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그만 보내주세요, 폐하
(63/97)
63. 그만 보내주세요,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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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그만 보내주세요, 폐하
2023.04.07.
뜨거운 숨결이 여린 살갗을 헤치며 밀려들었다.
놓아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듯 니콜라이가 강한 힘으로 내 허리를 감싸 쥐었다.
입술에서 시작된 열기가 온몸을 헤집었다.
허리가 뒤로 휘었다.
가까스로 참고 있던 호흡이 빠져나갔다.
“흐읏.”
그게 신호였을까.
니콜라이는 온 힘을 다해 날 빨아당겼다.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을 돌릴 수 있으리라 믿는 것 같았다.
이성의 끄트머리가 조금씩 무너졌다.
빈자리는 열꽃이 채웠다.
꼭 감은 눈꺼풀 안쪽에서 빛이 튀었다.
달콤하고, 썼다.
황홀하고, 쓰라렸다.
정반대의 감각에 휩싸여 나는 파르르 떨었다.
차라리 무너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엘리자벳이었다.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악녀.
사랑 따위,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한다고 모든 일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궁금했다.
이 키스가 끝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영원히 이어지는 키스는 없는 걸까?
입술이 떨어졌다.
물음은 끊어졌다.
침묵이 들어찼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이만 보내주세요, 폐하.”
니콜라이의 아름다운 얼굴이 무너져내렸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달아올랐다.
철렁, 심장이 주저앉았다.
그가 눈물을 흘린다면 스스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무표정의 가면을 쓴 니콜라이가 씹어뱉듯 말했다.
“내가 그대를 보내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가야 해요. 아니, 갈 거예요.”
허락 없이 등을 돌렸다.
그를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엘리자벳!”
한 발자국에 가슴이 무너졌다.
또 한 발자국에 심장이 짓이겨졌다.
나는 그렇게 니콜라이에게서 멀어져갔다.
니콜라이의 명령이 떨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여봐라. 황명을 거역한 엘리자벳 엠스터를 구금하라!”
***
얼음탑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일 년 내내 찬 바람이 몰아치고, 맺힌 서리가 그대로 얼음이 되는 곳.
얼음탑의 죄수가 꿈꿀 수 있는 가장 가벼운 형벌은 추방, 아니면 죽음이었다.
“나는 아무 죄 없어! 엘리자벳, 그년이 날 모함한 거야!”
쇠스랑으로 쇠붙이를 긁는 듯 음산한 목소리가 얼음탑을 뒤흔들었다.
“제발 아버지를 불러줘! 초대 황제의 보물을 바치면 날 구할 수 있다고! 아버지는 아직 모르시는 게 분명해!”
로즈가 숨을 쉴 때마다 허연 입김이 번졌다.
뼈가 아릴 만큼 추운데 화로는커녕 솜이불조차 주지 않았다.
눈물도 얼어붙을 듯한 얼음탑엔 오직 로즈와 적막뿐이었다.
오늘도 그럴 줄 알았다.
“목청 보니 생각보다 잘 지내는 것 같군요.”
청아한 목소리에 로즈는 귀를 의심했다.
상아색 후드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환청도, 환각도 아니었다.
간수가 아닌 사람을 보는 게 얼마 만일까?
로즈가 철창 가까이로 기어갔다.
“다, 당신은……!”
“쉿. 조용히 하세요. 제가 여기 온 건 비밀이니까요.”
여인이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로즈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 그릇을 돌바닥에 내려놓았다.
딱딱하게 굳은 빵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던 로즈의 눈이 뒤집혔다.
“제게 주려고 가져온 건가요?”
“물론이죠.”
“아아. 정말 고마워요! 당신만은 날 저버리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랬나요?”
“전부터 친해지고 싶었어요. 당신은 4대 명문가 황비들 중에서 제일……!”
“비밀이라고 했는데. 목소리가 너무 커요.”
후드를 쓴 여인이 차갑게 말했다.
