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소유물이 되진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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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소유물이 되진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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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소유물이 되진 않을 거예요
2023.05.05.
“난폭하게 굴지 마세요!”
근육으로 두껍게 다져진 니콜라이의 어깨가 움찔했다.
더글라스를 짓누르던 팔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황제면 사람을 막 그렇게 때려도 돼요?”
황제모독죄 따위?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지금은, 매 순간 내게 진심이었던 더글라스를 지켜야만 했다.
그리고 니콜라이의 폭력적인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내 앞에서 이 자의 편을 들고 있는 건가?”
니콜라이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허리 위에 손을 올리고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어린 애도 아니고, 무슨 네 편 내 편을 따져요?”
“…….”
“네틀톤 후작을 어서 풀어주세요.”
니콜라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동자는 잘게 요동치고 있었다.
쐐기를 박아넣어야 할 때였다.
“폐하는 제가 제일 싫어하는 남자예요!”
“……무어라?”
“주먹부터 먼저 나가는 남자. 남의 말 귀담아듣지 않는 남자. 아집과 집착으로 똘똘 뭉친 남자!”
“뭐가 그리 많아?”
“그중에서 최악은 폭력이에요. 진짜 최. 악. 이라고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차올랐다.
‘안 통하면 어쩌지?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냐 하면?’
잠시의 침묵이 심장을 옥죄었다.
흑마법에서 깬 사람처럼 니콜라이가 손의 힘을 풀었다.
“콜록, 콜록.”
더글라스가 마른기침을 토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심각한 문제는 없는 듯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니콜라이가 명령했다.
“네틀톤 후작을 끌고 가라.”
“예, 폐하!”
문밖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이 대답했다.
묵직한 갑옷을 입은 그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무 바닥이 쿵쿵 울렸다.
두 팔을 벌리고 더글라스 앞을 막아섰다.
“더글라스 님은 아무 죄가 없어요. 저만 끌고 가세요.”
“물러서라, 엘리자벳.”
더글라스를 보호하는 나를 향한 니콜라이의 눈매가 더 사나워졌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더글라스는 내 걱정뿐이었다.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엘리자벳.”
“더글라스 님은 무고해요.”
“모두 감수하고 떠나온 길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엘리자벳…….”
“수잔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둘 수 없어요.”
-쾅!
니콜라이가 주먹으로 벽을 때렸다.
나와 더글라스의 대화를 참기 힘들다는 뜻 같았다.
흔들림 없는 곧은 눈으로 니콜라이를 응시했다.
“폐하. 더글라스 님을 네틀톤 저택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요구하는 건가?”
“부탁드리는 거예요.”
“도주자를 도왔다. 그냥 넘길 수 없는 중죄다.”
“국법을 말씀하신다면 처벌은 제게 하셔야죠. 정작 죄인은 도망을 친 전데요!”
정곡을 찔린 니콜라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의 뜻은 법과 똑같은 권위를 갖는다.
니콜라이가 더글라스를 벌하려고 마음먹는다면 이유 따위는 상관없었다.
물론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어찌할까요, 페하?”
기사들이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황제의 명령을 기다렸다.
살기등등한 눈으로 더글라스를 노려보던 니콜라이가 한 마디 내뱉었다.
“네틀톤 후작을 즉시 가택에 구금하라.”
“하지만……!”
뭐라 끼어들려는 나를 더글라스가 말렸다.
“황명입니다. 따라야 합니다. 엘리자벳도 그리 해주십시오.”
“죄송해요, 더글라스 님.”
“엘리자벳이 아닌 절 위해 떠나왔을 뿐입니다.”
한 점 거짓 없는 표정으로 더글라스가 말했다.
나와의 도망을 그는 여행이자, 추억으로 여겼다.
그랬기에 이토록 해사한 미소를 보여주는 거였다.
“좀 더 안전히 모시지 못해 송구합니다. 나중엔…….”
더글라스가 뒷말을 삼켰다.
니콜라이가 날벌레를 쫓듯 손짓했다.
기사들과 함께 더글라스가 사라졌다.
니콜라이와 단둘이 남겨졌다.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더한 긴장이 폐부를 파고들었다.
목욕물은 싸늘하게 식었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나였다.
“어떻게 찾으셨어요?”
“중요하지 않다.”
“따돌린 줄 알았는데.”
“추격대를 느슨하게 외곽으로 돌렸다. 그대가 안심하고 나타날 때까지.”
“주도면밀하시네요.”
“더글라스와 한방에 묵을 줄 알았다면 더 빨리 왔을 것이다.”
니콜라이가 허리를 숙였다.
더글라스가 떨어뜨린 수건을 주웠다.
그 와중에도 두 눈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숨이 점점 가빠졌다.
“숙소에 든 건 처음이에요. 더글라스 님은 마차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참이었고요.”
“그런 놈인 줄 몰랐다면 보자마자 숨통부터 끊었을 것이다.”
“네?”
“그대를 위한답시고 신사적인 체한 거지. 그게 놈의 수법이라는 걸 모르겠는가?”
“다 알고서 일부러 오해한 척을 하신 건가요?”
상황을 눈치채고서도 그렇게 때렸다고?
뭐 이런 못된 남자가 다 있어?
인상을 확 찌푸리는 내게 니콜라이가 물었다.
“나는 그대를 가질 수 없는가?”
난폭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은 목소리.
길 잃은 소년처럼 겁에 질린 물음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은 왜 소유를 질문하며 두려워하는 거지?
내가 뭐라 답할지 다 안다는 듯.
“누구의 소유물은 되지 않을 거예요.”
