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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암살자 같은 기사와 영웅일지도 모르는 농부 (60/97)


#60. 암살자 같은 기사와 영웅일지도 모르는 농부
2023.03.28.



“지금 나랑 흥정하자는 거니?”

“거래일 뿐이야.”

프란츠가 분홍색 혀를 삐죽 내밀었다.

꼬마 신사는 사라지고 망할 악동이 재등장한 거였다.

이래서 애들 안 좋아한다니까.


“네 안전을 어떻게 장담하는 거야?”

“폐하께서 기사를 붙여주셨거든.”

“비밀이 고작 호위 기사였어?”

“쉐이드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올까?”

프란츠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쉐이드라니, 사람 이름인가?


“이 녀석. 또 말장난 치려는 거지?”

프란츠의 오동통한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누군가 검집으로 내 손을 가로막았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봤다.

낯선 남자가 묵묵히 서 있었다.


‘아무 기척도 없었는데. 언제 나타난 걸까?’

만약 이 남자가 암살자였다면?

나도 프란츠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당신은 누구죠?”

경계심을 담아 물었다.

호리호리한 남자는 대충 자른 짙은 청색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가다듬어지지 않은 앞머리 사이로 가느다란 회색 눈이 무생물처럼 차갑게 빛났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미소년처럼 앳된 외모와 달리 그를 둘러싼 분위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처럼 으스스했다.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변의 온도가 몇 도쯤 떨어진 것 같았다.


 


“인사해, 엘리자벳. 내 비밀 호위 기사 쉐이드야.”

프란츠가 자랑스레 소개했다.


“폐하께서 나와 상의도 없이 새 호위 기사를 붙이셨다고?”

“미안하지만 그렇게 됐어.”

“쉐이드 경. 발령은 언제 받으신 건가요?”

쉐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통과시키는 듯한 투명한 회색 눈동자로 날 응시할 뿐이었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쉐이드는 말하지 않아.”

프란츠가 대신 나섰다.


“언어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야?”

“나도 몰라. 폐하께서 말을 걸지도, 대답을 바라지도 말라고 하셨거든.”

“왜?”

“쉐이드의 임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 지키는 것뿐이니까.”

“한마디 말도 없이 가능할까?”

“그 방면에는 탁월한 인재라셨어.”

“…….”

“쉐이드는 시몬이 죽은 뒤부터 날 호위하기 시작했어. 가끔 나도 쉐이드의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야. 엘리자벳도 쉐이드가 있는지 몰랐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더 경계심이 발동했다.


‘배신하면 어쩌지? 원작엔 쉐이드라는 캐릭터가 없는데…… 기사라기보다는 암살자 같아.’

나와 프란츠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쉐이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표정 변화도 없었다.

벽이나 인형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신체를 극도로 단련한 초일류 무사라는 건 알았다.

니콜라이와 클라우디아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원작을 안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힘이야. 언제 어떤 캐릭터가 등장하는지, 어디서 무슨 사건이 벌어지는지, 어떻게 하면 그 정보를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지 다 아니까.’

엘리자벳에 빙의한 후에 모든 것을 계산해왔다.

덕분에 위험을 미리 피할 수 있었다.

적으로 만나게 될 인물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였다.

원작의 단점도 있었다.

시몬의 죽음이나, 쉐이드의 등장처럼 원작에 없는 이벤트가 발생하면 대처가 어렵다는 거였다.


“쉐이드 경이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도 널 데리고 출궁할 수는 없어, 프란츠.”

단호하게 못 박았다.

프란츠는 쉬 포기하지 않았다.


“변장하면 되잖아? 황궁 밖에 나가본 적 없지만, 자연스럽게 행동할 자신 있어!”

“네 위치를 생각해. 혼란한 시기에 경거망동해서는 안 돼.”

“한시도 잊은 적 없어. 그래서 늘 참아왔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항상 뒷전이었지.”