심지어 수프 그릇을 뒤로 끌어당겼다.
요동치는 배를 움켜쥐고 로즈가 사정했다.
“잘못했어요. 뭐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가장 부유하고, 가장 오만하던 로즈 황비가 수프 한 그릇에 이렇게 되다니. 친구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보기 괴롭군요.”
“다 엘리자벳 때문이에요. 그 악녀가 저를!”
“맞아요. 당신 오라비를 죽인 것도 그 여자예요.”
“누, 누가 죽었다고요?”
“아직 몰랐나요? 시몬 경이 결투 중에 사망했다는 걸.”
안타까운 척하지만, 여인의 목소리에는 비릿한 조소가 숨어 있었다.
로즈는 그녀의 조롱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말도 믿을 수 없었다.
“폐하께서 우리 가문을 버리셨군요!”
“브렌든 후작은 악녀와 폭군을 죽여야 한다고 난리세요. 황비였던 딸과 후계자를 모두 잃었으니 그럴 수밖에요.”
“폐하를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저에게는 오직 폐하뿐이었다고요!”
“어쩔 수 없죠. 당신이 엘리자벳을 건드렸으니까요.”
“엘리자벳. 그 계집이……!”
로즈의 핏발 선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돌바닥을 긁는 손톱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인이 물었다.
“복수할 수 있다면 어쩔래요?”
“얼음탑에 갇힌 내가 뭘 할 수 있는데요?”
“잘 생각해 봐요. 여기서 나가면 뭘 할 수 있는지.”
“……!”
“폐하의 허락 없이 얼음탑에 올 수 있는 건 나뿐이에요. 당신을 여기에서 풀어줄 사람도요.”
로즈는 얼굴을 감춘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어떻게 황명을 거스를 수 있었을까?
귀족원장과 신관의 면회도 거절당했는데?
간수들은 어디 갔을까?
‘원래 이런 여자였나? 지금까지의 모습은 모두 연출이었다고? 왜 나를 돕겠다는 거지?’
후궁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검은 기운이 여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팔뚝의 소름을 문지르며 로즈가 어깨를 움츠렸다.
“날 이용하려고 찾아온 거야? 남의 손으로 엘리자벳을 처리하려고?”
“빨리도 깨달았네요. 그래서 싫어요?”
“이게 네 진짜 모습이었다니!”
“당신에겐 선택지가 없어요, 로즈.”
여인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었다.
“모두를 속인 주제에 황후를 노리는 것이냐?”
“하트만의 심장은 나처럼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 해요.”
“너 같은 게 황후가 되면 제국은 망할 거야! 너는 엘리자벳보다 더한 악녀가 될 거라고!”
묵묵히 듣고 있던 여인이 발끝으로 수프 그릇을 넘어뜨렸다.
“안 돼!”
로즈가 뒤늦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차가운 돌바닥 사이로 수프가 스며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말조심해야 하지 않아요? 복수의 기회를 주려는 은인에게.”
“너……!”
“엘리자벳을 죽이면 국외로 도망칠 수 있게 주선해드리죠.”
“지, 진짜야?”
“복수도 하고, 인생도 구하고. 당신에겐 더없이 좋은 조건 아닌가요?”
“자객을 고용할 수도 있는데, 왜 얼음탑에 갇힌 날 직접 찾아온 거지?”
로즈는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간절함만이 기적을 만들어내거든요.”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당신 같은 사람은 영원히 모를 거예요. 후훗.”
비밀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만 가봐야겠어요. 여기서 이렇게 얼어 죽을 건지, 당신 가문을 망가뜨린 여자를 죽일 건지 결정해요.”
“널 어떻게 믿어? 지금까지 모두를 철저히 속였으면서!”
여인이 철창을 손가락질했다.
굳게 잠겨 있었던 자물쇠가 풀려 있었다.
로즈의 귓가로 은밀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엘리자벳은 삼엄한 보호를 받고 있어요. 그녀를 죽일 수 있는 건 최측근뿐이에요.”
