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삼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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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삼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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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삼각관계
2023.04.14.
니콜라이가 카나리아 방에 도착했다.
뭔가 크게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모조리 쓰러져 있었다.
죽거나 다친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빈 술병, 육포, 비스킷.
맥없이 덜렁거리는 자물쇠.
심장이 쿵 주저앉았다.
“엘리자벳?”
다급히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어디에도 엘리자벳은 없었다.
눈부시게 빛나던 미소도.
새초롬하게 오물거리던 입술도.
매번 니콜라이를 미치게 하던 체리블로섬 향기도.
모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떠난 것인가……?’
내디딘 바닥이 아래로 꺼지는 듯했다.
숨을 들이마실 수도 내쉴 수도 없었다.
말아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방법까지 써서 날 벗어나겠다고?’
니콜라이의 청록색 눈동자에서 가다듬어지지 않은 살기가 쏘아져 나왔다.
서러움이 휘몰아쳤다.
버림받았다는 현실에 까마득한 현기증마저 밀어닥쳤다.
황제의 노여움을 눈치챈 기사단장이 부하들을 장화로 걷어찼다.
“이놈들! 썩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기사와 병사들이 눈을 끔뻑거렸다.
얼떨떨한 면면들을 노려보며 니콜라이가 읊조렸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하라.”
높낮이 없는, 서릿발 같은 어조였다.
기사들이 튕기듯 일어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니콜라이에게서 피어오르는 흉포한 기운에 술기운을 잊은 모양이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엘리자벳은 어디 있느냐?”
“안에 안 계십니까? 이런……!”
기사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기사단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희들의 목숨은 이제 끝이라는 뜻 같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기사들이 하나둘 변명을 늘어놓았다.
“엘리자벳 님께서 술을 원하셨습니다. 금화를 잔뜩 주시며 제일 좋은 술을 종류별로 사다 달라고요.”
“종자를 시켜 최고급 술을 스무 병 사 왔습니다. 술병은 배식구에 들어가지 않아서 잠깐 자물쇠를 풀었습니다.”
“술맛을 보시더니 전부 쏟아버리라 하셨습니다. 맛이 형편없다고요. 비싼 술이라며 아까워하니, 저희보고 마시라고…….”
기사단장이 화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근무 중에 술을 마셨단 말이냐?!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저희도 왜 마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소리들 집어치워라. 끝까지 책임을 돌릴 생각이냐?”
사색이 된 기사들이 니콜라이의 눈치를 보며 답했다.
“송구합니다만, 엘리자벳 님께서 뒷일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속은 것뿐이라고 폐하께 말씀 올리라 하셨습니다. 죽여주십시오, 폐하!”
처음부터 끝까지 엘리자벳의 계략이었다.
그 무심한 카레스마저 제 편으로 만든 그녀였다.
매혹적인 향기로 니콜라이마저 무너뜨렸다.
그녀가 기사들을 유혹하는 건 어린애 손목 비틀기보다 간단했다.
“폐하. 엘리자벳 님께서 서신을 남기셨습니다!”
니콜라이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참고 참았던 신음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폐하.
처음부터 끝까지 저 혼자 꾸민 일이에요.
시녀, 호위 기사, 병사, 종자, 주류업자 등등.
모두 저에게 이용당했을 뿐입니다.
저를 벌하세요.
죄 없는 자들은 부디 용서해주세요.
이렇게 떠나야만 하는 절 이해하기 힘드시겠지요?
밖에서 꼭 처리할 일이 있어요.
반드시 제 손으로 하고 싶어요.
훗날 전부 설명해드릴게요.
폐하께서 기회를 주신다면요.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진짜 범죄자로 몰리게 될 거예요.
죄가 들통나서 도주한 것으로 보일 테니까요.
그들이 승리했다고 믿게 해주세요.
그래야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어요.
폐하께서 잘 처리해주실 거라 믿어요.
이 탈주가 헛되지 않도록요.
도망치면서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좀 이상하지만…….
황궁 경비가 몹시 허술해요.
기사단장을 교체하고, 경비 체계를 정비해주세요.
특히 황태자궁을요.
마지막으로 프란츠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 건강하라고요.
보고 싶을 거예요.
어쩌면 아주 많이요.
-엘리자벳 올림.
***
어둠이 깔린 숲에서 황궁을 돌아봤다.
첨탑 뒤에 걸린 달이 오늘따라 창백해 보했다.
니콜라이의 아름다운 얼굴은 그보다 더 창백할 터였다.
‘편지 읽었을까? 많이 놀랐겠지. 어쩌면 용서해주지 않을지도 몰라. 영원히…….’
발밑이 컴컴했다.
내 앞날도 마찬가지였다.
적은 질기고, 강했다.
문득 추웠다.
더글라스가 내 어깨에 두툼한 숄을 덮어줬다.
“엘리자벳. 괜찮습니까?”
“더글라스 님이야말로 괜찮으시겠어요? 도망자를 돕는 건 중죄인데.”
“친우와 산책을 나왔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무섭게 추궁하실 거예요.”
