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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입술 도장 (72/97)


#72. 입술 도장
2023.05.09.


시종이라니?

그리고, 뭘 더하겠다는 거지?

몇몇 질문이 떠올랐지만, 입 밖에는 내지 않았다.


“조, 좋아요.”

얼떨결에 대답한 건데 니콜라이의 반응은 엉뚱했다.


“믿지 못하겠다.”

“……네?”

“너무 흔쾌하니 더 못 믿겠군.”

“좋은 생각이라고 할 땐 언제고 갑자기 못 믿겠다고요?”

님 장난치세요?

그렇게 묻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니콜라이가 고개를 옆으로 픽 돌렸다.


“그럴 수밖에. 그대는 이미 탈주한 전력이 있으니까.”

아득해지는 뒷골을 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니까.


“도장이라도 찍어드려요?”

“그대는 손도장이 찍힌 계약서도 휴짓조각 취급했다.”

“그럼 무릎이라도 꿇고 빌까요?”

“기분은 나아지겠지만, 쓸모는 없겠군.”

“그럼 뭐, 어쩌라는 건가요?”

소인배, 쫌생이, 밴댕이 소갈딱지.

그러니까 친구가 없지!

내 생각이 표정에 훤히 드러났는지 그가 피식 웃었다.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악동처럼.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고, 웃음이 나와?’

프란츠한테 그런 것처럼 니콜라이의 볼을 잡아서 옆으로 쭈욱 늘이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는 황제였다.

그윽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왜, 왜 이래?’

방 안의 공기가 한도치 이상으로 농밀해졌다.

기묘한 긴장이 발끝부터 차올랐다.

이번엔 그가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맹세해라, 엘리자벳.”

갓 뜯은 핫팩을 얼굴에 붙인 것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날 꿰뚫어 보는 청록색 눈동자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갈망과 갈증으로 얼룩진 내 심장에 불이 붙었다.

먼 곳으로 내달리는 심장 박동이 고막에서 느껴졌다.


“……어떻게요?”

신음인지 대답인지 모를 말을 흘렸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기다렸다는 듯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렇게.”

촉촉하면서도 탁한 음성이 귓가를 적셨다.

그리고 입술이 겹쳐졌다.

한 치의 빈틈없이 맞닿은 살점.

황홀하다 못해 아찔한 숨결이 입안을 간질였다.

내 모든 걸 휘어 감고 들쑤셨다.

니콜라이의 손이 아래로 목선을 더듬었다.

찌릿.

전류가 온몸을 훑어내렸다.

그의 손이 은밀하고도 집요하게 옮겨졌다.

어깨를 매만지다가, 날개 뼈를 더듬고, 등줄기를 간지럽혔다.

오로지 손끝으로 그는 나를 탐닉했다.

니콜라이가 닿은 곳마다 묵직한 전율을 남겼다.

눈앞에서 붉은 꽃망울이 탁탁 튀었다.

잇새로 빠져나가는 신음을 겨우 참았다.

그것이 아쉽다는 듯 니콜라이가 젖은 입술을 비벼왔다.

발끝부터 무너질 것 같았지만, 그의 팔에 휘감겨 그나마 지탱하고 있었다.

저릿한 떨림, 달아오른 숨결이 비좁은 방을 가득 채웠다.


 
가쁜 숨을 내뱉을 때 니콜라이가 내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비명을 지를 여유도 없었다.

그가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좁은 침대.

***

클라우디아가 얼음탑으로 향했다.

간수들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경례를 올렸다.


“죄수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습니다. 저러다 죽을까 걱정입니다.”

“한을 품은 자는 쉽게 죽지 않는다.”

클라우디아가 옳았다.

브렌든 후작은 어느 때보다 형형한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제 딸이 갇혀 있던 그 쇠창살 안에서.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자백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나는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소.”

“로즈 황비가 탈옥했습니다.”

“내겐 딸을 도울 정신도, 기력도 없소.”

