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그대는 내 것이다.
(62/97)
62. 그대는 내 것이다.
(62/97)
#62. 그대는 내 것이다.
2023.04.04.
이건 또 웬 놈들일까.
짜증 섞인 눈으로 예닐곱 명의 사내들을 노려봤다.
우락부락한 사내들의 손에는 두툼한 몽둥이와 접이식 칼 따위가 들려 있었다.
“후후. 보리츠만 데려가려고 했는데. 반반한 계집들까지 있을 줄이야!”
“이 계집들도 팔면 원금을 회수하고도 남겠어.”
“오늘은 재수가 좋군!”
시시껄렁한 말투까지 한눈에도 싸구려 건달패였다.
설명해 보라는 뜻으로 보리츠를 돌아봤다.
다시 검은 후드를 눌러쓴 보리츠가 가랑비 맞은 버들잎처럼 달달 떨었다.
“빚쟁이들이에요. 다음 달에 온다고 했는데……. 왜 오늘 몰려왔는지 모르겠어요.”
보리츠는 자신 때문에 나와 수잔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라? 이 빨간 머리 계집, 낯이 익은데?”
“그때 그 여자잖아! 호위병을 잔뜩 달고 다니던!”
어딘가 낯이 익더라니.
시궁창 바닥에 얼굴을 비비던 그놈들.
보리스를 찾으러 간 상점 뒷골목에서 마주쳤던 건달들이었다.
건달 중 한 명이 날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번엔 달라붙은 놈도 없는 거 같은데 너 아주 잘 만났다! 찾아내서 본때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전에 걔들이구나? 반갑니? 나는 별로 안 반가운데.”
“건방진 말투도 그대로구먼! 개처럼 두들겨 맞고도 혀를 나불거릴지 두고 보자!”
건달이 팔뚝 근육을 자랑하며 달려들었다.
다른 놈들은 시시덕거리며 동료의 습격을 지켜봤다.
내가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될 거라 믿는 자신만만한 표정들.
그때 프란츠가 외쳤다.
“쉐이드. 엘리자벳을 보호해!”
대답은 없었다.
텅 빈 곳에 한 남자가 불쑥 솟아났을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기술을 쓰는 거지? 정말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건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쉐이드가 건달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가 허공에 나부꼈다.
빠르고 조용하며 유려했다.
그림자가 지나치는 자리마다 흉기를 든 사내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크아악!”
“무슨 일이냐? 컥!”
피를 토하면서도 놈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참혹한 광경이 연이어 펼쳐졌다.
프란츠의 두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영악하다 해도 10살 어린애였다.
황금과 보석으로 둘러싸인 채 고귀하게 자란 소년.
그런 프란츠를 수잔이 뒤에서 꼭 안아줬다.
“보지 마세요. 곧 정리될 거예요.”
수잔이 작은 손으로 프란츠의 눈을 가렸다.
자신도 떨고 있으면서 프란츠를 지켜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프란츠는 신사적인 척도, 어른스러운 척도 하지 못했다.
보리츠도 꼼짝하지 못했다.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허브 향으로 가득했던 농장에 핏물이 흥건했다.
쉐이드 발밑에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사내들의 몸뚱이가 나뒹굴었다.
“죽일 필요는 없었잖아요?”
쉐이드는 답하지 않았다.
“시답지 않은 빚쟁이였어요. 그냥 쫓아내도 됐잖아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는 눈으로 날 말끄러미 바라보는 쉐이드.
그 모습이 평온하다 못해 순수한 소년 같았다.
적어도 일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못 하는 거예요?”
“…….”
“다음엔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죽이기 전에 제 허락부터 받으라고요.”
그의 가슴을 검지로 찌르며 차갑게 경고했다.
쉐이드는 잠깐 생각하는 듯했다.
보일 듯 말 듯 미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썹이 조금 쳐진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언니! 얼른 돌아가야겠어요. 전하께서…… 숨을 잘 못 쉬세요!”
프란츠를 끌어안은 수잔이 말했다.
프란츠의 입술은 하얗게 말라 있었다.
낯빛은 밀랍처럼 창백했다.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헐떡거리는 프란츠를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전부 나 때문이야. 내가 너무 경솔했어.’
끓어오르는 죄책감을 밀어 넣으며 외쳤다.
“쉐이드. 황태자 전하를 황궁으로 모셔요! 최대한 빨리!”
***
긴 하루가 어둑, 저물었다.
나는 어둑해진 복도에서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많이 놀라셨을 뿐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며칠 요양하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궁정 치료사의 말을 듣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프란츠의 침전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왜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걸까. 보리츠가 뒷골목 빚쟁이들에게 시달린다는 걸 알았으면서.’
몰랐던 게 아니라 방치한 거였다.
보리츠가 현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야 순한 양처럼 내 뜻대로 움직일 거라고.
놈들이 위험한 방식으로 보리츠를 압박하리란 것도 알았다.
일부러 빚 탕감을 해주지 않았다.
때맞춰 구해주면 더 고마워할 테니까.
그 결과 이런 일이 벌어졌다.
「미안해, 엘리자벳. 내가 고집을 부려서 난처하게 만들었네.」
쉐이드에게 업힌 프란츠가 말했다.
그 순간에도 날 걱정하는 프란츠의 다정함이 가슴을 찔렀다.
‘넌 아무 잘못 없어, 프란츠. 평범한 어린애처럼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프란츠를 지켰어야 했는데.
나는 교육담당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다.
쉐이드가 없었다면 수잔과 보리츠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우리가 무사히 돌아온 것은 행운에 불과했다.
