함부로 말하는 인간일수록 자기가 당한 모욕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냐오냐해줬더니 건방지기 짝이 없군. 폐하의 사랑을 좀 받더니 정신이 나간 게냐?”

왜 빌런들은 하나같이 똑같을까.

왜 요지를 벗어나서 하고 싶은 말만 지껄일까.


“착각하지 말아요. 황태자 전하를 책임지는 교육담당관으로서 한 말입니다.”

“나는 귀족이야. 당신은 평민이고!”

“황궁 내에서는 제가 상관이에요. 숙지 못하신 건가요, 머리가 나쁜 건가요?”

“그, 그건……!”

“빌 사리프. 40세. 사리프 자작의 삼남. 아내 로안나와 별거 중. 성격 차이로 알려졌으나, 아내의 외도로 확인됨.”

신상을 줄줄 읊자, 집사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작위를 상속받지 못한 삼남은 준귀족에 불과한데. 일자리까지 잃으시면 어쩌려고 그래요?”

“날 해고하겠다는 거요?”

“정당한 사유 없이 상위 직급자의 직무 수행을 방해하고 항명에 막말까지 하고서도 무사하리라 기대하셨나요?”

“나는. 아니, 저는 브, 브렌든 후작께서 그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집사가 더듬거렸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이름이 왜 안 나오나 했네. 황궁 사용인이 외부인과 내통하는 건 중대범죄로 처벌해요.”

“내, 내통이라니요?”

“솔직히 말해봐요. 저를 망신 주면 한자리 챙겨준대요?”

“엘리자벳 님은 곧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출궁당할 거라고…….”

“근거는요?”

“부, 부정한 방법으로 승부를 조작했으니까요…….”

어깨를 오그린 집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니콜라이가 시몬을 죽인 게 승부 조작이다? 아들이 죽었으니, 내 돈이라도 빼앗겠다는 건가? 돈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이라니까.’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브렌든 후작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고마워요, 집사님. 큰 도움이 됐어요.”

“그럼 저는 해고당하지 않는 겁니까?”

“그거랑은 상관없어요.”

“네?”

“당장 꺼지세요. 복무규정을 심각하게 위반한 사유가 있으니 퇴직금은 못 챙겨드려요. 이해하셨죠?”

 

 

***

황궁 지하도는 축축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적록색 이끼 때문에 석판은 미끈거렸다.

벽에 걸린 구리 촛대에서 그을린 촛농이 뚝뚝 떨어졌다.

공허하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니콜라이가 걸음을 재촉했다.

뒤따르는 시종도 호위 기사도 없었다.

황궁 지하에 숨겨진 검은 방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오셨습니까, 폐하.”

카레스도 그중 하나였다.

니콜라이는 하얀 삼각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카레스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아무런 장식 없이 냉기만이 감도는 방안.

중앙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침상이 보였다.

흰 천으로 덮인 시몬의 시신 또한.


“늦은 시간까지 수고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카레스가 기계적이면서도 무심하게 답했다.

니콜라이는 충신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네가 없었으면 나는 무척 지쳤을 것이다. 너의 충성에 반드시 보답할 것이다, 카레스.’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소리 내어 말한 적은 없었다.

침묵만으로 충분한 관계도 있었다.

카레스와 니콜라이가 그랬다.


“시신은?”

“예상대로입니다.”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

카레스가 뒤로 물러섰다.

니콜라이가 시신에 덮여 있던 천을 휙 걷었다.

허공에 먼지가 날렸다.

죽은 자의 몸엔 먼지가 쌓인다.

벌레도 꼬인다.

부패하고 썩어 문드러진다.

저승꽃으로 죽은 자는 시간을 재촉해 한 줌 핏물로 돌아간다.


“저승꽃이로군…….”

니콜라이의 목에서 쇠를 긁는 듯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시몬의 시체엔 붉은색 반점이 어지럽게 박여 있었다.

흩날리는 꽃잎을 닮은 반점에서 달콤한 꽃향과 역한 악취가 동시에 풍겼다.

제국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역병이 또다시 음험한 이빨을 드러낸 거였다.


“젊은 사내가 발병하다니. 어찌 된 일일까요?”

카레스가 한숨을 섞어 물었다.

저승꽃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새어 나가면 제국은 하루아침에 마비될 거였다.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 백성들이 어떤 짓을 벌이는지.

일상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었다.


“본디 저승꽃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발병한다.”

“6년 동안 저승꽃은 젊은 여성에게만 마수를 뻗었습니다.”

“씨앗을 품은 것뿐이었다. 증상도 없고, 전염력도 없었지. 나와 늑대의 영역에 격리한 이상 그들은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못한다.”

