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폭군과 최강 여기사의 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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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폭군과 최강 여기사의 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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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폭군과 최강 여기사의 밀담
2023.04.18.
잠시 잊고 있었다.
더글라스의 마음을 받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
평생 더글라스만을 바라봤던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의 최애, 클라우디아.
그녀는 나 때문에 갇혔다.
갇힌 동안에는 혁명을 도모할 수 없었다.
찌를 듯한 죄책감과 복잡한 안도감이 동시에 날 헝클어놓았다.
“니사가 무사히 편지를 전달했겠지요. 클라우디아 경이 제 말에 귀 기울여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고집이 세긴 해도 우매한 사람은 아닙니다. 엘리자벳의 진심을 알아줄 겁니다.”
“그러길 빌어요.”
탈출은 간단했다.
돈과 마성만 있다면 더 쉬웠다.
카나리아 방에서 멍하니 신세 한탄만 했던 건 아니었다.
어느 때보다 냉철한 머리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나는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미지 손상과 도망자 신분을 감수하고 꾸민 일이야.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쳤고. 나도 보상을 얻어야지. 적어도 열 배 이상은.’
탈출하기 전 세 통의 편지를 썼다.
하나는 니콜라이에게.
다른 하나는 더글라스에게.
마지막은 클라우디아에게 보냈다.
황궁 곳곳에 인맥이 닿는 니사라면 안전하게 편지를 전하리라 믿었다.
편지 탓에 클라우디아가 큰 고민에 휩싸였다는 걸 몰랐다.
니콜라이의 집착이 내 상상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것 역시.
***
엘리자벳의 편지를 받은 후 클라우디아는 명상에 집중하지 못했다.
보물로 여기는 『제국의 붉은 별』 초판본이 있었다면 좋으련만.
결투장에서 바로 끌려오는 통에 더글라스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이 괴로웠다.
잡생각을 쫓으려고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몇 번이나 읽어봤지만,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엘리자벳의 껍데기를 쓴 비밀스러운 여인.
이 편지 또한 어떤 계략이 숨어 있는 걸까?
-클라우디아 님께.
클라우디아 님께서 이 편지를 읽으실 때면 저는 황궁에 없을 겁니다.
믿어주실지 모르나, 부득이 이런 방법으로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첫 번째. 저는 몇 가지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황태자 전하를 독으로 해하지 않았습니다.
자작 납치극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시해한 일도 없습니다.
이 혐의들에 대하여 저는 모두 무고합니다.
죄를 덮으려는 진범과 저를 견제하는 세력의 희생양이자 목표물이 되었을 뿐입니다.
이런 제가 폐하의 가까이에 있으면 황제의 권위가 흔들립니다.
저로 인해 폭군의 오명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진범을 밝힐 증거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물지 않아 어쭙잖게 덤빌 순 없습니다.
적은 무척 강합니다.
제가 도망치면 그들은 승리감에 도취할 테지요.
서둘러 황후를 책봉하라는 압력이 전방위로 이어질 겁니다.
패를 갈라 싸우기도 하겠지요.
아무튼 그들이 방심할 때가 옵니다.
이때를 틈타 반격할 계획입니다.
그때까지 철저히 준비를 할 겁니다.
세 번째.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훨씬 위험합니다.
특히 근위기사단의 근무 태만은 간과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대귀족과 결탁하여 이익을 좇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대적인 물갈이가 필요합니다.
저의 탈출은 누구도 항변할 수 없는 명분이 될 겁니다.
황궁 내 불순분자를 모두 색출해내야 합니다.
그것이 제국과 백성 모두를 위한 일이라 믿습니다.
송구하게도 클라우디아 님은 저의 대리인이셨습니다.
평소 클라우디아 님을 탐탁지 않게 보던 이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저와 엮어 클라우디아 님을 공격할 테고요.
어쩌면 아주 위험한 제안을 건넸을지도 모르지요.
클라우디아 님께 저도 제안합니다.
저와 손을 잡고,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제국의 앞날을 위협하는 자들을 처단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제안 또한 혁명이 아닐까요?
내부로부터의 혁명. 오직 악인들의 피만이 흐를 혁명에 함께해주십시오.
클라우디아 님이 꿈꾸는 나라를 함께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엘리자벳 올림.
***
니콜라이가 클라우디아를 구금한 방을 찾았다.
그녀의 독대 요청을 받은 지 이틀만이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군.”
“폐하의 각별한 보살핌 덕분이지요.”
“동향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적의 동향입니까, 아니면 저의 동향입니까?”
“양쪽 다지.”
니콜라이가 무심하게 답했다.
필요하다면 더 가둘 수 있다는 뜻이었다.
숨은 뜻을 눈치챘음에도 클라우디아는 고요했다.
“엘리자벳을 쫓고 계십니까?”
“갇혀 있으면서 소문이 빠르군.”
“황궁이 발칵 뒤집혔으니까요.”
“기마병 20명씩 5개 조를 편성했다. 최정예 기사들이 그들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성과가 없군요?”
니콜라이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클라우디아가 니콜라이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황제의 허락 없이 시선을 맞추다니.
도전적이고도 무례한, 자칫 죽을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시리도록 맑은 푸른 눈엔 굽히지 않는 기개와 자부심이 담겨있었다.
주군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충성심이나 경외감은 없었다.
이상하게도 니콜라이는 그녀의 그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제국 제일검에게 충성심이 없다는 건 경계할 일이지만……. 허튼수작이나 부릴 사람은 아니로군.’
클라우디아를 만나고 싶었다.
엘리자벳 때문이었다.
엘리자벳은 ‘라디아’라 부르는 인물을 몹시 두려워했다.
