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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첫날밤 (69/97)


#69. 첫날밤
2023.04.28.


더글라스와 나는 외지고 거친 길만 골라 다녔다.

비포장도로 마차 여행은 예상보다 훨씬 피곤했다.

익숙해지기 전까지 속이 메슥거려서 빵조각도 삼키지 못했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엘리자벳?”

마차를 몰던 더글라스가 돌아봤다.

나야말로 그가 걱정됐다.


“더글라스 님이야말로 괜찮으세요? 종일 말을 모는 것이 힘드실 텐데.”

“이 정도는 거뜬합니다. 글 쓰는 게 의외로 중노동이랍니다.”

“왠지 즐거워 보이시는데요?”

“마부 노릇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습니다. 새로운 적성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원작 더글라스는 만년필보다 무거운 것은 들어본 적 없는 도련님이었다.

아버지의 도박 빚에 시달렸다고는 하지만 후작 가의 장손.

궂은일 따위라곤 해 본 적 없었을 거였다.


“마차 운전은 언제 배우셨어요?”

“체력단련을 위해 승마를 시작했지요. 저는 승마보다는 이쪽이 더 흥미롭더군요.”

더글라스가 새하얀 치열을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보는 사람의 기분마저 맑게 해주는 미소였다.


“엘리자벳이 아니었다면 배울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저 때문이었다고요?”

“폐하께서 엘리자벳을 납치하셨던 걸 기억하십니까?”

“어떻게 잊어요.”

한때 니콜라이는 날 황비로 만들려 했다.

더글라스는 니콜라이를 막으려 가문의 보물을 바쳤다.

더글라스의 캐릭터가 변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마차를 몰 줄 알면 엘리자벳과 함께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예지력이 굉장하시네요.”

“저는 글과 책밖에 모르는 사내였습니다. 폐하의 압도적인 육체와 권력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요.”

정면을 응시한 채 더글라스가 스산한 어조로 회상했다.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서, 가볍게 물었다.


“그렇게 폐하를 이기고 싶으셨나요?”

“제국의 신민으로서 불충한 마음을 가질 수야 없지요. 다만…….”

“?”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내 대 사내로.”

“더글라스 님.”

“패배한다 해도 시도해보고 싶었습니다. 무력하게 굴종하는 기억은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요.”

“황제에게 굴종하기 싫다니. 충성스러운 신하인 줄 알았는데 무서운 욕망을 품고 계셨군요?”

내 물음에 더글라스가 웃음기를 지웠다.


“그보다 흉포한 욕망을 가진 적도 있습니다.”

“네?”

“가끔은 반역자가 되고 싶었거든요.”

“……!”

 

 
반역이라고?

꽃분홍색 사슴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날 돌아보며 더글라스가 눈매를 부드럽게 접었다.


“하하. 농담입니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한겨울 호수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높은 이명이 위험 경고처럼 들려왔다.


‘만약 더글라스가 클라우디아와 함께한다면…… 아니, 클라우디아를 설득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따지고 보면 도망자인 날 돕는 것도 반역이나 다름없었다.

더글라스를 눈엣가시 취급하는 니콜라이가 트집을 잡는다면 무슨 죄를 뒤집어쓰게 될지 몰랐다.

더글라스는 예전의 더글라스가 아니었다.

그를 사랑하는 클라우디아도 가만있지 않을 거였다.

원작을 비트는 데만 골몰하느라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던 위태로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혁명군을 이끄는 클라우디아와 그녀를 돕는 더글라스.


‘더글라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자.’

애써 불안을 잠재웠다.

더글라스가 잠시 지도를 살폈다.


“내일쯤이면 열세 번째 신전에 당도할 수 있을 겁니다.”

“왜 모라신시아 신도들은 신전을 숫자로 부르는 거죠? 지명을 쓰거나, 이름을 붙일 수도 있잖아요.”

“평등을 강조하는 교리 때문일 겁니다.”

“모라신시아 여신이 두 눈을 가린 것도 그 때문이라 하셨지요.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도 차별하지 않는다고요.”

“엘리자벳은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고요.”

“기억하고 계셨네요?”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엘리자벳이 무척 멋졌거든요.”

쑥스럽다는 듯 더글라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그를 내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더글라스 님. 왜 묻지 않으세요?”

“뭘 말씀이십니까?”

“제가 여신의 신물이 있을 만한 장소를 여쭈었잖아요. 더글라스 님은 열세 번째 신전에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귀띔하셨고요.”

“그래서 우리 여행이 시작된 것이지요.”

“황궁에서 도망치자마자 왜 신물을 찾는지. 신물로 뭘 하려는 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황궁을 떠나기 전 더글라스에게 편지를 썼다.

도주를 도울 수 있겠느냐고.

또 모라신시아의 신물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더글라스는 뭐든 돕겠다고 말했다.

모라신시아교의 가장 오래된 신전인 열세 번째 신전에 가보자고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 여행 때문에 고초를 당할 수도 있잖아요. 이유라도 알고 계셔야죠.”

“상관없습니다.”

“왜요?”

“엘리자벳이 원하니까요.”

말문이 턱 막혔다.

더글라스의 맹목적인 호의가 고마웠다.

동시에 고구마 백 개를 삼킨 듯 답답했다.


‘고맙기는 고마운데 호구 잡히기 딱 좋은 성격이야. 전 재산을 사기당하고, 염전에 팔려갈지도 몰라.’

내 표정에 한심함과 걱정이 섞였나 보다.

