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일까? (58/97)


#58.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일까?
2023.03.21.


본궁으로 향하는 길이 까마득하게 멀었다.

저승꽃의 악취가 후각을 마비시켰다.

이 순간 미친 듯이 한 여인이 그리웠다.


‘엘리자벳…….’

그녀를 품에 안고 황홀한 향내를 듬뿍 들이마시고 싶었다.

노을 진 바다처럼 일렁이는 선홍빛 머릿결에 코를 박고, 그녀가 신음을 흘릴 때까지 구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엘리자벳은 니콜라이 때문에 악녀란 누명을 썼다.


「모든 일이 엘리자벳 때문에 벌어졌습니다. 당장 쫓아내야 합니다.」

「평민 여인이 황태자 전하의 교육담당관이라니. 처음부터 가당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검술 훈련은 중단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더군요. 시몬 경을 쫓아낸 것도 엘리자벳의 술수 아니었을까요?」

「납치사건도 기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작극일지도 모릅니다.」

시몬을 죽인 건 니콜라이였다.

그가 직접 단도를 던졌고, 시몬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죄를 물으려면 니콜라이에게 물어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도 니콜라이를 말하지 않았다.

모든 게 엘리자벳 때문이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비겁한 건 나다. 진실을 밝힐 수 없으니까.’

니콜라이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새하얗게 질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자신을 향한 분노는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차라리 저승꽃 발병 사실을 알리는 건 어떨까?

의문이 자리 잡기도 전에 늑대가 비웃었다.


「제국 전체가 뒤집히는 꼴을 보겠다는 거야?」

“끼어들지 마라, 늑대.”

「그 여자 하나 보호하려고 위험을 감수하겠다니. 네 아비가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거다.」

“더러운 주둥이로 부황을 담지 마라.”

「네 아비는 제국을 자신보다 사랑했어. 희생도 마다치 않았지. 너처럼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았다.」

“…….”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반은 닮아야지. 지금까지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려는 건가?」

늑대의 주둥이를 짓이기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니콜라이가 살아 숨 쉬는 한, 늑대는 제멋대로 나불대며 책임과 의무를 강요할 거였다.


「정신 똑바로 차려, 니키. 이번 일은 아주 위험해. 다시 확인해봤는데…… 시몬이라는 놈에게 저승꽃 씨앗은 없었다.」

“저승꽃은 씨앗에서 시작되는 병이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전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어.」

그동안 저승꽃이란 전염병이 진행되는 과정은 항상 동일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에 저승꽃 씨앗이 심어진다.

씨앗이 발아한다.

붉은 꽃잎 모양의 발진이 생기고 미열이 시작된다.

이때 전염력이 생긴다.

타인에게 씨앗을 옮긴다.

그 후에 기침, 고열, 각혈, 경련 등 증상이 급속도로 악화한다.

전염력도 극대화된다.

붉은 발진이 온몸을 뒤덮으면 사망한다.


「놈이 씨앗을 품었다면 내가 못 찾았을 리 없다.」

“씨앗 발아 없이 병이 진행되었다는 뜻인가?”

「더 이상한 건 놈에게 전염력도 없었다는 거지. 근거리에서 결투 중이었던 그 여자는 깨끗해.」

클라우디아는 황궁 모처에 머물고 있었다.

외출이나 이동이 금지되었으므로 구금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몬은 다른 사람처럼 변해서 클라우디아를 몰아붙였다. 평소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저승꽃 증상일 수도 있어, 니키.」

“자세히 설명해.”

「저승꽃은 온몸의 신경과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려. 건강한 상태에서 갑자기 발병했다면 신체 능력이 극도로 향상될 수도 있어.」

“의도적으로 저승꽃을 발병시켰다는 말인가?”

니콜라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믿고 싶지도 않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은 가설이었다.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지?”

「미안하지만 나도 몰라. 하지만 그것 말고는 설명이 안 돼.」

“모라신시아의 여신에게 들은 말은 없나?”

