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모든 것을 고백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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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모든 것을 고백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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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모든 것을 고백하겠노라
2023.04.11.
“마지막 부탁이라니요? 그런 말씀 하실 거면 돌아갈래요.”
상처받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니사가 정말 떠나버릴까 봐 다급히 말했다.
“난 폐하께서 버림받았어. 내 곁에 있어 봤자 득 될 게 없다고.”
“저는 끝까지 엘리자벳 님 곁에 있을 거예요.”
“고집 피우지 마, 니사.”
“저는 폐하의 총애를 받는 여인을 주인으로 선택한 게 아니에요. 엘리자벳이란 사람을 선택한 거예요.”
“니사…….”
“또다시 주인을 바꾸는 일은 제게 없어요. 그러니 무슨 말씀을 하셔도 소용없어요.”
처음엔 니사가 도박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미래를 함께할 동료를 고른 거였다.
나라는 사람을 알아보고, 선택해주었다.
그런 니사를 속여야 한다는 죄책감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네 마음에 반드시 보답할게. 이 순간을 용서해주길…….’
속엣말을 주워섬긴 후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난 폐하의 아내도 아니잖아.”
“…….”
“나도 폐하께 지쳤어.”
정말 지친 걸까.
계산된 말이었을 뿐인데 심장이 짓밟힌 듯 욱신거렸다.
그의 유일한 여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늘 아팠다.
우리가 나누는 시간이 얼마나 농밀하건, 그의 눈빛이 얼마나 달콤하건.
“엘리자벳 님도 지치셨다고요?”
“전부 폐하 때문이잖아. 내가 악녀라고 손가락질당하는 동안 그분은 뭘 하셨지?”
“…….”
“날 만나주지도 않으셨지. 너도 옆에서 지켜봤잖아?”
“저도 야속하긴 했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니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만 자유로워지고 싶어. 예전의 내 모습을 되찾고 싶고.”
“사교계의 여왕으로 불리던 때로 돌아가고 싶으시다고요? 그 시절은 다 버리신 것 아니었어요?”
“황궁에 갇혀 있는 것보단 나았어. 날 보호해주지 않는 남자를 위해 고통받고 싶진 않아.”
“엘리자벳 님…….”
“얌전히 살려니까 옛날이 그립더라고. 술, 파티, 미남들 모두가!”
어색한 연기가 들통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평생 집순이로 살았는데 무슨 파티가 그립겠는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한 카멜리아 파티는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짧은 침묵 끝에 니사가 물었다.
“제가 뭘 해드리면 될까요?”
“절대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거야. 네가 해줄 일은…….”
***
“폐하. 언제까지 엘리자벳 님을 가둬두실 겁니까?”
카레스가 삐딱하게 물었다.
수북이 쌓인 서류에 집중하던 니콜라이가 눈을 위로 치켜떴다.
“아무리 둘만 있어도 그렇지. 지금 황제한테 따지는 건가?”
“정중히 여쭙는 겁니다.”
“눈빛이 지나치게 도전적이잖아? 말투도 까칠하고. 누가 보면 엘리자벳의 오라비쯤 되는 줄 알겠다.”
“오라비라니요. 당치 않으십니다.”
카레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보고도 못 믿겠다는 듯 니콜라이가 눈시울을 주물렀다.
카레스가 얼굴을 붉히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수줍은 표정은 뭐지? 징그럽게.”
“엘리자벳 님과 저는 혈연도 아니고, 이렇다 할 인연도 없습니다. 그래도 걱정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카레스가 발끈했다.
“자네가 누군가를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몹시 이상해.”
“저도 사람입니다.”
“그래. 일하는 기계에 가까운.”
“엘리자벳 님에게 호의를 느끼고, 그분의 오라비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라비처럼 뒷바라지하고 싶다는 생각 역시요.”
“그냥 해 본 말인데 뭘 그리 길게 떠들어? 진짜 수상하게.”
카레스의 귓바퀴는 여전히 붉었다.
니콜라이가 미간을 좁혔다.
카레스의 유능함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지나치게 사무적이고 냉정한 성격 탓에 좀처럼 주변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카레스가 일 외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엘리자벳뿐이었다.
‘처음엔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했어.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달라졌지. 엘리자벳의 매력 때문인가? 카레스에게 통했다는 것도 의심스러운데.’
니콜라이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카레스가 대화를 돌렸다.
“폐하야말로 수상하십니다. 언제까지 엘리자벳 님을 죄수 취급하실 겁니까?”
“알지 않느냐? 내가 그녀를 놓칠 수 없다는 걸.”
“폐하께서 엘리자벳 님을 버렸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언제부터 자네가 허튼 소문 따위에 귀를 기울였지?”
“소문은 여론이 됩니다. 여론은 종종 진실의 탈을 쓰지요. 황제의 사생활처럼 내밀한 이야기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니콜라이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관심 없는 척했지만, 엘리자벳에 관한 모든 소문을 빠짐없이 보고받고 있었다.
“엘리자벳 님이 폐하께 질려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질려?”
“어느 여인이 버티겠습니까? 자신을 변호해주지도 않고, 지켜주지도 않는 남자를.”
“…….”
“엘리자벳 님처럼 특별한 여인이라면 더 그렇겠지요.”
엘리자벳은 뭇 사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여인이었다.
그녀 주위엔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흘러넘쳤다.
