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 열 살짜리 황태자가 너무 앙큼하다 (59/97)


#59. 열 살짜리 황태자가 너무 앙큼하다
2023.03.24.



“엘리자벳 언니. 황궁을 떠나신다고요?”

수잔이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추락한 나비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수잔이 어떻게 여기를?”

“황태자 전하께 올릴 약을 가져왔다고 하니까 시종이 들여 보내줬어요.”

“보리츠와 함께 만든 보양제가 드디어 완성되었나 봐요!”

수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손에 최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상자를 들고 있었다.

의자매를 맺던 날.

수잔을 데리고 보리츠의 농장을 찾았다.

보리츠는 각종 허브에 능통한 천재 소녀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귀족 영애인 그녀의 열정도, 황궁 약제사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에도 감명받은 듯했다.

첫 만남에서부터 두 사람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보리츠는 무척 내성적이고 소심한 캐릭터인데. 수잔이랑 절친처럼 보였지.’

식물과 연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내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수잔의 간절함이 통한 걸까?

보리츠는 보양제를 함께 만들자는 수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간 날 때마다 보리츠와 함께 지혜를 짜냈어요. 보리츠가 아니었다면 완성하지 못했을 거예요.”

“일단 황태자 전하께 인사부터 올리는 게 좋겠어요. 두 분은 처음 만나는 거죠?”

수잔과 프란츠를 번갈아 보았다.

이곳이 황태자궁이라는 걸 깜빡 잊었는지 수잔이 새빨개진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작은 하늘,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고개를 들라.”

프란츠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하명이 떨어졌음에도 수잔은 움직이지 못했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황태자라는 지고한 신분에 주눅이 든 건지 알 수 없었다.

수잔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프란츠가 덧붙였다.


“그대의 이야기는 엘리자벳 선생님과 네틀톤 후작에게 많이 들었다. 어려워할 것 없어.”

“송구합니다, 전하.”

“네틀톤 후작은 입만 열면 누이동생 자랑이더군. 누군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보게 되는구나.”

“오라버니께서요?”

더글라스의 이야기가 나오자, 수잔이 주춤거리며 치맛자락을 내려놓았다.

프란츠를 향해 눈을 살짝 치켜뜨는 수잔.

유순한 눈매와 맑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

단정한 핑크색 머리칼이 더해져 한 떨기 작약처럼 청초한 미모를 자랑했다.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진짜 귀여워. 클라우디아 같은 냉미녀도 좋지만, 수잔 같은 청순 미소녀도 너무 매력적이야. 우리 수잔은 똑똑하고 착하기까지 하지.’

“제게도 황태자 전하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영민하고 현명하셔서 장차 훌륭한 황제가 되실 거라고요…….”

수잔이 얼굴을 붉히며 겨우 대답했다.

이런 귀여움을 나만 봐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흠흠! 이쪽으로 앉도록.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건가?”

프란츠가 괜스레 목을 가다듬으며 의자를 권했다.

허둥거리는 뒷모습이 낯설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정말 친절하시네요.”

수잔이 눈매를 접으며 방긋 웃었다.

프란츠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그대도 무척 우, 우아하군. 네틀톤 후작이 자랑할 만해.”

왜 말을 더듬는 걸까?

처음 보는 수잔한테 왜 저렇게 친절한 거야?

나한테는 안 그랬는데.


“프란츠. 어디 아프니?”

손을 뻗어 프란츠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었다.

프란츠가 내 손을 밀어내며 점잖을 떨었다.


“엘리자벳 선생님. 손님 앞이니 어린애 취급은 사양하겠습니다.”

“으응?”

“네틀톤 영애와 함께 다과를 즐기시지요. 그녀가 가져온 보양제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군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프란츠는 작은 신사 같았다.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표정도 여유로웠다.

수잔의 취향을 묻고 시종에게 차를 주문하는 말투에 기품이 철철 넘쳤다.


‘정말 프란츠 맞아? 우리 애가 달라졌네요?’

수잔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구경하는 동안 프란츠가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찍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해. 네틀톤 영애가 이상하게 보잖아?”

수잔을 흘낏거리며 빠르게 중얼거리는 프란츠.

나도 모르게 눈썹이 휘어 올라갔다.


“설마 수잔한테 관심 있니?”

“남녀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지.”

“남녀 사이? 고작 10살짜리가 뭘 안다고?”

오늘은 나와 프란츠의 가슴 아픈 이별 장면 아니었나?

하나뿐인 제자 운운하며 분위기를 띄울 때는 언제고.

약간의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니콜라이랑 똑같네. 누가 그 아들 아니랄까 봐.’

얼떨떨해하는 내게 프란츠가 수줍어하며 속삭였다.


“폐하께서는 28세시잖아. 엘리자벳은 22세고.”

“그런데?”

“네틀톤 영애는 16살이래. 나는 10살이고. 6살이면 딱 좋은 나이 차이 아니야?”

“뭘 계산까지 했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프란츠?”

프란츠는 더는 외로운 악동이 아니었다.

벌꿀색 머리칼과 천사 같은 얼굴을 가진 앙큼한 늑대였다.

내 동생 수잔을 노리는!


 

***

클라우디아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궁의 달은 창백한 은빛이었다.

두툼한 굳은살이 박인 손을 쥐었다, 폈다.

벌써 일주일째 검을 쥐지 못했다.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했다.

특명을 받았는지, 식사와 물을 가져다주는 병사들도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황제가 시몬을 죽이지 않았다면, 나도 내 진짜 힘을 꺼내야만 했을 거야.’

