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비밀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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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비밀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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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비밀과 거짓말
2023.05.12.
“잘 수 있었을 리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니콜라이가 중얼거렸다.
“저보다 빨리 잠드신 것 같던데.”
“그대는 남자를 전혀 모른다.”
“저, 엘리자벳 엠스터거든요? 무슨 말씀이세요?”
“기억나지 않는가?”
니콜라이가 되물었다.
그의 눈 밑에 푸르스름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제 잠버릇이 고약했나요?”
“아주 심했다. 밤새도록 내 품을 파고들더군.”
“에엑?!”
“가슴을 계속 더듬어 대질 않나…….”
“제, 제가 폐하를 만졌…… 다고요?”
그거 꿈 아니었어?
탄탄하면서도 보들보들한 뭔가를 만지작거리는 꿈이었는데!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다.
니콜라이는 어깨가 아직도 뻐근한지 목을 주물렀다.
딴청을 피우다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기사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마차도 없었다.
다만 새파랗게 질린 어린 하인이 검은 말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기사들은 모두 돌려보냈다. 황제가 외유 중이라는 것을 광고할 필요 없으니까.”
“마차는요?”
“말이 훨씬 빠르다.”
“저는 말을 탈 줄 몰라요. 게다가 말은 한 필 뿐이잖아요?”
불만을 가득 담아 니콜라이의 애마를 노려봤다.
잡털 한 올 섞이지 않은 검은 말은 다른 말보다 훨씬 컸고, 우아한 기품마저 풍기고 있었다.
차분한 검은 눈동자는 왠지 나를 비웃는 듯 보였다.
“나와 같이 타면 된다. 블랙윙이야.”
“여자랑 말 같이 타는 게 취미이신가 보네요.”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졌다.
그가 새 황비를 데려온 기억이 아직도 선연한 까닭이었다.
대꾸 없이 니콜라이가 말 고삐를 넘겨받았다.
“서두르면 저녁 식사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임대 마차를 부를래요.”
“승마의 매력을 알려주려고 하는데.”
“최고급 8두 마차보다 편안하지는 않겠죠.”
도도하게 콧대를 세웠다.
이제 추격대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비싼 최신형 마차를 빌릴 계획이었다.
돈이라면 넘칠 만큼 많으니까.
“그럼 이 안장은 버려야겠군.”
니콜라이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제야 블랙윙 등허리에 올려진 안장이 눈에 띄었다.
윤이 반드르르 흐르는 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2인용 안장이었다.
심지어 앞 좌석엔 나지막한 등 쿠션도 달려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2인용 안장도 있어요?”
“그대를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지만, 니콜라이의 눈빛엔 자랑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디자인도 내가 했다. 마구 장인에게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지.”
“저를 위해서라고요?”
“그럼 누구를 위해서겠느냐?”
“황비들 데려올 때 편하게 태우시려는 게 아니고요?”
니콜라이의 미간이 거칠게 찌그러졌다.
내 손목을 낚아채더니, 안장 쪽으로 끌고 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는 것도 잠시, 니콜라이가 안장 쿠션을 가리켰다.
등받이엔 황금색 실로 이렇게 수놓아져 있었다.
“엘리자벳 엠스터……?”
두근. 두근. 두근.
격렬하고도 아득한 기쁨이 가슴을 꽉 채웠다.
만개한 꽃처럼 가슴이 활짝 벌어졌다.
엘리자벳에 빙의한 후 수많은 보석과 명품을 소유했지만, 지금처럼 심장이 떨려본 적은 없었다.
“우리 둘이 버거킨에서 식사했던 날을 기억하는가?”
“오웬 님과 더글라스 님도 있었는데요.”
방해꾼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듯 니콜라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쇼핑하러 오셨다는 말씀이 사실이셨군요?”
“말을 타고서, 그대와 어디든 가고 싶었다.”
니콜라이의 목소리가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다이아몬드보다 반짝이는 설렘이 되어.
“그대가 납치당한 걸 알고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폐하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대를 지키지 못한 것은 무조건 내 탓이다.”
“결국, 구해주러 오셨잖아요.”
“살이 찢기는 큰 상처를 입었다.”
고작해야 찰과상이었는데.
수잔의 특제 연고 몇 번 바르니까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하지만 니콜라이의 기억은 사뭇 달랐다.
사소한 상처가 그에게는 엄청난 부상으로 기억되는 듯했다.
날 지키려는 마음.
내 이름을 또렷이 새겨 넣은 안장.
니콜라이의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만일 그대를 잃었다면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
“그대를 연무장으로 초대했던 것도 기마술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연무장이요?”
“버러지 같은 불청객들이 먼저 오는 바람에 꼬여버렸지만 말이다.”
니콜라이가 아드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브렌든 후작 등등이 몰려들어 날 욕할 때구나. 왜 연무장으로 부르나 했더니, 기마술을 보여주려고…….’
이 남자, 또 귀엽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결국 니콜라이의 기마술은 구경도 못 했다.
브렌든 후작과 엮이며 사건 사고에 휘말렸다.
하지만.
“같이 타 주겠는가, 엘리자벳?”
니콜라이가 손을 내밀었다.
언제든 그가 내미는 손을 맞잡고 싶었다.
가끔은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서.
아니, 너무나 그러고 싶어서.
***
더글라스가 기사들과 함께 돌아온 후에도 수잔은 좀처럼 안심할 수 없었다.