가끔 당신 것이 되고 싶었다.
내 모든 것을 내주고, 당신의 전부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하늘을, 태양을, 별과 달을, 봄바람을, 흐르는 시간을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당신은 언제나 내 몫이 아니었다.
“그대를 가둘 수 없겠군.”
니콜라이에게서 시작된 쓸쓸함이 내게 밀려왔다.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를 가두고 싶으세요? 황금 새장에서 폐하가 원할 때 노래하는 카나리아처럼?”
“…….”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저는 못 해요. 아뇨, 하지 않을 거예요. 카나리아를 원하거든 다른 여자를 찾으세요.”
쓴웃음이 밀려왔다.
이미 그에겐 수많은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왜 니콜라이는 나 하나밖에 모르는 남자라도 되는 듯 상처받은 걸까.
‘혼란스럽고 불안해 보여. 소유나 지배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관계를 맺어본 적 없는 것처럼…….’
그는 꽃에 둘러싸인 황제였다.
그의 손짓을 기다리는 여인들이 후궁에 가득했다.
여인들을 가둔 것으로 모자라 날 소유하길 바라는 니콜라이.
쓰고, 맵고, 떫은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기다려주실 수는 없었나요?”
“더는 견딜 수 없어 마중 나온 것이다.”
“마중 두 번만 받다간 지명수배범 되겠네요.”
“같이 돌아가자, 엘리자벳.”
니콜라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고 싶은 충동이 가슴을 내려쳤다.
그러나.
“전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 거예요.”
“클라우디아가 브렌든 후작을 감옥에 처넣었을 것이다.”
클라우디아가 기사단장 자리를 수락했구나.
내 진심을 받아준 걸까?
아니면 이미 계획한 혁명을 준비하는 걸까?
클라우디아와 재회할 그 날이 못 견디게 두렵고 또 기대됐다.
“클라우디아 님이라면 완벽하게 정리하실 거예요.”
“그녀가 황궁 기사단장이 되리라 짐작이라도 했다는 건가?”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봤을 뿐이에요.”
클라우디아에게 보낸 편지는 함구할 셈이었다.
공을 세웠노라 잘난척할 마음도 없었다.
클라우디아의 생각을 바꿀 수만 있다면.
그녀와 적이 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내 계획에 대해서 눈치챈 것 같았다.
“당분간 세간의 이목은 클라우디아에게 집중될 것이다.”
“그녀가 마음껏 날개를 펴도록 자리를 비워주신 건가요?”
“나야 늘 밖으로 떠도는 황제 아닌가.”
“폐하께서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좋은 작전이네요.”
“귀족들은 클라우디아가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젊은 기사들이 벌써 클라우디아 주위로 모여들고 있다.”
“그들의 힘이 모인다면 개혁도 한층 탄력을 받겠지요.”
한참 대화를 나누던 니콜라이가 벽에 등을 기댔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마른세수를 했다.
마치 끓어오르는 감정을 잠재우려는 듯.
“날 버린 그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버렸다니요?”
“버린 게 아니면 뭐지?”
니콜라이가 따져 물었다.
새치름한 노여움이 목소리에 배어있었다.
“돌아가겠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떠나지 말라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편지 한 장 남기고 떠나면 얌전히 기다릴 줄 알았나? 난 더글라스가 아니야.”
“더글라스 님이 여기서 또 왜 나와요?”
내가 황당해하건 말건 니콜라이가 고집스레 중얼거렸다.
“그대의 관심이라도 받으려면 더글라스처럼 굴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폐하!”
“어쩌면 오늘처럼 그대의 보호를 받게 될지도 모르지.”
“지금 질투하세요?”
니콜라이가 날 빤히 바라봤다.
“안 되나?”
그의 되바라진 청록색 눈동자가 매혹적이지 않다면.
육감적인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지 않았다면.
나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였다.
“보고 싶었어요.”
니콜라이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떨리는 숨결이 입술 사이를 들락였다.
더는 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매일 매일 폐하를 생각했어요.”
“…….”
“이렇게 그리워하는데 왜 꿈에 나오지 않을까? 꿈에서라도 보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 잠들곤 했어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꿈으로 도망쳤다.
꿈에서도 당신이 보고 싶었다.
눈물도 흘리지 못했다.
울면 당신이 더 보고 싶을 테고, 날 보듬어주던 당신 품을 찾아 돌아가게 될 테니까.
“그대, 몹시 비겁하다.”
니콜리아가 낮게 갈라진 목소리를 토했다.
“날 가지고 노는가? 매정하게 떠나 놓고선 인제 와서 보고 싶었다고?”
“…….”
“또다시 내 곁을 떠나겠지.”
“그래야만 한다면요.”
니콜라이가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막을 수 없고, 가둘 수도 없다면 나보고 어쩌란 것인가?”
황홀한 체향이 담뿍 밀려들었다.
짙은 주름이 잡힌 니콜라이의 미간은 더없이 요염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열기가 뱃속을 휘저었다.
그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이제야 실감 났다.
“같이 가면 되겠네요?”
충동적으로 그렇게 내뱉었다.
니콜라이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벌어졌다.
내 가슴도 떨렸다.
그래서 더 도발적으로 니콜라이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이왕 나오신 마중, 몰래 저랑 같이 가면 되죠, 뭐.”
곧 주워 담을 농담이었다는 듯 과장을 섞었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니콜라이의 입꼬리가 묘한 각도로 틀어졌다.
내 손 위에 그의 손이 포개졌다.
그것만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좋은 생각이다. 대신 나도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니요?”
“받아들이면 함께 가겠다. 더글라스보다 더 충실한 시종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