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황제는 진짜 바람둥인가?
(67/97)
67. 황제는 진짜 바람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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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황제는 진짜 바람둥인가?
2023.04.21.
잉크와 종이 냄새가 섞인 포근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반사적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새삼 더글라스를 바라봤다.
남루한 옷도 더글라스의 청아한 미모를 가릴 수 없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핑크빛 머리칼은 솜사탕보다 달콤해 보였다.
‘한번 만져보고 싶어. 정말 부드러울 것 같아…….’
순간 아차, 싶었다.
남자를 만지고 싶다니?
내게 원작 엘리자벳의 바람기가 스며든 걸까?
‘동방예의지국 출신의 처자가 이 무슨 괴상한 생각을!’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뺨을 찰싹 때렸다.
깜짝 놀란 더글라스가 걱정을 담아 물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엘리자벳?”
“잡귀를 쫓은 것뿐이에요.”
“잡귀라니요?”
음란 마귀라고 아주 악독한 놈이 있답니다.
대꾸를 삼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게 있어요.”
“무리하지 마십시오. 여행은 이제 시작이니까요.”
“고마워요, 더글라스 님.”
“모자가 정말 잘 어울립니다. 남장도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더글라스가 수줍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외모 칭찬이 실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제가 아는 꼬마도 헌팅캡을 갖고 있어요.”
“황태자 전하 말씀입니까?”
“낡아빠진 모자를 보물이라 부르더라고요. 모자를 쓴 모습은 한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요.”
호랑가시나무 아래를 꼬물꼬물 기어 나오던 프란츠가 눈에 선했다.
말버릇이 참 고약했는데.
내 동생이었으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내줬을 거야.
지금쯤 니사와 빌을 들들 볶고 있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먼 옛날처럼 여겨졌다.
그리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굽이치는 그리움 그 끝에는 언제나 니콜라이가 서 있었다.
내 허리를 감싸던 큰 손과 아찔하도록 뜨거운 입술이 아직도 선연했다.
가끔 살갗이 맞닿아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만큼.
‘더글라스도 잘생겼지만, 역시 내 취향은 니콜라이야. 여자는 의리지. 암, 사랑도 의리 아니겠어?’
주먹을 불끈 쥔 내게 더글라스가 물었다.
“전하께서는 왜 모자를 쓰지 않으셨을까요?”
“카나리아 방에 새로운 주인이 생겼으니까요. 어머니의 추억이 담긴 물건인 것 같아요.”
“엘리자벳은 전하의 모친에 대해 아십니까?”
라일라.
니콜라이의 첫사랑.
어린 프란츠를 남기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여인.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건 니콜라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라일라라는 이름과 몇 년 전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아요. 워낙 비밀스러운 분이시잖아요.”
“조부께서 황궁에서 일하시던 때군요. 그즈음 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셨지요?”
“수석 치료사 제프리 님과 함께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고, 외로운 여인을 돌보고 있다고요.”
심장이 철렁했다.
더글라스에게 라일라의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또 무슨 말씀을 하셨나요?”
“신분이나 이름은 들은 적 없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직접 살피셨으니 고귀한 여인인가 보다, 했지요.”
“병을 앓고 있었나요?”
“어떤 병인지 몰라 괴로워하셨습니다. 허브를 연구하신 것도 그분을 위해서라 하셨고요.”
“그랬군요…….”
“신실한 모라신시아 신자셨기 때문에 신전에도 자주 가셨습니다. 신전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순간 모라신시아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더글라스의 할아버지가 신물을 사용했더라면…….
라일라는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도 있었다.
‘신물의 존재를 모르셨을까? 아니면 나만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왜 여신은 날 선택한 거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의로운 사망자’라는 칭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
“할아버님께서 더글라스 님처럼 다정하신 분이셨나 봐요.”
“제가 당신처럼 약학자가 되길 바라셨지요. 저는 천상 글쟁이였습니다만.”
“수잔이 뒤를 이었으니 분명 기뻐하셨을 거예요.”
“무척 자랑스러워하셨겠지요. 돌아가신 부모님도요.”
더글라스의 눈빛이 애잔해졌다.
두고 온 수잔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수잔 걱정은 하지 마세요. 황태자 전하께서 보호해주실 거예요.”
“전하께서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어요.”
더글라스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련한 눈으로 수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프란츠.
프란츠를 귀여운 어린애 취급하는 수잔.
‘사슴 남매 덕분에 네틀톤 가문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어. 수잔이 황태자비가 된다면 프란츠의 입지도 탄탄해질 거야. 황태자비를 배출한 네틀톤 가문도 5대 명문가로 옛 명성을 되찾겠지. 꼬마 신랑과 미소녀 신부라니. 무척 보고 싶은걸?’
오웬을 중심으로 한 예술인들과 젊은 귀족들의 힘이 더해진다면?
프란츠의 보양제를 만든 보리츠가 구황작물을 개발한다면?
누구도 넘보지 못할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될지도 몰랐다.
물론 두 사람에게 정략결혼을 권할 마음은 없었다.
프란츠가 니콜라이의 바람둥이 기질을 물려받았다면…….
수잔이 피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다. 그건 안 되지.
“선황께서는 황비를 두지 않으셨지요?”
“현 폐하의 모후이신 브리짓다 황후님과 폐위된 페넬로페뿐이었습니다.”
“순정파시네요. 프란츠가 아버지 말고, 할아버지를 닮았으면 좋겠어요.”
나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렸다.
‘아버지는 한 여자밖에 몰랐는데. 아들은 왜 그 모양이야? 아버지를 본받았어야지? 쯧쯧.’
“폐하께서는 왜 그리 많은 황비를 얻으신 걸까요?”
“여자를 좋아하니까 그렇죠! 제국 제일의 카사노바라고 불리시잖아요?”