요즘은 발작도 없고, 약제사 일도 익숙해졌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조마조마했다.
그런 수잔의 말 상대가 되어주는 건 언제나 프란츠였다.
“엘리자벳 언니는 무사하시겠지요? 폐하의 노여움을 사서 얼음탑에 갇히면 어쩌죠?”
“폐하께서 분노하셨다면 네틀톤 후작부터 처형하셨겠지.”
“처, 처형이라고요……?”
수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찔끔 놀란 프란츠가 서둘러 변명했다.
“아, 미안. 실언이야.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 벌어진대도 내가 막을 것이다.”
“전하께서요?”
“물론이다. 그대를 위해 무슨 일이든…… 아니, 문학 교수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다.”
프란츠가 서둘러 말을 고쳤다.
고귀한 소년의 말실수를 눈치채지 못한 수잔이 방긋 웃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여요. 전하께서는 정말 다정한 분이세요.”
“그런 말 곧잘 듣는다.”
프란츠가 벌꿀색 금발을 긁적이며 수줍어했다.
‘전하께서는 정말 귀여우셔. 볼도 보들보들 오동통하시고. 한번 만져보고 싶다. 아, 내가 무슨 생각을……!’
수잔이 속마음을 애써 지우고 화제를 돌렸다.
“오라버니가 그러시는데, 폐하와 엘리자벳 언니는 아마도 당분간 돌아오지 않으실 거래요.”
“그런가…….”
“엘리자벳 언니는 도망자 신세가 됐는데, 우리가 도울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
“네. 전하랑 저랑.”
수잔이 손가락으로 프란츠와 자신을 번갈아 찍으며 눈매를 곱게 접었다.
그것도 잠시 고운 얼굴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였다.
“송구합니다! 제가 너무 건방지게 굴었어요. 제국의 작은 하늘이신 황태자 전하께…….”
“어려워할 것 없다. 나는 그대를…….”
프란츠가 말을 잇지 못했다.
프란츠의 얼굴도 수잔 못지않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색하고도 달짝지근한 침묵이 응접실에 감돌았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프란츠가 안락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카레스에게 가보자. 그라면 뭔가 알고 있을 것이다.”
***
열세 번째 신전은 제국 남서부에 있는 작은 신전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이라고도 했다.
덕분에 성지순례객과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좁은 길도 시골치고는 비교적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안장이 편안해서일까.
아니면 니콜라이에게 반쯤 안겨 있기 때문일까.
까마득할 정도로 높은 말에 타고 있음에도 불편함을 몰랐다.
뒤쪽 안장에 앉은 니콜라이도 편안해 보였다.
나는 그야말로 니콜라이에게 폭 안긴 상태였다.
내 등은 그의 가슴에 맞붙어 있었다.
이게 바로 그 백허그?
눈을 치켜뜨면 니콜라이의 콧대가 보였다.
심장이 뛰는지, 말이 뛰는지 헛갈릴 지경이었다.
빠르게 달릴 때는 엉덩이가 아팠지만,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아쉬움이 불어났다.
의문도 더해졌다.
‘니콜라이도 왜 신전에 가는 거냐고 묻지를 않네. 더글라스도 그러더니.’
더글라스는 그렇다 치고.
니콜라이 성격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제가 그 여관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향기를 맡았다.”
“무슨 향기요?”
“그대에게서 흘러나오는 특별한 향기.”
은유적인 표현일까?
안 씻어서 땀 냄새가 났다는 뜻일까?
의아해하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니콜라이가 답했다.
“아칸소 추기경 덕분에 그대가 신전을 찾으리란 건 알고 있었다.”
“저승꽃을 연구하는 그 최연소 추기경 말씀이신가요?”
“그대가 어떻게 알지?”
두 번째 신물을 찾느라 황궁에 있는 신학 서적을 몽땅 뒤졌다.
유명한 신관에 대한 정보도 싹 모았다.
그걸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워낙 유명하잖아요. 신탁을 듣는 유일한 신관이라던데. 아칸소 추기경이 제 이야기를 했다고요?”
“그자가 그대를 만나고자 했다.”
“저를요? 왜요?”
“신탁을 전하기 위해서.”
신탁이라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아직 놀라긴 일렀다.
“내겐 말하지 않더군. 신탁을 들을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그런데 저는 왜…….”
“모라신시아 여신의 신물을 가졌으니까.”
“!”
하마터면 안장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심장이 덜그럭거렸다.
안장 손잡이를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들통난 거짓말 때문에 떨어지지 않았다.
“신물로 핀치가 중독된 사실을 알아챈 건가?”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영매라는 형편없는 소리를 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굳이 따져볼 생각은 아니었다만.”
“이상하다고 느끼시고도 왜 가만두셨어요? 제가 전하에게 독을 먹인 진짜 범인일 수도 있잖아요.”
니콜라이가 쿡 낮은 웃음을 흘렸다.
“본인이 꽤 그럴싸한 거짓말쟁이인 줄 아는군.”
“아닌가요?”
“거짓말을 한다면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그대는 거짓말에 소질이 없어.”
믿어준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저도 비밀 있거든요.”
“비밀과 거짓말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어떻게 달라요?”
“남을 속여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 거짓말이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거나, 혹은 이해받지 못할 거란 두려움 때문에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비밀이라 하고.”
“폐하께도…… 비밀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