민망했는지 더글라스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똑똑한 편은 아니지만, 엘리자벳이 걱정하는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호기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왜 안 물으세요?”

“때가 되면 말해주실 테니까요.”

“…….”

“지금은 좀 곤란하신 것 아닙니까?”

“…….”

“적당한 때에 적당히 말해주십시오. 안 하셔도 되고요.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리겠다.

그 한마디가 봄으로 물든 숲을 가만히 흔들었다.

더글라스가 날 얼마나 위하는지.

날 향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짙은지.

돌려줄 수 없는 애정에 나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과분할 정도로 짙은 그 마음이 뺨을 스치는 바람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쓸쓸한 이유는 무얼까.

해가 저물고 있었다.

더글라스가 마차를 멈춰 세웠다.


“야영을 준비하겠습니다.”

빵, 비스킷, 견과류, 육포 등 식량은 충분했다.

가죽 물주머니도 깨끗한 냇물로 가득 채웠다.

지난 이틀 동안 모닥불을 피우고 잤다.

나는 마차에서.

더글라스는 모닥불 옆에서.

그는 날 위해 두툼한 솜이불과 거위털 베개까지 준비했다.

돌려가며 하루씩 쓰자고 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나의 안전과 편안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듯.


“차를 끓일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능숙하게 불붙일 준비를 하는 더글라스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있다고 하셨지요?”

“고개 하나 넘어가면 금방입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여관에서 자야겠어요.”

“역시 잠자리가 불편하시군요?”

더럭 어두운 얼굴로 더글라스가 물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번 머리가 베개에 닿자마자 곯아떨어지는걸요.”

“그럼 왜…….”

“너무 씻고 싶어요. 몸에서 냄새가 나서 못 견디겠어요!”

 

***

용병과 행상인을 상대하는 여행자 숙소엔 손님이 별로 없었다.

몇 가지 음식과 술을 파는 1층 식당에도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나는 헌팅캡을 눌러쓰고 더글라스 뒤에 찰싹 달라붙었다.

더글라스도 분홍색 머리칼을 후드 로브로 감췄다.


“빈방 있습니까?”

짧은 목과 풍만한 몸집을 가진 여주인이 우리를 발끝부터 훑어내렸다.

의심이 듬뿍 담긴 침묵이 이어졌다.

검문을 받는 것도 아닌데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팔짱을 낀 여주인이 불쑥 물었다.


“제일 비싼 방 하나 남았어요. 말 여물 포함해서 은화 2개.”

“좋습니다.”

“보기보다 부자 손님이시네.”

믿지 못하겠다는 듯 여주인이 중얼거렸다.

우리 몰골이 그렇게 형편없는 걸까?


“식사할 수 있습니까?”

“감자죽과 훈제돼지고기 정도라면요.”

“부탁드립니다. 목욕통과 따뜻한 목욕물도요.”

“뒤뜰에 우물이 있는데?”

“값을 치를 테니 준비해주십시오.”

더글라스의 말에 여주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도자기로 만든 욕조와 더운물은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평민들은 잘 씻지 않았다.

남루한 여행자가 욕조와 목욕물을 요구하니 의아할 수밖에.


‘이 세계에 와서도 매일 깨끗하고 뜨끈한 물로 목욕했는데. 꽃잎도 띄우고, 향유도 뿌리고. 내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졌는지 실감 나네.’

유난 떨고 싶지 않지만.

목욕보다 도망이 먼저라는 것도 알지만.

떡 지는 머리칼과 쉰내를 참기 어려웠다.


“이 정도면 될까요?”

더글라스가 침착하게 은화 세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여주인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방에서 기다리세요. 금방 올려다 드릴게.”

“감사합니다.”

“더 필요한 건 없고?”

“없습니다.”

“잘생기고 멋진 총각이네. 돈도 많고. 아가씨는 좋겠어.”

여주인이 능글맞은 눈매로 날 내려다봤다.

화들짝 놀란 내게 여주인이 물었다.


“어머. 얼굴이 빨개졌네. 첫날밤인가 봐?”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알 만큼 아는 사이구나? 속속들이?”

이번엔 더글라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여주인이 콧노래를 부르며 부엌으로 갈 때까지 우리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

제일 비싼 방이라더니, 바가지가 분명했다.

좁은 방 안에 무거운 적막이 떠돌았다.

숨을 쉬는 것도 눈동자를 굴리는 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여주인의 짓궂은 농담 때문이었다.

아니,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더글라스 때문이었다.


‘더글라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더글라스는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태연했다.

안절부절못하고 그를 의식하는 내가 바보처럼 느껴질 만큼.


‘첫날밤 운운하는 건 너무하잖아? 숙박앱이 있었으면 별점테러를 남겼을 텐데!’

이 숙소 완전 비추예요.

주인 아주머니 오지랖이 너무 심해요.

가격 대비 방도 좁고 청결 상태도 그닥입니다.

뷰는 나쁘지 않음.

어디에도 남기지 못할 후기를 마음속으로 썼다.

더글라스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엘리자벳?”

“뭐, 뭐가요?”

말을 더듬었다.

그조차도 유난스럽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가 왜 이럴까.


“침대가 좀 딱딱합니다.”

더글라스가 침대 매트리스를 손으로 눌러봤다.


‘아. 침대 이야기였어? 난 또 뭐라고.’

하지만 안심하기 일렀다.

그제야 하나뿐인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넓지도 크지도 않은 더블베드.

이래서 첫날밤 어쩌고 운운한 건가?

심장 떨림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내버려 두면 목구멍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어떡하지? 방은 하나고 침대는 하나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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