조사해보니, 엘리자벳과 클라우디아는 애칭을 부를 만큼 가깝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증오하는 듯 보였다.
엘리자벳은 검투 대리인으로 굳이 클라우디아를 지목했다.
반짝반짝 빛나던 한 쌍의 검은 눈동자를 기억한다.
장밋빛으로 달아오른 뺨도.
엘리자벳은 꿈속 왕자님을 만난 소녀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니콜라이는 여인에게도 질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엘리자벳은 누군가의 조력을 받고 있을 겁니다.”
“그대의 친우인 더글라스가 사라졌다.”
“그렇군요.”
“어찌 놀라지 않는가?”
“그의 성품을 잘 아니까요.”
클라우디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처음으로 내보인 감정이었다.
문득 클라우디아에겐 더글라스가 친우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최강의 기사와 소설가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미묘하게 흔들리는 클라우디아의 눈동자가 익숙했다.
거울 속 자신을 마주 보듯.
“도주 방조 및 협조는 최소 5년 형이다. 북부 탄광으로 추방당할 수도 있다.”
“진짜 범죄자를 도왔다면 그렇지요.”
“엘리자벳이 무고하다고 믿는 건가?”
“저는 그녀를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냥꾼을 가지고 노는 여우만큼 똑똑하다는 건 압니다.”
“권력에 눈먼 돼지들보다 훨씬 영리한 편이지.”
니콜라이가 낮게 웃었다.
클라우디아가 의외라는 투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연인이라 불리던 여인이 탈주했는데?”
“군대라도 일으켜 제국을 피바다로 만들 거로 생각하는가?”
“송구합니다.”
“송구할 것 없다. 스스로 놀랄 만큼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경은 보기보다 호기심이 많군.”
“진실을 탐하는 자, 어찌 물음을 아끼겠습니까?”
진실이란 말이지.
니콜라이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클라우디아에겐 엘리자벳이나 카레스와는 다른 솔직함이 있었다.
예법에는 어긋나지만 시원하고 명쾌했다.
황제라고 무조건 조아리지도 않았다.
사람 대 사람.
그것이 불쾌하지 않으니 기이한 일이었다.
‘나는 대체로 무례한 여인에게 끌리는 건가? 클라우디아가 여인으로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니콜라이가 냉소를 삼켰다.
클라우디아가 말했다.
“폐하와 협의 후 탈주한 것은 아니군요.”
“알았다면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
“엘리자벳은 내게 돌아오겠노라고 했다.”
니콜라이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마지막으로 프란츠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 건강하라고요.
죄송해요.
보고 싶을 거예요.
어쩌면 아주 많이요.」
그 구절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성을 잃었을 거였다.
엘리자벳을 놓친 기사들부터 도륙했겠지.
시녀와 문지기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더글라스와 그의 가문 만큼은 짓이겨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날 그리워하고 있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잠시 떠나려 하는 것뿐이다.”
“그녀를 믿으십니까?”
“약조한 것을 어기는 여인이 아니다.”
“…….”
“나 역시 내 여인을 의심하는 남자가 아니다. 엘리자벳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마음은 없다만.”
“직접 추적하시겠군요.”
“추적이 아니라, 마중이다.”
클라우디아의 푸른 눈이 잠시 커다래졌다.
뭔가 깨달은 것일까.
그녀가 감탄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흘렸다.
“폐하께서는 엘리자벳을 진심으로…….”
클라우디아가 맺지 못한 말을 니콜라이가 완성했다.
“연모한다.”
클라우디아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유쾌했다.
“진실을 원한다니 들려주마. 니콜라이 롭 예브레이는 엘리자벳 엠스터를 온 마음 다해 연모한다. 한 남자로서. 한 여인을.”
연모라는 말이 입술 사이로 빠져나갈 때,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엘리자벳을 향한 그리움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온몸을 휘저었다.
왜 지금까지 숨겨왔을까.
어쩌자고 머뭇거렸을까.
그녀를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으면서.
그 무엇도 아깝지 않으면서.
“그대에게 처음으로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미리 연습해두는 것도 괜찮겠지. 답이 되었는가?”
“……예.”
“나머지는 알아서 판단하라.”
“황공하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대에게 명할 것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클라우디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니콜라이도 황제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녀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니었다.
그러나 책무를 등한시하고, 권력자에게 빌붙어 모사를 꾀하는 버러지들과는 달랐다.
무엇도 벨 수 있는 최고의 검을 향해 니콜라이가 말했다.
“클라우디아 로즈로이스를 황실 근위 기사단장에 보임한다. 즉시 부임하라.”
***
사방에 추격대가 깔렸다.
나와 더글라스는 최대한 빨리 제도를 벗어나기로 했다.
더글라스가 구한 임대 마차가 좌우로 흔들렸다.
어쩐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제 초상화가 거리마다 붙을 거예요. 현상금도 잔뜩 걸리겠죠.”
“그렇다면 제 초상화도 나란히 걸리겠군요. 제 현상금은 얼마나 할까요?”
“높으면 좋겠네요. 형편이 궁해지면 더글라스 님을 팔아넘기게요.”
“저도 당하고만 있겠습니까. 주범은 엘리자벳인데요.”
더글라스는 마부처럼 허름한 옷을 입었다.
나도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고 검은 바지와 짙은 갈색 재킷을 걸쳤다.
내 눈에만 소년처럼 보이는 걸까?
눈에 띄는 새빨간 머리는 돌돌 말아 헌팅캡 안에 감췄다.
헌팅캡을 쓸 때마다 내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걸, 더글라스는 몰랐으면 했다.
그에겐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좁은 마차에서 더글라스의 시선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엘리자벳.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더글라스가 바짝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체취가 너무 가깝고, 또 익숙해진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