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 꽃미남이 덩굴째 (61/97)


#61. 꽃미남이 덩굴째
2023.03.31.



“보리츠 씨. 겸손한 건가요, 무능한 건가요?”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싸늘한 눈빛 때문일까.

보리츠는 물론 수잔과 프란츠까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하찮은 농부에 불과한 분이 왜 빚까지 잔뜩 낸 거죠?”

“그, 그걸 어떻게……!”

“이 농장도 고리대금업자 소유나 마찬가지던데, 언제까지 숨길 작정이었나요?”

보리츠는 구황작물 연구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보리츠를 눈여겨 본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보리츠는 먹음직한 사냥감이었으리라.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보르만이 값비싼 약초를 훔쳤던 걸 건달들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우연이라기엔 절묘하지 않나요?”

“누가 알려줬다는 건가요?”

“당신이 유일하게 거래하던 허브 상점 주인의 뒤를 캐봤어요. 그냥 불법적인 물건을 취급할 뿐만 아니라, 암흑가 인간들과도 굉장히 친밀하더군요.”

“그분은 저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보리츠가 신음하듯 대꾸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당신은 지금 현실을 외면하고 있어요.”

“진짜예요.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 유일한 사람이라고요.”

“비위를 맞춰준 거겠죠. 최고급 약초를 헐값에 사들이려고.”

“네?”

“농학 서적도, 외국의 종자나 씨앗도 전부 그를 통해 샀죠? 터무니없이 바가지를 씌운다는 것도 모르고요.”

“그, 그럴 리가 없어요.”

보리츠가 뒷걸음질 쳤다.

진실의 뚜껑을 여는 것이, 그 안에 담긴 기만과 우매함을 깨닫는 것이 두렵다는 듯이.


“최고의 작물을 재배하면서도 당신은 점점 더 가난해졌어요. 동생에게 물감도 사주지 못할 만큼.”

“제가 무능해서 그런 거예요…….”

“맞아요. 보리츠 씨는 무능해요.”

“!”

“게다가 어리석고, 무책임하기도 하죠.”

다리에 힘이 풀린 보리츠가 풀썩 주저앉았다.

보다 못한 수잔이 내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보리츠 님이 너무 불쌍해요. 나쁜 사람에게 이용당한 것뿐이잖아요.”

“그래서 바보 같다는 거야.”

“엘리자벳 언니.”

“수상한 걸 의심할 줄도 모르고, 모조리 빼앗기게 생겼잖아? 아무것도 몰랐어요. 죄 없는 피해자예요. 이러면 누가 도와줘?”

“…….”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건 무책임한 거야. 고고한 척 지조를 지켜봤자 남의 먹잇감이 될 뿐이지.”

보리츠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저 시들어가는 보라색 꽃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당신에게 중요한 건 이 꽃을 살리는 게 아니에요.”

내가 보리츠 앞에 놓인 꽃 화분을 위로 치켜들었다.

바닥에 힘껏 내팽개쳤다.

-와장창.

화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사방에 흙과 화분 조각이 튀었다.

꽃의 허연 실뿌리가 드러나자, 수잔과 프란츠가 어깨를 튕기며 날 돌아봤다.


“아, 안돼……!”

보리츠의 검은 후드 밑으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꽃을 옮기는 그에게 말했다.


“꽃 한 송이가 죽을까 봐 울면서. 사람들 굶어 죽는 건 언제까지 외면할 거예요?”

“맞아요! 무능해요. 아직 사람들을 도울 능력이 없다고요!”

반항인 듯, 절규인 듯 보리츠가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럼, 이러고 있으면 그 능력이 갑자기 막 생겨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걸 어떡해요? 저도 최선을 다했어요. 싸고, 키우기 쉽고, 배부른 작물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밤낮으로 노력해왔잖아요? 세상에 없는 걸 만들려고.”

