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 원작 여주의 최종 선택 (68/97)


#68. 원작 여주의 최종 선택
2023.04.25.



“구체적인 계획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카레스가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반역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만으로 죄스러운 듯했다.


“구체적이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들 눈에 나는 난봉꾼 아니면 폭군이 아니더냐.”

“폐하…….”

“군부의 반발은 예상했다. 인테드 제도의 방위 예산이 대폭 삭감됐으니까.”

“실질적으로 줄어든 예산은 1할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저승꽃 창궐을 대비해서 의료 시설을 늘린 탓이었지요.”

“반역하는 놈들이 그런 사정까지 곱게 살펴주겠느냐?”

니콜라이가 냉소했다.


“반역자들은 클라우디아 경이 간절했던 모양입니다. 부관 제이슨을 통해 끈질기게 설득했더군요.”

“백성들도 그녀의 영웅담을 좋아하니까.”

“클라우디아 경은 신중한 입장이었습니다. 폐하의 소환 명령을 거역했지만 말입니다.”

“그렇군.”

“비밀리에 입성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간의 행적은 알 수 없습니다.”

“제도에서 반역을 모의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냐?”

“확실한 건 없습니다만, 클라우디아 경은 위험 요소입니다.”

“…….”

“폐하께 너무 가깝지 않겠습니까?”

니콜라이가 다시 연무장으로 시선으로 돌렸다.

하늘빛이 감도는 클라우디아의 은발이 바람결에 휘날렸다.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외모.

정예 기사들을 압도하는 최강의 실력.

단호하고도 신중한 성품.

클라우디아는 권력에 찌들지 않은 고결함과 신비로움까지 가진 인물이었다.


‘나조차도 황제가 된 그녀가 궁금할 정도다.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클라우디아가 혁명을 외친다면 수많은 이들이 뒤를 따를 것이다.’

클라우디아가 지배하는 하트만 제국이라.

저승꽃만 아니라면 기쁘게 황위를 넘겼을지도 모른다.

자연인이 되어 엘리자벳과 대륙을 여행하며 사는 삶도 나쁘지 않았다.

여신의 늑대가 존재하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지만.

그래서 슬픈 꿈이지만.


“무슨 의도로 기사단장 자리를 수락했는지 의문입니다.”

“언제라도 내 목을 벨 수 있으니까.”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농담 아니다.”

“네?”

카레스가 눈썹 사이를 모았다.

니콜라이는 그날 클라우디아와 나눈 대화를 전부 옮기지 않았다.

대수로운 내용은 없었다.

카레스가 알아봤자 잔소리만 듣게 될 거였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의논할 수 있는 유일한 충신.

저승꽃과 늑대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

하지만 모든 것을 털어놓기는 어려웠다.

사소한 변화.

몇 가지 의문.

그것만으로 니콜라이는 망망대해를 떠도는 조각배가 된 기분에 사로잡혔다.


“카레스.”

“예, 폐하.”

“너를 내 유일한 친우라 생각한다.”

“황공합니다.”

“내게 형이 있다면 아마도 너 같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부끄럽습니다. 그만하십시오.”

듣기 괴로운지 카레스가 인상을 구겼다.

니콜라이가 낮게 웃었다.

외로움을 감추기 위한 허세에 불과했다.


“가끔은 괜찮지 않나?”

“괜찮지 않습니다.”

“그래도 들어라. 네게 응석을 부리고 싶을 때도 있으니.”

“조리장을 불러 경을 치겠습니다. 뭔가 잘못 드신 것 같습니다.”

등을 돌리려는 카레스를 니콜라이가 불러세웠다.


“카레스.”

최근에 나는 집무실에서 졸았던 일이 없어.

가까스로 밀어 삼킨 말을 다른 말로 덮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의 자리를 지켜주면 좋겠다.”

“무슨 일이 생긴다는 말씀입니까?”

“한바탕 소동이 있을 것이다.”

“엘리자벳 님 때문입니까? 아니면 역도들 때문입니까?”

“곧 알게 될 것이다.”