브렌든 후작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침을 튀기며 악을 쓰던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죽음을 각오한 사내의 결기마저 느껴졌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풀릴지도.’

클라우디아가 말문을 열었다.


“후작께서 반역을 입에 올린 건 사실이잖습니까.”

“자식을 잃은 아비가 홧김에 무슨 말을 못 하겠소?”

“홧김에 반역이라니.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폐하를 죽도록 원망했소. 복수를 꿈꾸기도 했소. 하지만 그 이상을 실행한 적 없소.”

“잘 압니다.”

뜻밖의 대답에 브렌든 후작이 눈을 부릅떴다.


“무슨 뜻이오?”

“후작께선 반역을 일으킬 깜냥이 못 된다는 걸요.”

“내가 무고한 걸 알면서 얼음탑에 가뒀다고? 왜 그랬소?!”

“본보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

“후작 말고도 제위를 탐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모조리 체포하기보다, 본보기를 보이면서 경고를 보내는 거지요.”

브렌든 후작은 귀족 사회에 공포를 불러일으킬 만큼 하루아침에 완전하게 몰락했다.

이는 니콜라이가 설계한 경고장이었다.

클라우디아는 기꺼이 실행자가 되기로 했다.

백성들의 피를 아낄 수 있다면 대귀족 몇 명쯤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었다.


“증거도 없이 재판에서 승리할 수는 없소!”

브렌든 후작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저를 그리 허술하게 보셨습니까?”

클라우디아가 소매에서 찢어진 천 조각을 꺼냈다.

브렌든 후작은 그게 뭔지 몰라서 더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엘리자벳이 납치당할 때 입었던 드레스 조각입니다. 후작의 집에서 발견됐습니다. 결정적 물증이지요.”

“납치사건까지 나에게 뒤집어씌운단 말이오?”

“뭐라 하셔도 증거는 후작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암흑길드의 범죄자들은 엘리자벳 납치의 배후로 파이프 후작과 블랙폴드 백작을 지목했다.

하지만 찢어진 옷자락은 브렌든 후작의 집에서 나왔다.

제물을 원하는 사람은 니콜라이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명문가의 당주들은 브렌든 후작을 버리기로 했다.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내게는 초대 황제께서 하사하신 신물이 있소. 그걸 바치면 폐하께서도 날 어쩌지 못하실 거요.”

“그 전에 자결을 선택하실 수도 있지요.”

“나는 절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 것이오!”

“누가 후작의 죽음을 따지겠습니까? 자살인지, 사살인지.”

“누명을 씌우는 것도 모자라 입막음을 하겠다고?”

“후작가의 후계자는 사망했고, 따님은 일급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후작의 유산을 노리는 자들이 벌써 몰려들고 있습니다.”

“허헛…….”

삶의 의지를 잃은 듯 브렌든 후작이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클라우디아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십시오. 처형당하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하려고 찾아온 것이오?”

“모든 걸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게 생겼는데.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내내 감정을 억누르던 브렌든 후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클라우디아의 눈매가 한층 더 예리해졌다.


“혼자 죽지 마십시오. 그거야말로 개죽음입니다.”

“날 이용해서 4대 명문가를 이간질하겠다는 거요?”

“의리를 지키고자 하시면 그리 알고 물러가겠습니다.”

“…….”

“그분들이 후작의 침묵을 고마워할지 모르겠군요. 누명을 쓴 자가 씌운 자를 보호한다니.”

“그들의 죄를 고한다면 날 살려줄 수 있소?”

브렌든 후작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어떤 정보를 내놓으시는지에 달렸습니다.”

“당신, 정말 무서운 사람이구려.”

“정말 무서운 건 아직 보지도 못하셨습니다.”

클라우디아의 새하얀 얼굴에 섬뜩한 빛이 서렸다.


“그 말씀부터 해보시지요. 황제를 놀림거리로 전락시킬 비밀이 뭡니까?”

 

***

잠이 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니콜라이와 좁아터진 침대에 같이 누웠는데 어떻게 잠이 오겠는가.