「내가 무슨 신관인 줄 알아? 신에 의해 태어났지만 신탁을 받은 적은 없어. 신의 명에 따라 네 아비에게서 너에게 옮겨 왔을 뿐.」

“너도 돌림병이나 다를 바 없는 놈이로구나.”

니콜라이가 씹어 뱉듯 말했다.

늑대는 재미있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있는 한 너와 네 일족은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

「니키. 저승꽃이 창궐하는 건 나도 질색이야. 하지만 나도 너처럼 향기에 익숙해져 버렸어.」

“무슨 뜻이지?”

「누가 시몬이란 놈에게 저승꽃을 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엘리자벳의 향기에 취해 있지 않았다면 좀 더 빨리 눈치챘을 것이다.」

“엘리자벳을 탓하지 마라. 그 여인에게는 아무 잘못 없다.”

「과연 그럴까? 네 아비가 라일라를 멀리했던 이유를 잊은 것이냐?」

토라진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늑대가 속삭였다.

니콜라이의 아름다운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위험한 여인이다. 너 역시 그녀에게 위험하다. 가까이할수록 서로를 절망과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될 거다.」

“닥쳐라. 늑대.”

「아쉽구나. 친우의 첫사랑을 응원해줄 수 없어서.」

첫사랑.

그 단어가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가 되어 니콜라이의 심장을 관통했다.

생전 처음 마음에 담은 여인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듯 행복했다.

그녀의 미소가 꿈결 같았다.

그녀 주위를 맴돌며 달콤한 꿈을 꾸고 싶었다.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다.

감각과 함께 깨어난 소유욕은 집착이 되었다.

그녀의 모든 걸 알고 싶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독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다.

니콜라이와 늑대가 저승꽃을 놓친 것도 처음이었다.


‘정말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인가. 그녀 곁에 머물고 싶은 소망은 헛된 꿈에 불과했을까.’

니콜라이가 팔꿈치로 석벽을 짚었다.

그의 몸이 밑동이 잘린 나무처럼 주르륵 미끄러졌다.

젖은 흙에 무릎이 젖어가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어난다면 엘리자벳을 찾아가게 되리라.

제국이든, 백성이든 다 내팽개치고 그녀와 함께 도망치고 싶어지리라.

그리하여 사랑하는 그녀에게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추악한 모습을 보이게 되리라.


 

***



“폐하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어?”

하루 치 숙제를 마친 프란츠가 조심스레 물었다.

흐트러진 필기구를 정리하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


“바쁘신가 봐. 며칠째 못 뵈었어.”

“너무하네. 엘리자벳까지 만나주지 않으실 줄이야.”

시무룩해진 프란츠가 중얼거렸다.

헝클어진 프란츠의 금발을 쓰다듬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어떡해서든 오웬 님을 모셔올 테니까.”

“내가 그걸 걱정하는 줄 알아?”

“아니면?”

“어휴. 엘리자벳은 하나뿐인 제자를 너무 모르네. 제자가 얼마나 사려 깊은지. 얼마나 스승을 걱정하는지. 엘리자벳 때문에 밤잠이 안 온다고.”

“늦게 자는 건 그냥 나쁜 습관일 뿐이잖아? 어제도 늦게까지 과자 먹었다며? 이 썩으면 어쩌려고 그래?”

“잔소리 좀 그만해!”

프란츠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잔소리 좀 안 하게 해주시지?”

내가 볼을 꼬집으려 하자, 프란츠가 발끈했다.


“엘리자벳을 구할 방법에 골몰하고 있었어. 몰두하다가 잠시 머리에 영양분을 공급한 것뿐이야!”

“말이나 못 하면.”

“네틀톤 후작을 제외한 교수들도 엘리자벳을 쫓아내야 한다고 난리야. 그런데 내가 가만있어야겠어?”

“…….”

“엘리자벳이 날 망치고 있대. 대귀족 출신의 제대로 된 교육담당관을 새로 임명해야 한대. 내 미래를 위해서.”