꽃 주위에 몰려드는 벌떼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니콜라이의 입가가 팽팽해졌다.
‘예전에도 지금처럼 어여뻤겠지. 선홍빛 머리칼을 흩날리며 미소를 지으면 어떤 사내라도 넋이 빠졌겠지.’
손등의 핏줄이 불거졌다.
과거의 일이지만, 엘리자벳을 탐욕스런 눈으로 바라봤던 이들을 모조리 찾아서 없애버리고 싶었다.
피어오르는 살의를 가다듬기조차 쉽지 않았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인가.
니콜라이는 무엇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자벳을 구속했다.
이유도 알려주지 못했다.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는 원초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제멋대로 그녀의 삶을 휘둘렀다.
사랑 같은 것, 평생 하지 말라던 부황의 유언이 다시금 뇌리를 스쳤다.
“엘리자벳을 처형해야 한다는 여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나 때문이라는 건가?”
“폐하의 침묵엔 여러 해석이 따르니까요.”
“저승꽃에 대해 발설할 수는 없다.”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습니다.”
“…….”
“아칸소 추기경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녀가 모라신시아의 신물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요.”
“……내가 자네에게 그 이야기를 했던가?”
니콜라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카레스가 입을 다물었다.
니콜라이는 아칸소와 독대했다.
평소라면 카레스를 대동했겠지만, 아칸소가 주변을 물리치길 요청한 까닭이었다.
불안인지, 의심인지.
그도 아니면 두려움인지.
뭐라 단정 짓기 어려운 감각이 뒷덜미를 그러쥐었다.
“카레스. 대답하라.”
카레스는 니콜라이가 황태자 시절부터 믿고 의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믿음을 나눈 친구였고, 함께 고된 일을 처리하는 동료였다.
온갖 정치와 술수가 난무하는 황궁에서 늘 쓰디쓴 충언을 아끼지 않는 신하이자, 제 등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형제였다.
‘만일 카레스가 나를 배신한다면…….’
니콜라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내장이 찢기는 것 같았다.
카레스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참혹한 추측이 니콜라이를 찔렀다.
“왜 정색을 하십니까? 폐하의 잠꼬대를 들었을 뿐입니다.”
“……내가 잠꼬대를?”
“전부터 말씀 올리고 싶었습니다. 집무실에서 졸지 마십시오.”
“졸았다고?”
“저 말고 다른 이가 들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꼬장꼬장한 가정교사처럼 카레스가 잔소리했다.
정말 잠꼬대였을까?
아니면 형편없는 변명일까?
한번 피어오른 의심의 불꽃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 다시금 확인했다.
카레스가 무슨 대답을 내놓더라도 믿고 싶었다.
그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그마저 없다면 너무 외로울 것 같아서.
이성은 차갑게 니콜라이를 꾸짖었다.
‘카레스는 모든 극비를 안다. 워든의 마수가 카레스에게 뻗쳤다면 제국은 위태롭다. 뒷조사를 시작해, 니콜라이.’
카레스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카레스는 니콜라이에게 그런 존재였다.
엘리자벳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곁에 두어야만 하는 존재.
오랜 고민이 끝났다.
“엘리자벳이 신물을 가졌는지 확인해야 한다. 아칸소가 왜 그녀에게 신탁을 전하려 했는지도.”
“엘리자벳 님께서 순순히 대답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숨겨온 이유가 있을 텐데요.”
“나도 말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 숨겨야만 했던 이유도 있었고.”
“전부 고백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렇다.”
‘모든 걸 고백하리라. 저승꽃도, 늑대도, 내가 수행했던 임무와 부황의 유언도. 그 무엇보다 엘리자벳을 원하는 내 마음을 고백하고 싶다.’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할지 까마득했다.
너무 늦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일단 진짜 바람둥이가 아니란 사실부터 분명히 해야 했다.
수많은 황비가 있지만 단 한 번도 안은 적 없다는 것을.
여자 경험이 없다는 것까지 밝혀야 할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문제 때문에 뒷골이 당겼다.
나이 28살에 동정이라니.
너무 애송이처럼 여겨졌다.
한때 사교계의 여왕벌이라 불리던 엘리자벳이라 더 그랬다.
여자 경험이 없다는 것만은 숨기면 안 될까?
몇몇 기술적인 문제는 인간의 본성이 잘 처리해주지 않을까?
‘한심하군. 고백 결심을 하자마자 거짓말부터 꾸미다니.’
처음으로 소유하고 싶었던 여인이었다.
목숨을 내준대도 아깝지 않았다.
모든 걸 팽개치고 싶은 충동도 겨우겨우 참아왔다.
평생 곁에 두고 싶은 여인도, 영원히 지켜주고 싶은 여인도 그녀 하나뿐이었다.
엘리자벳의 향한 욕심이 불끈 솟아오를 때마다 이를 갈았다.
들불처럼 번지는 욕망도 끊어냈다.
그녀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그녀를 위해 참아야 한다고 되뇌었다.
‘엘리자벳이 떠난다고 했을 때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그녀를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엘리자벳을 붙잡을 방법이 무얼까?
그녀가 가장 걱정했던 것이 무엇이지?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모든 걸 털어놓고, 그녀에게 청혼하겠다.”
니콜라이가 선언했다.
카레스가 눈을 크게 떴다.
“청혼이라고요? 설마……!”
“엘리자벳 엠스터를 하트만 제국의 황후에 봉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