“제가 침대 밑에서 잔다니까요?”

벽 쪽으로 모로 누운 니콜라이에게 따져 물었다.

그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그래봤자 커다란 덩치가 도드라질 뿐이지만.

게다가 상의도 훌렁 벗은 상태였다.

언제부터 저렇게 벗고 있었던 거람?


“여인을 차디찬 바닥에서 자게 할 수 없다.”

“그럼 폐하께서 아래에서 주무시면 되잖아요.”

“내가 황제란 사실을 잊지 말아라. 게다가 나는 딱딱한 데서는 못 잔다.”

눈을 감은 채 니콜라이가 답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매끈하고 탄탄한 등 근육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잠시 가라앉았던 열기가 다시금 솟구쳤다.


“다른 숙소를 찾아보세요.”

“그 사이 그대가 또 도망치면?”

“맹세까지 했는데 못 믿으시는 건가요?”

“피곤하다. 그만 자야겠다.”

니콜라이가 시치미를 뗐다.

원망을 담아 그의 등을 콩콩 두드렸다.


“옷이라도 좀 입으세요!”

“딱딱한 데서 못 자고, 옷 입고도 못 잔다. 기억하라.”

이 야한 남자가 뭐라는 거야?

얼굴이 확 붉어졌다.

한마디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랫도리까지 벗는다고 설칠까 봐.


“폐…… 폐하?”

이제 니콜라이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벌써 잠든 건가?

벽을 향하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하기 힘들었다.

넓디넓은 등이 장벽처럼 내 앞을 가로막았다.

꿀벌이 꽃향기를 쫓듯 시선이 절로 니콜라이의 섬세한 등 근육을 향했다.

피부는 매끈매끈 윤이 흘렀다.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튕겨 오를 듯 탄력적이기도 했다.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옷을 입었을 땐 마른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큰 몸집을 어디다 숨기고 있었던 거지?’

처음 같이 잤던 날도 그는 상반신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내 정신이 멀쩡하다는 게 제일 문제였다.


“맘대로 하세요! 저도 쉬어야겠어요.”

이불을 끌어당기고 털썩 누웠다.

적막한 밤이었다.

니콜라이의 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오르내렸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온 체취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나른하고 몽롱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긴장 때문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니콜라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다간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예상대로야. 니콜라이와 끌어안지 않고는 이 좁은 침대에서 잘 수 없어.’

원망 어린 시선을 눈치챈 걸까.

니콜라이가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잔뜩 웅크린 내게 니콜라이가 한쪽 팔을 턱 올렸다.


“폐하?”

“…….”

“저기요?”

“…….”

“무거운데요?”

니콜라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고른 숨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상태가 되었다.

짙고 가지런한 속눈썹과 자기주장이 확실한 콧대.

베일 듯한 턱선이 내 눈과 너무 가까웠다.

그의 입술에 내 숨결이 닿을 것 같아서 숨조차 편히 쉴 수 없었다.


‘손만 잡고 잘게 가 아니라, 팔만 올리고 잘게 인가? 이 상황에서 태평하게 잠을 자다니…… 하여간 바람둥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날 누르는 팔이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적당한 온기를 더했다.

뱃속이 간질거리는 이상한 안도감.

니콜라이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깊은 물에 잠기듯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천천히. 까무룩.

***

오랜만에 꿀잠을 잤더니 몸과 마음이 상쾌했다.

더글라스 생각에 잠깐씩 무거워지는 것만 빼면.


‘해 질 무렵쯤이면 열세 번째 신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두 번째 신물을 찾을 수 있으리란 희망이 차올랐다.

게다가 니콜라이와 함께하는 첫 여행이었다.

활기차게 준비하는 나와 달리 니콜라이는 잠이 덜 깬 모습이었다.

눈은 약간 부어 있었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그 모습도 너무 귀엽다면 주책인 걸까.


“폐하. 어제 잘 못 주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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