“오히려 감사하지요.”
“네?”
“폐하 덕분에 엘리자벳을 도울 수 있으니까요.”
더글라스가 미소 지었다.
달빛처럼 은은하지만, 어둠을 몰아내는 힘이 담긴 미소였다.
더글라스는 지구를 공전하는 달처럼 내 곁을 머물렀다.
가까이 다가오진 않았다.
아주 멀어지지도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내가 손 내밀기만을 기다리는 한 남자.
차마 그를 마주 볼 염치가 없었다.
“어려울 때만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어려울 때 떠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더글라스 님의 호의를 이용하고 있어요.”
“이용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면 너무 바보 같을까요?”
더글라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해맑고 순수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네. 진짜 바보 같아요.”
“그런 말 가끔 듣습니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오늘은 달이 밝고, 공기도 청명하군요. 좋은 날 엘리자벳과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게 정말 즐겁습니다.”
“잠시 즐기는 것도 좋겠네요. 내일이면 추격대가 쫓아올 테니까요.”
팔꿈치로 더글라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날 바라보는 더글라스의 눈빛이 순간 달아올랐다.
달그림자를 벗어나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고픈 소년처럼.
“도망치는 동안은 우린 함께이겠지요?”
“더글라스 님.”
“전 약혼자도, 친구라도. 그냥 아무라도 좋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도 좋고요.”
“…….”
“최대한 멀리. 함께 도망칩시다.”
더글라스가 내 손을 가만히 붙잡았다.
어린 아기 다루듯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두려움 섞인 머뭇거림도 느껴졌다.
그러나 뜨거웠다.
얼마나 뜨거운지,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더글라스의 손을 뿌리치지 못한 건, 역설적으로 니콜라이 때문이었다.
‘니콜라이의 손이 훨씬 두껍고 거칠어. 아플 만큼 세게 움켜쥘 때도 많았지.’
이 순간에도 니콜라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손을, 체온을, 체취를 곱씹었다.
그것이 두 남자 모두에게 상처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기울어가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필요에 따라 더글라스를 이용하는 나.
말없이 날 도와주는 더글라스.
나의 빈자리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는 니콜라이.
우리 세 사람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내가 니콜라이를 포기한다면?
더글라스가 내민 손을 맞잡는다면?
모두 반듯하고 깔끔하게 정리되는 건 아닐까.
마음이란 게 왜 이리 마음대로 안 되는 건지.
연심이 뭐기에.
사랑이 뭐기에.
왜 곧게 뻗은 길을 외면하고 거친 오솔길을 찾아가는 걸까.
“폐하 때문입니까?”
더글라스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쓸쓸함이 더욱 도드라졌다.
양심이 아닌 심장을 찔렸다.
왠지 모를 열기가 가슴에 퍼졌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엘리자벳 엠스터에겐 악녀라는 낙인이 찍힐 겁니다. 폐하께서는 연인조차 용서치 않는 공명한 황제라 추앙받으시겠지요.”
“답답해서 탈출한 거예요. 절 모함하는 놈들을 직접 잡아내려고요.”
“폐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요?”
“더글라스 님은 저를 너무 높이 평가하세요. 부끄러울 만큼요.”
“엘리자벳은 비밀이 많으시지요. 안타까울 만큼.”
비밀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더글라스의 갈색 눈은 여전히 깊고 유순했다.
그 눈동자에 담긴 낯선 열기를 놓치지 않았다.
‘뭔가 눈치를 챈 걸까? 원작 엘리자벳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잖아? 클라우디아에게 내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몰라.’
더글라스는 나를 가장 먼저 ‘엘리자벳’으로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변치 않는 애정으로 지탱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성가시고 껄끄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더글라스가 아니었다면 이 세계에 적응하는데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거였다.
더글라스에게 의심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처량함이 밀려들었다.
이 또한 이기적인 마음이겠지만.
시선을 발끝에 떨어뜨린 날 향해 더글라스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엘리자벳의 비밀도 좋아합니다.”
“더글라스 님?”
“무슨 비밀이든 상관없습니다. 엘리자벳은 그냥 엘리자벳이니까요.”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더운 숨결.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그래서 더 시리고 아프던 응어리를 아는 걸까.
이 순간 그의 품에 기대고 싶은 마음 또한.
‘내 모든 걸 이해해주고 아껴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어. 그런 남자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어. 더글라스가 내가 꿈꾸던 사람인데 왜 니콜라이가 미치도록 보고 싶을까.’
자기가 오만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남자.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남자.
그래서 늘 불안하게 하는 남자.
날 아프게 하는 남자.
왜 나는 그가 아니면 안 되는 걸까.
이런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가슴이 젖어 들었다.
“가요, 그만. 추격대가 벌써 움직였을지도 몰라요.”
또다시 더글라스를 밀어냈다.
더글라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부서질 듯 위태로운 미소를 지을 순 없으리라.
“걱정하지 마세요, 엘리자벳. 지금쯤 그 사람도 움직이기 시작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