지금도 눈을 감으면 하늘 높이 치켜들어진 바스타드 소드가 번쩍였다.

죽음이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난생처음 맡아보는 강렬한 냄새였다.

달콤한 꽃향기 같기도 하고, 썩은 과일에서 나는 악취 같기도 한 기묘한 냄새.

그것이 죽음의 냄새였을까?

시몬은 왜 갑자기 괴력을 보였던 걸까?

의자에 걸터앉은 클라우디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끼익.

식사 시간에만 움직이는 문이 슬며시 열렸다.

클라우디아의 푸른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브렌든 후작이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만나 뵙고 싶었네. 로즈로이스 경.”

“면회는 금지되었을 텐데요.”

“내 입김이 통하지 않는 곳은 없지.”

맏아들을 잃고, 딸은 얼음탑에 갇혀 있는데도 브렌든 후작은 오만함을 잃지 않았다.

비록 나무껍질처럼 거친 피부와 퀭한 두 눈.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가졌다고 해도 말이다.


“놀라지 않는군.”

“신체를 단련하지 않은 사내의 발자국을 들었습니다.”

“아들과 호각을 겨룬 기사답네.”

브렌든 후작이 쓰게 웃었다.

그것도 잠시, 죽일 듯한 기세로 클라우디아를 노려봤다.


“폭군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는 건 자네였겠지!”

“그 말씀을 하려고 오셨습니까?”

“제국의 미래를 논하고 싶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힘을 합치자는 말일세.”

“그러니까 어디에 쓸 힘 말입니까?”

“혁명.”

클라우디아는 고요한 얼굴로 브렌든 후작을 응시했다.

푸른 눈동자만은 잘 벼려진 칼날처럼 예리했다.


“자네도 목격하지 않았나? 폭군이 무고한 내 아들을 처참하게 살해하는 모습을.”

“아드님을 따라가고 싶으십니까? 복수에 혁명이란 이름을 붙이시다니.”

“폭군의 만행은 이제 시작이네. 내버려 둔다면 제국의 앞날은 장담할 수 없어. 적국의 식민지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그 뜨뜻미지근한 태도는 뭔가? 가장 먼저 혁명의 깃발을 꺼낸 것은 자네가 아니었나?”

브렌든 후작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클라우디아가 늘씬한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았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혼자만 살겠다는 건가?”

“만에 하나 제가 혁명을 꿈꾸었다 해도 각하와 엮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만하군. 황금 없이 성공할 수 있는 혁명은 없네.”

“혁명에는 피가 따릅니다.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엘리자벳이란 악녀가 황제를 살인자로 만들었네.”

“정말 그녀 때문에 황제가 단도를 던졌을까요?”

클라우디아가 싸늘하게 물었다.

브렌든 후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시몬이 자네를 죽이려 하니, 황제를 충동질한 거야. 내 아들을 죽여 재산을 지키려고!”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뭐라?”

“시몬 경이 제 목숨을 노린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실력으로는 절 죽일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행운이 따라 절 죽였다 해도 실격패가 됩니다. 그런데 왜 엘리자벳이 시몬을 죽일까요? 가만히 두면 어쨌든 이기는데?”

“그, 그건……!”

브렌든 후작이 더듬거렸다.

클라우디아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드리워졌다.


“기본적인 확인도 없이 다들 엘리자벳을 물어뜯고 있지요.”

“그 악녀의 편을 드는 건가?”

“저는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폭군의 만행을 외면하면서?”

“무엇이 진실인지 살펴볼 요량입니다.”

“갇힌 주제에 뭘 하겠다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자네와 큰일을 도모하려던 내가 바보였군! 아무도 모르는 진실을 알려주려 했는데!”

브렌든 후작의 입에서 침이 튀었다.

클라우디아가 고개를 뒤로 빼며 눈썹을 찌푸렸다.

간단히 없애버릴 수 있는 상대를 떠들게 두는 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결투 상대였던 절 찾아와 혁명 운운하는 각하를 어찌 믿겠습니까?”

“내가 자네 등에 칼을 꽂을 거라는 건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아무에게나 등을 맡기지 않으니까요.”

“이런 발칙한!”

브렌든 후작이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린애 손목보다 가냘파 보이는 주먹을 보며 클라우디아가 읊조렸다.


“주먹을 쥐려면 근력부터 키우십시오. 어깨에 힘도 빼시고.”

“제기랄. 오늘 일은 내 절대 잊지 않겠다!”

브렌든 후작이 씩씩거리며 물러섰다.

도망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클라우디아가 말했다.


“폐하께서 패도를 걸으신다면. 엘리자벳이 진짜 악녀라면. 브렌든 후작이 말리셔도 혁명은 일어날 것입니다.”

“잘난 체하지 마라, 계집. 황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슨 뜻입니까?”

“이 비밀이 알려지면 황제는 놀림거리로 전락할 거야. 그 전에 내 손에 처단되겠지만!”

 

***

골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전부 프란츠 때문이었다.


“나랑 수잔이 농장에 간다는데 네가 왜 끼어?”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물었다.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 프란츠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리츠란 농부가 날 위해 보양제를 만들었다며? 직접 치하해야지.”

“황궁 밖은 너무 위험해.”

“엘리자벳은 위험한 황궁 밖으로 아주 떠나려고 하잖아.”

“나랑 너랑 똑같니?”

“내가 엘리자벳보다 훨씬 안전할걸?”

프란츠가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비밀을 알려주지. 대신 조건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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