“늑대가 왜 시몬을 찾아내지 못했을까요?”

니콜라이도 카레스와 똑같은 의문을 품었다.

의문은 터질 듯한 분노에 가까웠다.

늑대가 제 의무를 다했다면, 엘리자벳의 눈앞에서 그녀의 물건으로 살인하는 일 따위는 저지르지 않았을 거였다.

악녀 엘리자벳을 쫓아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이 엘리자벳 때문이라고 했다.

니콜라이는 진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엘리자벳을 지킬 수 없었다.

그녀를 욕하는 자들보다 그런 자신이 더 역겨웠다.


“모든 것이 잘 짜인 연극 같구나.”

“울타리 사고도 어딘가 어설펐습니다. 감수한 위험에 비해 예상되는 이득은 적었으니까요.”

“엘리자벳을 노린 게 아니야. 그저 시간을 벌 목적이었을 뿐이다.”

“엘리자벳 님이 울타리 쪽으로 다가가지 않았다면…… 다른 일을 벌여 결투를 중단시켰을 겁니다.”

“그 짧은 시간에 시몬이 돌변했다.”

니콜라이는 시몬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뭐라 꼬집을 수 없는 불쾌한 예감.

그때 결투를 중단시켰다면 최악의 상황은 막았을지 모른다.


“늑대는 조용했다. 시몬이 클라우디아의 목숨을 끊으려는 순간, 저승꽃이 피었다고 신호를 보냈다.”

“시몬을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대광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저승꽃에 전염되었을 겁니다.”

“…….”

“다행이라면 다행이지요. 시체에는 전염력이 없으니까요.”

다행이란 말이 한심하고 무력하게 들렸다.

니콜라이는 즉위한 이래로 제국 수호의 의무를 다해왔다.

늑대와 함께 저승꽃으로부터 백성들을 지켰다.

하지만 저승꽃이 변이했다면?

이번처럼 늑대의 능력을 벗어난 저승꽃이 출몰한다면, 니콜라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 백성들이 태풍 앞의 촛불처럼 사그라지는 것을.

피를 토하고 악취를 풍기며 죽음과 절망을 옮기는 것을.

모두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다.


“늑대와 내가 주목하던 곳은 남부 국경이었다.”

“로즈로이스 경이 지휘하는 인테드 제도 말씀이십니까?”

“새로 들인 황비도 그쪽에서 데려왔다. 그 여인의 이름이 뭐였더라?”

“타라입니다. 브렌든 후작가의 방계 조이스 남작 가의 여식이지요.”

황비 이름 정도는 기억해두라는 투로 카레스가 말했다.

니콜라이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날은 여전히 커다란 상처였다.


‘그 여인을 격리하려고 엘리자벳을 밀어내야 했다.’

한동안 제 눈을 쳐다보지 않던 엘리자벳.

그런 엘리자벳에게 본심을 말할 수 없던 니콜라이.

매번 똑같은 물음이 그를 괴롭혔다.


‘내가 정말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까? 황제의 의무가 언제나 우선이면서?’

누구도 사랑하지 말라는 부황의 유언을 어겼다.

품지 말아야 할 여인을 마음에 품었다.

무디어진 감각이 새로 깨어났다.

잊고 있던 던 외로움이 소스라쳤다.

엘리자벳 주위에 떠도는 체리블로섬 향기.

오직 그녀의 미소와 향기만이 니콜라이를 구원했다.

행복은 그녀 곁에만 숨 쉬었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끊임없이 엘리자벳에게 상처를 안겼다.

지켜주기는커녕, 오히려 위험에 처하게 했다.


‘내가 아니면 엘리자벳은 악녀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위협도 받지 않겠지. 지켜줄 수도 없으면서 곁에 잡아두는 것이 옳은가? 진정 아낀다면 그녀만을 사랑해주는 이에게 보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왜 지금 더글라스의 반반한 얼굴이 떠오른 걸까.

니콜라이가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비릿한 냄새가 풍겼지만 피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느끼는 건 오직 엘리자벳의 향기와 입술뿐이었다.


“새로운 정보가 필요하다. 저승꽃을 연구한다는 모라신시아 신전의 아칸소 추기경을 부르라.”

“시몬의 시신은 어찌할까요?”

“…….”

“브렌든 후작이 시신만이라도 돌려달라며 항의하고 있습니다.”

니콜라이의 시선이 망자를 향했다.

촉망받던 인재.

명문 가문의 후계자.

시몬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니콜라이의 입술 사이에서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시신과 똑같이 태워라.”

그때까지만 해도 시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늑대가 다시 말을 걸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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