“넌 끼어들지 마.”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프란츠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먹장구름이 드리워졌다.


“아무 도움 안 되는 어린애에 불과하니까?”

“그런 뜻이 아니야.”

“엘리자벳은 내가 인정한 유일한 선생님이야. 제자인 내가 걱정하지 않으면 누가 해? 폐하께서도 모른척하시는데!”

“프란츠.”

“나도 엘리자벳을 지키고 싶어. 엘리자벳이랑 떨어지는 것은 싫다구.”

프란츠의 연두색 눈동자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똘똘 말아쥔 주먹이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니콜라이는 너무 바쁘고, 프란츠는 너무 어려. 처음 의지하게 된 사람과 멀어지는 게 두려울 거야. 날 도와줄 수 없다는 무력감도 더해졌을 테고…….’

틈만 나면 독설을 퍼붓는 악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 내 걱정을 할 만큼 커버린 걸까.


“고마워, 프란츠. 하지만 네게로 불똥이 튀는 건 원치 않아.”

“뭐야? 교육담당관 자리를 사퇴할 생각이야?”

게다가 눈치 빠른 열 살짜리.


“황태자궁으로도 투서가 날아들고 있어. 귀족원에서 대규모 시위도 계획 중이고. 계속 이 자리에 있으면 너에게나 폐하께나 부담이 돼.”

“그래서 도망치겠다고? 엘리자벳은 궁지에 몰리면 상대를 깨무는 사람 아니었어?”

“그런 식으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야. 여러 가지 방법을 고려해야 해.”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프란츠를 달랬다.

프란츠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혹시 겁먹은 거야?”

“그래, 겁먹었어.”

순순히 인정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프란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점심에 뭐 잘못 먹었어?”

“나 때문에 폐하가 손가락질당할까 봐 두려워. 나 때문에 네가 귀족들의 지지를 잃을까 봐 두렵고.”

“내 편은 원래 없어.”

“네가 말했잖아. 나라는 혼자서 다스릴 수 없다고. 귀족들이 마음에 안 들어도 구슬려야 한다고.”

“…….”

“나도 황궁에 있는 게 괴로워. 모든 사람을 집사처럼 해고할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마땅한 대꾸를 찾지 못하고 프란츠가 고개를 숙였다.

축 늘어진 어깨가 어느 때보다 애처로웠다.

프란츠는 영리한 아이였다.

억울해도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어린애처럼 떼를 쓰지도 못하는 거였다.


‘프란츠를 지켜주고 싶지만, 황궁에서 버티는 것이 능사가 아니야. 니콜라이도 나와 거리를 두고 있고…… 출궁한 뒤 방법을 모색해야겠어.’

프란츠의 교육담당관 자리에서 물러난다.

결심은 끝냈지만, 희뿌연 안개를 집어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그 뒤로 니콜라이는 날 찾아오지 않았다.

만나주지도 않았다.

카레스를 통해서 물어봤지만, 칩거 중이란 답변만 돌아왔다.

왜 시몬을 죽였는지.

왜 그런 방법을 써야만 했는지.

이유만이라도 안다면 이토록 괴롭진 않을 텐데.

날 위해서였다고 해도, 죽일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럴 만큼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던 걸까.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프란츠는 끝까지 내 마음을 돌리려 했다.

찌릿, 전류를 닮은 통증이 가슴을 훑어내렸다.


“폐하도 내 의지를 꺾으실 수 없어.”

“조금만 기다리면 안 돼? 폐하께서 곧 나서주실 텐데.”

“폐하께 의지하고 싶지 않아.”

“엘리자벳.”

“영원히 떠나겠다는 게 아니라, 반격할 준비를 하는 것뿐이야. 빨간 늑대처럼 물어뜯어 버리려고!”

장난스럽게 이를 드러내며 손톱을 세웠다.

프란츠를 두고 떠나는 게 예상보다 더 힘들었다.

한 번 더 설득하려는데 등 뒤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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