“처음부터 오르지 못할 나무인지도 몰라요. 유명한 학자들도 못 하는 걸 저 같은 가난한 농부가…….”

“그만 징징거려요!”

보리츠를 매섭게 질책했다.

지금 보리츠에게 필요한 것은 당근이 아니라, 채찍이었다.

남루한 껍질을 깨고, 새롭게 태어나게 해줄 매서운 채찍.


“못 하겠으면 깨끗하게 포기를 하든가. 포기가 안 되면 될 때까지 물고 늘어져야지,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질질 짤 거예요?”

“!”

“내가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그깟 자존심을 지키느라 기회란 기회는 다 걷어차 놓고, 뭐라고요? 최선을 다했다고요?”

일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울먹이던 보리츠의 어깨도 움직임을 멈췄다.


“맞아요. 저는 나태해요. 멍청하고, 아집으로만 똘똘 뭉친 인간이에요.”

보라색 꽃을 든 보리츠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더듬대지 않았다.

한마디씩 끊어 말하는 어투에 결기가 넘쳤다.

그가 얼굴까지 가린 후드를 홱, 벗어 내렸다.


“하지만 포기는 하지 않아요! 반드시 해낼 거예요!”

나는 처음으로 보리츠의 민얼굴을 마주했다.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눈을 의심할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야? 남자가 이렇게 예뻐도 돼? 보리츠가 이런 설정이었어? 농부가 아니라 농사의 요정 같잖아?’

눈물로 엉망이 되었어도 그의 미모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오히려 젖은 속눈썹과 붉게 달아오른 눈매가 아찔한 요염함을 더하고 있었다.

니콜라이와 더글라스 덕분에 미남엔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보리츠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미남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올리브그린 색 머리칼.

농부라곤 믿기지 않는 새하얀 피부.

바람 불면 날아갈 듯 야윈 자태.

수잔과 프란츠도 보리츠의 미모에 넋을 잃었다.

뒤늦게 시선을 눈치챈 그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흥분해서 죄송합니다. 귀한 분들 앞에서…….”

보리츠가 우물거리며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려 했다.

내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얼굴을 내놓고 똑똑히 말하세요.”

“못, 못해요.”

“안 해 본 것뿐이에요. 천천히 도전해봐요. 도와줄게요.”

“엘리자벳 님이요?”

“그래요. 이 엘리자벳 엠스터가 보리츠 씨를 도울 거예요.”

“왜…… 저를 이렇게까지 도우려 하시는 거죠?”

보리츠가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조차 한 떨기 수선화처럼 아리따웠다.


“영웅이니까요.”

“마…… 말도 안 돼요.”

“가난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다는 마음. 저는 그런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야말로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해요.”

“…….”

“그러니까 우리, 같이 해요. 서로를 믿고 지켜주는 동료로서.”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보리츠가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손은 화사한 외모와 달리 나무껍질처럼 두껍고 거칠었다.

***

니콜라이는 신관을 좋아하지 않았다.

신의 이름으로 돈을 뜯는 사기꾼처럼 보이는 까닭이었다.

하트만 제국인들은 다양한 신을 모셨다.

농부들은 농사의 신을, 어부들은 바다의 신을.

치유의 여신 모라신시아는 모든 이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하얀 옷을 입은 신관들은 늙고 병든 자들에게 물 몇 방울을 뿌리고 헌금을 뜯어갔다.

아칸소 추기경도 그런 신관 중 하나라고 여겼다.

하얀 비단 띠로 두 눈을 가린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


“모라신시아의 은혜가 폐하의 숨결에 가득하길 바라옵니다.”

지팡이를 짚은 장신의 신관이 무릎을 꿇었다.

황좌에 앉아 있던 니콜라이가 미간을 구겼다.


“신관은 일어나라.”

“황공합니다.”

“어떻게 혼자 왔느냐?”

“사람의 눈을 바친 대신, 영혼의 눈을 얻었습니다.”

“나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싫어한다. 쉽게 말하라.”