프란츠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번엔 나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재능이 없지만, 검술 훈련에 매달렸어. 미술을 좋아한다는 건 아예 감췄어. 건강을 해쳤다는 것도 알리지 못했어. 힘없는 황태자라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엘리자벳이 변명할 필요 없어. 힘을 얻을 때까지 납작 엎드려 사는 것이 내 운명이니까. 하지만 가끔 궁금해.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프란츠…….”

“언제쯤 힘을 가지게 될까?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사방이 적뿐인데.”

그 말을 하며 프란츠는 웃었다.

모든 것을 깨달은 듯 허무한 웃음은 10살 소년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프란츠가 감당해왔던 삶도 마찬가지였다.

프란츠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누구도 흔들지 못할 당당한 황태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하지만.


‘나 역시 프란츠에게 똑같은 걸 강요했어. 프란츠를 위한다는 핑계로. 언젠가부터 프란츠는 사라지고 황태자란 이름만 남은 것 같아. 내가 지키고 싶은 건 그냥 이 아이인데.’

무엇이 진정으로 프란츠를 위한 일일까?

프란츠의 자유와 즐거움을 보장하겠다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옳을까?

오늘따라 부쩍 커 보이는 아이에게 뭐라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황태자 전하도 같이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엘리자벳 언니.”

한 발자국 뒤에서 서 있던 수잔이 부탁했다.

프란츠는 연상의 미소녀가 제 편을 들어준다는 것만으로 두 뺨을 붉게 물들였다.


“지금까지 갇혀 계셨다는 게 안타까워요. 너무 답답하셨을 것 같아요.”

“…….”

“큰 힘은 안 되겠지만, 저도 황태자 전하를 지킬게요. 네?”

수잔이 두 손을 모았다.

사슴처럼 커다란 눈동자가 양심을 찔러댔다.

프란츠도 아기고양이처럼 애처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쉐이드 경 생각은 어때요?”

말은 못 해도 의사 표현은 할 수 있겠지.

그런 심정으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쉐이드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있던 사람이 없어졌는데 왜 아무도 몰랐지?”

“궁금해하지마, 엘리자벳.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프란츠가 수잔과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쉐이드는 바깥 호위를 준비하는 것 같지?”

“아니라면 그냥 사라질 리 없죠.”

“엘리자벳이 쉬 허락해줄 것 같지 않은데.”

“엘리자벳 언니는 인정이 많은 분이에요. 우리가 진심으로 부탁하면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실 거예요.”

“그대는 네틀톤 후작의 칭찬 이상으로 영민하군.”

“부끄럽습니다, 황태자 전하.”

여보세요?

나 아직 여기 있거든요?

둘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프란츠와 수잔을 보고 투덜거렸다.


“두 사람 처음 만난 것 맞아? 누가 보면 꼬마 연인 같네.”

“무, 무슨 말이야. 네틀톤 영애에게 실례되는 소리 하지 마!”

“키랑 나이 차이가 좀 나지만,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줄 테고. 둘이 잘 어울리는데?”

은근히 놀렸다.

부끄러운지 프란츠가 딴청을 피웠다.

귓바퀴는 물론 목덜미까지 달아오른 걸 보니, 진심으로 기쁜 모양이었다.

수잔이 불쑥 끼어들었다.

수잔의 얼굴도 꽃분홍색이었다.


“저는 신하로서 황태자 전하를 모실 뿐이에요.”

“그게 전부야?”

내가 되물었다.

수잔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는 너무 사랑스러우세요. 저도 황태자 전하처럼 사랑스러운 아들을 갖고 싶어요.”

그 뒤에 찾아온 숨 막히는 정적.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혹감으로 일그러지던 프란츠의 얼굴을 최대한 모른 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

니콜라이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소문은 당연한 듯 퍼져나갔다.


“폐하께서 엘리자벳에게 질리셨다며?”

“바람둥이로 유명한 분이니 어쩔 수 없지.”

“과거가 아주 복잡한 여자였다지? 엘리자벳 때문에 신세 망친 남자가 한둘이 아니래.”