‘원작을 안다고 너무 자신만만했어. 내 힘으로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도 없으면서. 진짜 무책임한 건 나였어.’
후회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자책이 꼬리를 물었다.
지금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내 이름을 불렀다.
“엘리자벳.”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니콜라이가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엘리자벳.”
그의 중저음은 가끔 마법 같은 힘을 발휘했다.
현실을 환상으로 바꾸고, 먹구름 낀 하늘을 청명한 푸르름으로 물들였다.
내 안에 빽빽이 들어찬 외로움을 몰아내고, 낯선 설렘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좋았다.
덕분에 행복했다.
하지만 오늘만은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폐하.”
최대한 격식을 갖춰 사죄했다.
“고개 들라.”
“죄인입니다. 어찌 폐하의 용안을 바로 뵈옵니까.”
“괴상한 말투도 집어치우라.”
“그간의 무례도 깊이 사죄드립니다.”
“낯설다. 껄끄럽고.”
예법에 맞는 말투가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니콜라이와 격의 없이 지냈다.
황제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며 수많은 특혜를 누렸다.
특혜가 특혜인 줄도 몰랐다.
착각에 빠졌다.
니콜라이를 원망했다.
시몬을 죽인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고, 날 만나주지 않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을 막아주지 않아서.
그의 진짜 연인이라도 되는 양 상처 입었다.
그러곤 밤마다 그리워했다.
‘이번 일로 명확해졌어. 니콜라이는 니콜라이고, 나는 나일 뿐이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야 해.’
누군가에게 이렇게 보살핌을 받는 건 위험했다.
자꾸만 의지하게 되니까.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도움을 바라게 되니까.
어미 품에 안긴 아기 새처럼 니콜라이가 주는 안락함에 익숙해져 버렸다.
더 이상 용납해선 안 됐다.
‘이번 일이 분명 큰 빌미가 될 거야. 황궁에서 버틸수록 나는 악녀, 니콜라이는 폭군이란 말이 퍼져나가겠지. 우리는 같이 있으면 안 돼. 니콜라이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끝까지 외면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니콜라이 곁에 있고 싶었다.
그의 넓고 따스한 품을 파고들고 싶었다.
나를 누구보다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이 남자를 내 곁에 묶어두고 싶었다.
누가 뭐라건. 어떤 미래가 기다리건.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지 못했다.
니콜라이를 사랑하고 있으므로.
“교육담당관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한 처벌을 내려주십시오.”
시선은 발끝에 고정한 채 말했다.
니콜라이가 나 대신 변명했다.
“함께 가자고 조른 건 자기였다고, 핀치가 말했다.”
“어린 전하를 달래는 것도 제 일입니다. 제가 전하를 위험에 몰아넣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모두 무사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쉐이드 경이 동행하지 않았어도 그리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니콜라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제야 니콜라이를 응시했다.
‘얼굴은 왜 이렇게 상한 거야. 속상하게…….’
우리가 만나지 못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피죽도 얻어먹지 못한 사람처럼 야위었을까.
피로가 가득한 두 눈엔 드문드문 실핏줄이 엿보였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은 여전히 젖은 비단처럼 윤기가 흘렀지만,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안쓰러움이 목 끝까지 왈칵 밀어닥쳤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혼자 끙끙 앓았을 니콜라이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자기 편하자고 날 무시할 사람이 아닌데. 말 못 할 이유가 있었을 텐데. 나는 또 실망하고 또 원망했구나.’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가 내 품에서 잠시 쉬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건가?”
내 앞에선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니콜라이.
상처 입은 짐승 같은 얼굴로 그가 물었다.
처음 마주한 두려움에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맹수처럼 보였다.
모두에 군림하는 황제이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나라는 존재 때문에.
“황궁을 떠나고자 합니다.”
“……불허한다.”
“떠나겠습니다. 허락해주세요.”
“갇히고 싶은가?”
“풀려난 뒤에라도 떠나겠습니다. 제 결심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못 박았다.
그가 아닌 나를 설득하기 위한 말이었다.
“그대는 계약서를 썼다. 끝나기 전까지 내 곁을 떠날 수 없다.”
“포기하겠습니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제가 가진 저택과 땅, 현물, 상단 소유권 등 모든 걸 드리겠습니다.”
“그대와 그대의 부모까지 노예로 팔아버리겠다.”
“도망 노예가 되어 숨을 겁니다.”
니콜라이의 청록색 눈이 커다래졌다.
그 안에 담긴 불안과 두려움을 마주했다.
나 역시 불안하고 두려웠다.
“내게서 도망치겠다는 건가?”
터질듯한 분노를 꾹꾹 누르며 그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훅 밀어닥치는 남자의 체취가 날 옭아맸다.
‘땅을 치며 오늘을 후회하게 될 거야. 아무리 울어도 이 시간을 돌릴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밀어내는 것뿐이었다.
“지금 상황…… 폐하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모른다.”
“고집부리지 마세요.”
“고집은 그대가 부리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된다.”
니콜라이가 으르렁거렸다.
명령처럼 들리지만, 애원이었다.
“절대 떠날 수 없다. 그대는 내 것이다.”
제발 떠나지 말라고 애걸하고 있었다.
이 남자를 어떡하면 좋을까.
이 남자를 소유하고 싶은 내 마음은.
“폐하.”
나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팔로 그의 목을 감고 발뒤꿈치를 올렸다.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대었다.
눈물 한 방울이 뺨을 가로질렀다.
세 번째 키스는 눈물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