니콜라이가 알 듯 모를 듯 비밀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카레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평소답지 않으십니다. 악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시는 모양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절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엘리자벳 님을 찾아야겠군요.”

“그녀는 내 곁에 있어야 한다. 나도 그녀 곁에 있어야지. 어떤 상황이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추격대를 증편하겠습니다.”

“소용없겠지만 허가한다.”

니콜라이를 바라보는 카레스의 눈동자에 기묘한 빛이 스몄다.

절 탐색하는 충신을 바라보며 입 안쪽 여린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대체 카레스에게 생긴 이 변화가 무얼까.

황후 책봉에 대해서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너 역시 잃고 싶지 않다, 카레스. 지금처럼 내 곁에 있어 주길. 온전히 믿고 모든 걸 말하지 못한 날 이해해주길.’

 

 

***

클라우디아는 새로운 숙소로 옮겼다.

넓은 집무실과 응접실, 침실, 욕실이 딸린 공간이었다.

며칠 전까지 구금되어 있던 형편을 생각하면 파격 대우였다.

황궁 인근에 저택도 주어졌으나 그녀는 황궁에만 머물렀다.

침대 밑에 『제국의 붉은 별』 초판본이 든 상자를 밀어 넣었다.

이제야 조금 자리를 잡은 기분이었다.


‘할 일이 산더미군. 엘리자벳 말대로 황실 기사단은 썩을 대로 썩었어.’

클라우디아가 존경했던 전임 기사단장은 4대 명문가 당주들의 하수인이나 다름없었다.

뒷돈을 받고 정보를 빼돌렸다.

회계장부를 조작했다.

예산을 착복하느라 훈련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연히 궁성 경비는 허술했다.

특히 황태자 궁은 칼을 든 멍청이들의 집합소에 불과했다.


‘엘리자벳이 사용인들을 물갈이하지 않았다면 필시 중차대한 사건이 벌어졌을 것이다. 세력이 없다지만 황실의 유일한 자손이거늘…….’

프란츠는 황태자이자, 보호받아 마땅한 어린아이였다.

황실에 충성하지 않더라도 명예를 아는 기사라면 프란츠를 지켜야 했다.

으드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최종 책임은 니콜라이에게 있었다.

수하들의 농간을 눈치채지 못한 것 또한 무능이었다.

니콜라이를 향한 반발심을 지우고 책으로 눈을 돌렸다.

소장용을 따로 두고 독서용으로 구매했던 『제국의 붉은 별』 2권이었다.

책장이 닳도록 읽었지만 여전히 재미있었다.

이 문장을 쓰는 더글라스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두 뺨이 달아올랐다.

더글라스의 책은 클라우디아의 유일하고도 은밀한 취미였다.

그것도 잠시, 클라우디아가 조용히 책을 덮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등장한 탓이었다.


“하루빨리 거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단장님.”

부관 제이슨이었다.

클라우디아가 대답했다.


“주둔지에서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부관이 상관의 명령을 어겼다.

근위대의 칼 든 멍청이들은 또다시 외부인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


‘훈련 강도가 아직 모자라군. 죽기 직전까지 굴려줘야겠어. 근성 있는 놈들도 더 선발하고.’

클라우디아는 좀 난감했다.

황궁 기사단장 일에 이렇게 전력을 다하게 될 줄 몰랐다.

최선이었지만, 뭔가 말려들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황실 근위대장 수락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

“승리의 신은 우리 편입니다. 단장님이라면 지금 당장 폭군의 목을 벨 수 있습니다.”

제이슨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이리도 경박하고, 쉽게 흥분하는 자였던가.

제 안목을 한탄하며 클라우디아가 한숨을 삼켰다.


“반역의 깃발로 나부낄 생각 없다. 내가 원할 때가 아니라면.”

“그럼 왜 황제의 추종자를 쫓아내신 겁니까?”

“내가 쫓은 놈들은 황제의 추종자가 아니라 뒤룩뒤룩 살진 벌레였다.”

“상대는 폭군입니다!”

“무슨 연유로 폭군이라고 단정하지? 명분을 찾기 위해서?”

정곡을 찔린 제이슨이 움찔했다.

