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한 침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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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한 침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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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한 침대에서
2023.05.02.
이 상황을 니콜라이가 알면 어떻게 되는 걸까?
더글라스의 목을 조를까?
그보다 심한 짓을 저지를 수도…….
불길한 예감을 털어내듯 고개 저었다.
소용없었다.
낮게 그르렁거리는 듯한 니콜라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탓이었다.
「그대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대화하고, 누구에게 미소짓는지 다 알아야겠다고 했을 텐데.」
목덜미부터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니콜라이의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듯했다.
외간 남자와 밀월여행을 온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초조한 걸까.
‘니콜라이와 나는 진짜 연인도 아니잖아? 더글라스랑 뭘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뭘 하면 또 어때?’
니콜라이는 다른 여자를 만나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거였다.
날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다른 여자와 같이 말을 타고 오지도 않았겠지.
새까만 준마.
니콜라이와 앞뒤로 딱 달라붙은 짧은 머리의 황비.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안쪽이 요동을 쳤다.
니콜라이가 바람둥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설은 그럴듯하다가도 금세 허황된 소망이 되곤 했다.
그를 계속 사랑하고 싶어서 끼워 맞추는 거였다.
그 쓸쓸함을, 짝사랑의 외로움을 니콜라이는 알까?
‘내가 그리워서 추격대를 보낸 걸까? 떠나지 않길 바라는 것만큼은 진심으로 보였는데…….’
아름다워서 더 애처롭던 남자를 떠올리다가 헌팅캡을 휙 벗어던졌다.
두피가 당기도록 묶었던 머리도 풀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선홍빛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씻고 자자. 니콜라이 생각을 멈추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부스스하게 엉키긴 했지만, 불결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목욕은 못 해도 냇물에 머리를 감아서 다행이었다.
“욕실이 어디일까요?”
좁은 방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난처한 기색으로 더글라스가 답했다.
“이런 숙소엔 욕실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목욕통을 올려준다는 소리였군요?”
“수건은 여기 있습니다.”
더글라스가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수건을 집었다.
몸을 가릴 만큼 커다란 수건을 보자 뺨에 다시 열이 올랐다.
붉으락푸르락해지던 내 안색을 살피던 더글라스가 귀엽다는 듯 쿡쿡 웃었다.
“엘리자벳. 저는 마차에서 자겠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상쾌한 공기를 마셨더니 하나도 안 피곤합니다.”
“그런 말에 누가 속을까 봐요?”
“정말 괜찮습니다. 부디 편히 쉬세요.”
날 안심시킨 후 더글라스가 방을 나가려 했다.
반사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엘리자벳?”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오늘 밤만, 침대 밑에서라도 주무시면 안 될까요?”
더글라스의 옷자락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친구든, 전 약혼자든, 남자와 한방에 있는 것은 어색했다.
하지만 더글라스만 노숙을 하도록 둘 수는 없었다.
이건 예의가 아니라, 염치의 문제였다.
“저 때문에 계속 고생하고 계시잖아요. 잠은 지붕 있는 곳에서 주무셔야죠.”
“제가 여기 있으면 엘리자벳이 불편할 겁니다.”
“너무 편해요. 더글라스 님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인걸요.”
더글라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 거짓말을 눈치챈 걸까?
아니면 가족 같다는 말 때문일까?
“무서워서 그래요. 누가 들어올까 봐.”
더글라스가 마차로 내려갈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
그가 잠시 멈칫했다.
“잘 잠그고 주무시면 괜찮을 겁니다.”
“문손잡이도 너무 허술하잖아요. 조금만 힘을 주면 잠금쇠가 뜯겨나갈 거예요.”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했지만, 더글라스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침대 밑에서 자겠습니다. 씻으시는 동안 문밖에 있을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고마워요,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날 내려다보는 더글라스의 눈매가 아련해졌다.
“엘리자벳. 제가 걱정되십니까?”
“당연하죠. 저도 사람인데요.”
“저는 무섭습니다.”
더글라스의 목소리가 낮게 흩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뭐가 무서우세요?”
“엘리자벳에게 사람이 아니라, 사내이고 싶어서요. 그런데 영원히 사내이지 못할까 봐.”
더글라스의 유순한 갈색 눈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떨리고 싶지 않은데 떨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남자가 뿜어내는 위태로운 열기에 익숙해져 버렸다.
더글라스가 아닌 니콜라이 때문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목욕물 가져왔나 봐요.”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날 보호하듯 더글라스가 앞섰다.
그와 함께여서 다행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든든한 동시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삼킨 것처럼 불안했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덩그러니 놓인 2인용 침대가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
‘니콜라이와 한방에서 자야 한다면 어땠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불안했을까? 니콜라이랑 같이 쓰기엔 너무 좁은데. 찰싹 달라붙지 않으면 굴러떨어질지도 몰라.’
더글라스에겐 침대 밑에서 자라고 했으면서.
니콜라이와 한 침대를 쓸 궁리를 하다니.
낯부끄러운 생각을 지우고 있을 때 더글라스가 잠긴 문을 열었다.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욕조는 이쪽으로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목소리가 끝나기 전.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억.”
짧은 신음을 내며 더글라스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욕조 뒤로 너무나 익숙한 남자가 익숙한 목소리를 들려주기 때문이었다.
“이러려고 황궁에서 도주한 건가?”
환청이겠지?
아니면 꿈이거나.
눈꺼풀을 비벼봤지만 소용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옷을 입은 니콜라이가 얼음장처럼 싸늘한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서 대체 뭣들 하는 거지?”