“?”
“당신 시녀, 니사를 이용해요. 당신을 버린 후 엘리자벳의 개가 된.”
***
카나리아 방에 갇힌 지 꼬박 사흘이 흘렀다.
턱을 괴고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오늘따라 호랑가시나무 울타리가 빽빽하고 울창해 보였다.
매일 보던 풍경이 삭막하고 처량했다.
라일라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엘리자벳 님. 거기 계세요?”
울타리 너머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퍼뜩 주위를 살펴봤다.
“니사? 면회 금지인데 어떻게 왔어?”
“황태자 전하께서 개구멍을 알려주셨어요. 제가 사용하기엔 좀 좁지만요.”
“전하께서는 건강하셔?”
“무척 건강하세요. 자기 때문에 엘리자벳 님이 고초를 당하신다고 자책하고 계세요. 엘리자벳 님을 구하겠다고 한바탕 난리법석을 부리셨어요.”
“그러지 마시라고 전해줘. 다 잘될 거라고.”
“한동안은 잠잠하실 거예요. 폐하께서 출입 금지를 명하셨거든요.”
결국 그렇게 됐구나.
쓴웃음을 삼키며 대꾸했다.
“난동을 피울 정도면 건강은 좋아졌나 보네.”
“엘리자벳 님. 상황이 좀 심각해요.”
“자세히 알려줘.”
“이런 말씀 올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예상하고 있으니까 숨기지 말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니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엘리자벳 님을 가뒀다고 다들 기뻐하고 있어요. 처벌 수위가 약하다는 불평도 있지만요.”
“내게 어떤 죄를 씌우려는 거지?”
“……황태자 전하 시해 혐의입니다.”
왜 아니겠는가.
뻔한 결과였지만 가슴 위에 돌을 얹은 것처럼 답답했다.
“명문가 귀족들이 쾌재를 부르며 날뛰었겠군.”
“중독사건도 엘리자벳 님이 꾸민 일로 몰아가는 분위기예요.”
“내가 전하를 중독시키고, 영웅 노릇을 했다? 덕분에 교육담당관 자리를 꿰찼고?”
“맞아요.”
아무도 모라신시아의 신물에 대해서는 몰랐다.
모든 병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 힘이 내게 주어졌다는 것도.
니콜라이도 날 의심했다.
내 꼬투리를 잡으려는 귀족들이 그 부자연스러움을 놓칠 리 없었다.
“유죄를 받으면 최소 교수형이겠네.”
“폐하께서 엘리자벳 님을 저버리실 리는 없어요. 이번 황태자 전하 일로 잠시 노여워하시는 것뿐일 거예요.”
“으응?”
“용서받을 때까지 조금만 참으세요. 엘리자벳 님이 무고하다는 걸 곧 깨달으실 테니까요.”
니사도 오해한 거야?
내가 처벌을 받는 거라고?
‘니콜라이가 날 붙잡으려고 가뒀다는 건 모르는구나. 잘하면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겠어.’
이 문제를 풀 해법이 떠올랐다.
당분간 비밀에 부쳐야 했다.
그래야 안전했다.
“너무 기대하지 마, 니사. 나는 폐하께 버림받았으니까.”
쓸쓸한 목소리를 쥐어짰다.
니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께서도 지치실 만해. 국정 운영 부담도 크셨을 거야.”
“하지만 폐하께서는 엘리자벳 님을 사랑하시잖아요?”
타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걸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니콜라이가 날 사랑한다고?
‘니콜라이는 사랑 같은 것 하지 않아. 자신을 거역하는 날 용납 못 하는 것일 뿐. 자기의 것이 도망치려는 걸 막았을 뿐이야. ’
심장 한쪽이 무너져내린 것처럼 쓰라렸다.
눈꺼풀 안쪽이 뜨끈해지면서 콧잔등이 매웠다.
하지만, 눈물이나 흘릴 때가 아니었다.
“니사. 마지막 부탁 하나 들어줄래?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