팜므파탈로 이름을 날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하지만 문란한 생활을 즐기시는 분 같지는 않습니다.”
“더글라스 님이 몰라서 그래요.”
“뭘 말씀이십니까?”
“카멜리아 파티에서 처음 봤을 때, 폐하는 두 명의 여인과 엉켜 있었어요. 얼마나 낯이 뜨겁던지…….”
그때를 떠올리자 열이 확 올랐다.
손부채질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첫 키스의 강렬한 기억이 소스라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갑자기 볼일이 있다고 가버리시더니, 새로운 황비를 데려오시더라고요. 무려 한 말을 타고.”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열기가 불끈 치솟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느 황비들과는 다르다던 그 사탕발림을 온전히 믿고 싶었다.
심지어 그날 나는 니콜라이에게 몽땅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그라면 믿어줄 것 같았으니까.
“그것뿐입니까?”
“뭐가 더 있어야 해요?”
“그토록 여인을 좋아하신다면 왜 후궁을 찾지 않으시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니사와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 있었다.
「로즈 황비는 항상 투덜거렸어요. 황비가 되면 폐하의 외모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코빼기도 못 봤다고요.」
「폐하 취향이 아니었나 보지.」
「다른 황비들도 찾지 않으셨어요. 명문가 마마들은 체면 때문에 점잔빼고 있었지만……. 그 외 황비들은 불만이 많았지요. 후궁이 아니라, 감옥이라고요.」
「감옥?」
「꼼짝없이 갇힌 처지잖아요. 황제와 혼인했으니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수잔도 걱정했었어. 명문가 황비들을 제외하면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호칭만 황비지, 단체 생활하는 하녀나 다를 바 없었어요. 폐하는 왜 마마들을 잡아놓으셨을까요?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면서.」
니콜라이의 변덕 때문이라 그렇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여인을 찾느라, 관심이 멀어진 것이라고.
니사와의 대화를 곱씹을수록, 어쩌면 사탕발림이 아니었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더욱 짙어졌다.
“더글라스 님 말대로 이상하긴 하네요. 폐하는 늘 일에 파묻혀계셨거든요.”
“제가 보기에도 항상 바쁘셨습니다.”
“진짜 여인을 탐하는 분이라면 왜 그러셨을까요? 하룻밤 상대를 구하는 편이 훨씬 간단할 텐데요.”
“그 점이 의아합니다. 황비들이 자급자족한다고 해도 후궁을 유지하는 데 큰돈이 들었을 겁니다.”
더글라스가 지적했다.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문제였다.
워낙 단순한 바람둥이니까, 그러려니 했을 뿐이었다.
“여색만 밝히는 바람둥이라는 오명도 감수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건가요?”
“저도 그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설마 바람둥이의 가면을 써야만 했던 이유라도 있는 걸까?
그래서 얻는 이득이 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러운 희망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황비들은 니콜라이를 구경도 못 했을 거야. 틈만 나면 카나리아 방을 찾아왔으니까.’
첫사랑을 잃고, 한 여인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여러 여인을 떠도는 것뿐이라고, 나 역시 흘러가는 바람에 불과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잘 짜인 연극이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움이 또 다른 열꽃으로 가슴에 번졌다.
미친 듯 니콜라이가 보고 싶었다.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폐하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건가요?’
건네지 못할 질문을 삼켰다.
당장은 돌아갈 수 없었다.
니콜라이의 비밀도 묻어야 했다.
그가 무엇을 계획하는지 알지 못한 채.
***
클라우디아가 제복을 입었다.
검은 바탕에 은실 자수가 들어있었다.
팔뚝엔 황실 근위대를 상징하는 늑대 문장이 수놓아 있었다.
황궁 내에서 착검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
클라우디아는 황제의 친위대이자, 제국을 상징하는 기사단의 수장이 되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30여 명의 근위 기사들이 연무장에 늘어섰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오와 열을 맞춘 부하들을 향해 클라우디아가 읊조렸다.
“오늘부로 황실 근위대는 새로 태어난다.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놈은 모조리 벨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죽기 살기로 외쳤다.
나흘 동안 근위대 절반이 파면당했다.
나머지의 반은 감옥에 갇혔다.
스스로 도망친 자도 다수였다.
물론 사망자도 있었다.
“지금이라도 자백해라. 뇌물을 받았거나, 외부인과 내통한 자 있는가?”
“없습니다!”
“네놈 중엔 후궁에 숨어들어 폐하의 여인을 탐한 자도 있다.”
“……!”
“너희는 동료의 일탈과 나태를 막지 못한 쓰레기다. 그것만으로 목이 떨어져 마땅하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기사단에 남았다고 안도하지 마라. 후회하게 해줄 테니까.”
클라우디아의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기사들의 각 잡힌 몸이 덜덜 떨렸다.
도주하던 동료가 클라우디아의 검을 맞고 죽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훈련 시작한다. 게으름을 피우는 놈은 나와 진검 대련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단장님!”
언제 목이 잘려나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새롭게 거듭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일까?
사흘 전과 똑같은 기사들임에도 훈련에 임하는 태도는 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니콜라이가 말했다.
“기사단장이 일을 잘하는군.”
“솔직히 의외였습니다. 인테드 제도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줄 알았으니까요.”
카레스가 답했다.
니콜라이도 동의했다.
“기사단장은 명예직이니까. 은퇴를 앞둔 원로 기사가 부임하는 게 황실의 관례지.”
“백은의 여기사가 환영할 자리는 아니지요.”
“뒷조사는 해봤겠지?”
“그것이…….”
카레스가 말끝을 흐렸다.
니콜라이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고하라.”
“클라우디아 경 주위에서 수상쩍은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반역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