니콜라이의 전신에서 숨 막히도록 강렬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수백, 수천 개의 칼날을 맨몸으로 맞는 착각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니콜라이의 시선이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에 닿았다.
그리고 더글라스가 든 목욕수건에 고정됐다.
낡은 목제 목욕통에서 더운 김이 하얗게 번졌다.
사신의 한숨처럼 불길해 보이는 까닭은 뭘까?
누군가는 살아나가지 못하리란 예감은 또 뭐고?
***
새 황실 기사단장을 반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사단의 대대적 물갈이가 이루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클라우디아를 악녀 엘리자벳의 하수인쯤으로 취급했다.
전임 기사단장과 기사단원들의 죄상이 속속들이 밝혀지자,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었다.
변화의 씨앗.
개혁을 향한 첫걸음.
니콜라이가 꿈꾸고 클라우디아가 시작한 그것을 가장 먼저 눈치챈 이들은 개혁 성향의 준귀족과 젊은 부르주아들이었다.
“근위대 놈들 반 이상이 죽거나, 하옥되었다지? 으스대던 꼴이 재수 없었는데, 잘됐어.”
“황실 근위대 모집 공고도 새로 났던데요?”
“평민은 물론 용병까지 실력만 있으면 입단할 수 있다네. 과연 백은의 여기사답더군.”
“이 기회에 부패한 놈들 싹 다 쓸어버리면 좋겠습니다. 사업하기에도 그쪽이 더 수월하겠지요.”
기대를 품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클라우디아를 험담하기 바빴다.
“변방의 여기사가 황궁과 정치에 대해서 뭘 알겠소?”
“황실 기사단장은 대대로 경륜 있는 원로 기사가 맡았거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여자가…….”
“클라우디아 경은 악녀의 대리인이었소. 겉으로는 정의로운 척하면서 딴 속셈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지.”
“여자는 그저 남편 잘 섬기고, 애 많이 낳아서 잘 키우는 게 최고지. 분수에 맞지 않게 검을 들고 설치는 꼴이라니. 쯧쯧.”
귀부인들은 불안인지, 질투인지 모를 감정에 휩싸인 남편들과 생각이 달랐다.
완고한 아비들의 투덜거림도 무시했다.
클라우디아의 놀라운 재능과 아름다운 외모, 파격적인 행보에 감탄하는 귀부인들도 많았다.
클라우디아가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로맨스 소설의 등장인물과 닮았다는 이유도 한몫을 했다.
“어제 출간된 『제국의 붉은 별』 3권 보셨나요? 저는 읽다가 심정지 오는 줄 알았어요.”
“3권에 등장하는 천재 여기사가 클라우디아 경이랑 너무 비슷하지 않나요?”
“소설 속에만 존재할 것 같은 정의로운 기사가 실제로 있다니. 제국의 홍복이지 뭐예요?”
“클라우디아 경께서 못난 사내들의 콧대를 눌러줄 때마다 짜릿하더라고요. 티파티에 꼭 모시고 싶어요.”
“저도 검을 배우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때까지만 해도 클라우디아는 사교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그런 인물 중 하나로 여겨졌다.
신선하고 특이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마는.
클라우디아는 모두의 예상을 산산조각냈다.
일개 기사단장인 그녀가 브렌든 후작의 저택을 급습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제국은 일대 충격에 빠졌다.
“소식 들었어? 클라우디아가 명문가를 털기 시작했대!”
“브렌든 후작은 제국 제일의 거부 아니야? 아무리 로즈 황비가 하옥됐대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텐데.”
“로즈 황비는 탈옥을 했다던데? 브렌든 후작이 탈옥과 도주를 도왔고!”
“그뿐이야? 고리대금으로 떼돈을 벌었대. 더럽게 번 돈으로 반역을 도모했다더라고!”
시몬의 죽음으로 니콜라이를 폭군이라 비판하며 브렌든 후작가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여론도 차츰 반전되고 있었다.
리먼 공작과 파이프 후작, 블랙폴드 백작이 한자리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긴 침묵이 무색하리만치 결론은 금방 매듭지어졌다.
“브렌든 후작은 이쯤에서 버립시다. 그것만이 우리가 사는 방법입니다.”
***
불길한 예감을 지우고 더글라스를 돌아봤다.
더글라스의 입가에 붉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더글라스 님!”
그를 부축하려 했다.
그것을 막은 것도 니콜라이였다.
“폐하…….”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더글라스가 니콜라이의 발밑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네놈이 감히…….”
니콜라이의 턱 근육이 불끈 솟아올랐다.
단단하게 쥔 주먹에 푸르스름한 핏불이 불거졌다.
또 더글라스를 후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오해하신 거예요.”
“…….”
“폐하께서 상상하시는 일은 없어요.”
“내가 무얼 상상하는데?”
숲과 바다를 닮은 청록색 눈동자가 날 찔렀다.
그 안에 일렁이는 분노를.
분노보다 더한 서러움을.
타는 듯한 그리움을.
온전히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그건…….”
몇몇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혀가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변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변명도 곧이들릴 리 없었다.
하지만 오해를 외면하는 건 더 싫었다.
그때 더글라스가 일어났다.
“폐하. 제가 모두 설명하게 해주시겠습니까?”
순간 니콜라이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내가 말리기도 전에 그가 더글라스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폐하!”
“한마디도 하지 마라. 이 자의 숨통을 끊어놓기 전에.”
더글라스의 목을 팔뚝으로 짓누르며 니콜라이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런다고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심호흡한 뒤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