그것도 잠시 비굴한 웃음을 흘렸다.


“나랏돈으로 향락과 사치를 즐기는 자입니다. 수많은 여인을 노리개로 삼았고요. 어린 황태자를 방치하고, 황실 기사단을 쓰레기더미로 만들었지요.”

“황태자 전하를 옹립하면 될 텐데. 왜 날 내세우려는 건가?”

“예브레이 황실은 글러 먹었습니다. 나라엔 새로운 황제가 필요합니다!”

제이슨이 언성을 높였다.

클라우디아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꼭두각시 황제 뒤에서 권력을 나눠 먹을 작정은 아니고?”

“저의 충심을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진정 조국을 위한다면 명문 귀족들을 치는 걸 도와라.”

“네엣?”

“궁에 들어와서 보니, 나라 꼴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폐하의 처신에도 문제가 있지. 하지만 진짜 백성들의 피를 빠는 건 그 4대 명문이라는 귀족들이야.”

“단장님……!”

“그것이 내가 직접 보고 내린 결론이다. 하트만엔 혁명보다 개혁이 시급하다.”

클라우디아는 엘리자벳이나 니콜라이 같은 바람둥이들을 경멸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없고, 제 욕망에 급급한 자가 어찌 제국을 통치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또한 편견일 수 있었다.

제도를 암행하는 동안 클라우디아는 객관적인 눈으로 나라를 둘러봤다.

대리 결투 과정에서 얻은 정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들 폐하를 욕하고 있지만, 정국은 선황제 시절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안정되어 있다.”

“말도 안 됩니다!”

“과도한 세금도 없고, 전쟁에 대한 공포도 없다. 조공을 바치려는 사신들의 행렬도 끊이지 않았다.”

“썩어빠진 귀족과 기사가 득실댄다면서요?”

“부패는 배부른 자들의 고질병이다. 지나친 안락이 화를 불렀을 수도.”

제이슨은 클라우디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를 탓할 수만은 없었다.

자신도 니콜라이의 참모습을 보려 하지 않았다.

엘리자벳의 변화를 믿지 않았던 것처럼.


‘엘리자벳이 악녀가 아니라면, 황제도 폭군이 아닐 수 있어.’

편지 한 장에서 시작된 의문이 클라우디아를 뒤흔들었다.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기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니콜라이와의 독대 후 기나긴 고민의 마침표를 찍었다.


「왜 저를 기사단장으로 임명하시는 겁니까?」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라.」

「제 검이 폐하의 심장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기대하는 바다.」

「미끼를 던지시는 겁니까? 반역의 수괴로 엮으려고?」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말고, 보이는 것을 바로 보라.」

「…….」

「그대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내가 폭군이라면 언제든 베어라. 못 믿겠다면 지금도 좋다.」

「저에게 왜 이리하십니까?」

「그대가 개혁의 기수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

「날 제거하고 혁명 황제가 되는 것도 방법이겠지. 그 선택은 그대가 하라.」

그 말을 끝으로 니콜라이가 두 팔을 늘어뜨렸다.

무방비 상태로 두 눈을 감은 그는 허점투성이였다.

방어를 위한 은밀한 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함정이라 해도 클라우디아는 니콜라이를 죽이고 간단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걸 알고도 니콜라이는 목을 내놓았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건가? 아니면 당당하다는 건가?’

니콜라이의 모습에서 엘리자벳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녀가 남긴 편지 중 한 구절이 클라우디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부로부터의 혁명.

오직 악인들의 피만이 흐를 혁명에 함께해주십시오.」

수천, 수만의 목숨이 제 어깨에 걸려 있었다.

충동도 감정도 완벽히 배제해야 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클라우디아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편견도.

얽히고설킨 인연도.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던 연심도.

제국과 백성의 앞날 앞에서 흔적 없이 불살라야 했다.

잿더미 위에서 클라우디아는 선택했다.


“나는 혁명 황제가 아니라, 개혁 장군이 될 것이다. 황제를 감시하는 가장 뜨겁고 예리한 검이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던 여인과 손을 맞잡게 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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