“시력을 잃었으나, 다른 감각으로 사물을 인지합니다. 움직이는데 문제없으니 심려를 거두십시오.”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

티끌 한 점 묻지 않은 새하얀 사제복.

눈을 가린 끈 때문일까.

건장한 몸에서 묘한 성스러움과 신비로움이 흘러나왔다.


‘최연소 추기경으로 추대된 사내라고 했지. 신탁을 듣는 유일한 자라고. 무엇 때문에 몸을 단련했을까?’

사제복으로 감추고 있지만, 아칸소는 꾸준한 훈련으로 잘 다듬어진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빈틈없이 곧은 자세는 일류 검사들도 쉬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저승꽃을 연구한다 들었다. 저승꽃이 궤멸한 지 수년이 지났는데 연유가 무엇인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저승꽃은 궤멸시킬 수 없는 역병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 생각하는가?”

“역마가 날뛰길 바라는 악인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신관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살기는 없었으나, 공기를 짓누르는 투지만은 강렬했다.

니콜라이는 신관 같지 않아 보이는 신관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신탁을 받았는가?”

“예.”

“말해보라.”

“신의 말씀을 비신자이신 폐하께 옮길 수 없음을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선황께서는 모라신시아 여신에게 100일 제를 올렸다.”

“역병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신을 섬긴 것은 아니셨지요.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이시고요.”

“신관도 내 백성이다. 신전도 내 땅이고.”

“저의 주인은 신뿐입니다. 신의 종은 목숨을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죽음도 각오한다는 뜻인가?”

“송구합니다.”

아칸소는 하나도 송구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니콜라이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왜 입궁했지? 신전에 틀어박혀서 시위나 하면 그만인데.”

“자격을 가진 그분께 반드시 전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황제가 아닌, 다른 자에게 신탁을 전하겠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그 또한 신탁이겠군.”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아칸소가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

말끝마다 신을 찾는 것이 거북했다.


“누가 그 자격을 지녔는가?”

“여신의 신물을 가진 자입니다.”

“신물이라?”

“신물은 여신을 대신하여 권능을 행합니다. 모라신시아 여신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신물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황궁 보물고엔 모라신시아의 신물이 없다. 그런데도 찾아온 걸 보면 신물의 소유자가 황궁에 있다는 건가?’

불현듯 한 장면이 떠올랐다.

가문의 보물을 내밀며, 엘리자벳을 출궁시켜달라던 더글라스.

구리로 만든 낡아빠진 모노클을 요구하던 엘리자벳.

그녀가 영매가 아니란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모노클이 신물이었을까? 그래서 핀치가 중독되는 걸 알아낸 건가?’

니콜라이도 모노클을 착용해본 적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특정된 사람만 행사할 수 있는 권능이란 뜻인가?

그것을 엘리자벳이 소유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애써 잊으려 했던 여인의 미소가 니콜라이의 심장을 옥죄었다.


“엘리자벳 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꼭 전해야 하는 신탁이옵니다.”

 

***

보리츠를 얻었다.

계약서 없이도 확신할 수 있었다.


「무조건 엘리자벳 양의 뜻에 따르겠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보리츠는 첫날밤의 새신부보다 수줍어했다.

원작 정보를 알려주면 보리츠는 머잖아 대륙 역사에 남을 구황작물을 개발하게 될 거였다.

물론 구황작물을 대량 재배하고, 재배법을 널리 퍼뜨리는 건 나와 엠스터 상단의 몫이었다.

돈과 명성은 물론 꽃미남까지 덩굴째 굴러온 것이다.


‘일단 땅부터 사놓자. 자선단체를 만드는 것도 좋겠지. 보리츠와 함께 내 인생도 활짝 피겠구나!’

모든 것이 잘 풀릴 줄 알았는데.

내 인생은 순탄하게 굴러가는 법이 없었다.


“꼼짝 마! 움직이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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