“불쌍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악녀가 죗값을 받는 거네. 너무 설치긴 하더라.”

같은 평민들조차 날 욕하기 바빴다.

나의 미모, 재산, 권력은 물론 연애 마저 동경하던 사람들이 한순간 등을 돌렸다.


‘선택적 분노가 이런 건가. 귀족에게 차별받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같은 평민이 특별대우 받는 건 용납 못 한다는 거야?’

평민들의 심리를 약삭빠른 브렌든 후작이 파고들었다.

그는 뒷돈을 풀어 나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나도 오웬, 더글라스와 함께 비슷한 짓을 벌였다.

그만큼 파급력이 크기 때문이었다.

악녀, 폭군, 망조.

원작의 시커먼 그림자가 제국을 뒤덮었다.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한다면 클라우디아가 아닌 제삼의 인물이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내 편을 들어줄 세력을 만들어야 해. 그러자면 보리츠의 도움이 필수적이야.’

보리츠에게 시선을 던졌다.

보리츠는 오늘도 커다란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수잔의 방문을 즐거워하는 게 느껴졌다.

머리를 맞댄 두 사람 사이에 보라색 꽃 화분이 놓여 있었다.


“갑작스레 상태가 나빠져서 슬펐는데…… 일조량과 영양분을 줄여 생장을 늦춰봐야겠네요. 조언 감사합니다, 수잔 님.”

보리츠가 존경을 담아 말했다.

수잔이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건강한 사람의 병이 더 급격히 악화할 때가 많거든요.”

“역시 수잔 님의 지혜는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저야말로 보리츠 님께 큰 도움을 받고 있어요.”

“부, 부디 말씀을 낮춰주세요. 수잔 님은 귀족 영애고 저는 일개 농부일 뿐인데…….”

보리츠가 말을 더듬었다.

그의 반응이 익숙한지 수잔이 프란츠를 돌아봤다.


“도련님께서 보시기엔 어떠세요? 꽃이 살아날 것 같나요?”

도련님이란 호칭이 어색한 듯 수잔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프란츠는 반쯤 넋을 놓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살아날 거야. 보리츠와 그대의 노력을 농사의 신 테라토리스께서 굽어살필 테니까.”

수잔이 말을 걸어줬다는 것만으로 기쁜 걸까?

프란츠의 연두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수잔이 등을 돌리자, 다시 빛을 잃었다.

흐린 눈으로 수잔의 뒷모습을 좇는 프란츠.


‘우리 프란츠가 짠내 캐릭터가 될 줄이야. 파이팅이다, 이 녀석.’

코끝이 찡했지만, 오늘의 목적을 잊을 수 없었다.

내가 보리츠에게 물었다.


“보리츠 씨. 요즘도 작물 연구를 하시지요?”

“……예?”

화들짝 놀란 보리츠가 모종삽을 떨어뜨렸다.

말을 걸었을 뿐인데 저런 반응이라니.

수잔과 달리 나는 여전히 불편한 모양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 되는 아이들을 재배하고 싶어요. 약초는 너무 비싸니까요. 제 실력으론 어림없는 이야기지만요.”

보리츠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보리츠 씨. 그렇게까지 자신을 낮출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흙을 만지는 농부에 불과해요. 수잔 님처럼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고요.”

“모든 농부가 빈자를 위해 고민하는 건 아니잖아요?”

“가난이 고통스럽다는 걸 아니까 그러는 것뿐인데…….”

보리츠가 머리를 숙이고 어깨를 오그렸다.

땅을 파고 숨어버릴 기세였다.


‘백성을 구한 영웅으로 불릴 사람인데 너무 소심해. 보리츠가 구황작물을 개발하는 건 혁명 이후야. 하지만 기다려 줄 시간이 없어.’

최대한 빨리 보리츠를 각성시켜야 했다.

보리츠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이라도 얹으려면.

보리츠의 후원자로서 내 명성을 드높이려면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악녀 기질을 제대로 발휘해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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