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우리 폐하가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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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우리 폐하가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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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우리 폐하가 달라졌어요
2023.05.16.
말발굽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침묵의 끝자락에서 니콜라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셀 수 없이 많은 비밀이 있다.”
“어떤 비밀들인가요?”
“너무 무거워서 늘 주저앉고 싶은 것들이다.”
“…….”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 본 적은 없지만.”
공허한 울림이 내 심장까지 전해졌다.
니콜라이가 약한 소리를 할 때면 나 또한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했다.
‘원작에선 니콜라이의 악행만 그려질 뿐, 자세한 내면은 나오지 않아. 그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이 많았을 텐데…….’
나 역시 니콜라이의 본모습을 잘 몰랐다.
그의 아름다움에 설레고, 그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면서도.
원작 폭군이자, 바람둥이니까 그러려니 체념할 때가 많았다.
정작 편견에 휩싸인 건 내가 아니었을까?
그에게서 내가 보고 싶은 면만 보아온 것은 아닐까?
「폐하께서는 왜 그리 많은 황비를 얻으신 걸까요?」
더글라스의 의문이 긴 파문을 남겼다.
나는 그의 가슴에 조금 몸을 기댔다.
움찔거리는 니콜라이의 반응을 조금쯤 모른척하며.
“확 털어놓으세요. 놔버리셔도 좋고요. 한 번뿐인 인생인데 뭐 어때요?”
“내가 털어놓는다면 그대도 말해주겠는가?”
“뭘 듣고 싶으신데요?”
“엘리자벳 엠스터에 대한 모든 것.”
“……!”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주면 좋겠다. 우리가 만나던 그 순간부터 오늘까지.”
니콜라이가 탁한 음성을 뱉었다.
심장 한구석을 깨물린 듯 쓰라렸다.
‘알고 있었구나. 내가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걸.’
예기치 않아서 떨지도 못했던 첫 키스.
계약서와 유혹게임.
니콜라이와 날 둘러싼 모든 것은 작전이고 계획이었다.
변수와 충동이 더해지긴 했지만, 자연스러운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니콜라이처럼 영민한 남자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냥 모른 척해 준 것이리라.
‘어디서부터 털어놓아야 할까. 믿어줄 수 있을까. 미친 사람 취급을 하진 않을까?’
처음 빙의했을 땐 살고 싶다는 욕구뿐이었다.
클라우디아를 막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니콜라이를 만난 뒤부터 계획이 모조리 뒤틀렸다.
그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 탓이었다.
상처받게 되리란 걸 알았다.
그런데도 무작정 쏠리는 마음을 거둘 수 없었다.
그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내 비밀이 그에게 상처가 될까 봐, 상처받은 그가 날 영영 떠날까 두려웠다.
“때가 되면 전부 말씀드릴게요. 약속해요.”
고개를 떨어뜨리며 남루한 대답을 내놓았다.
“……기다리마.”
건드리면 부서질 듯 쓸쓸한 목소리로 니콜라이가 대답했다.
‘폐하는 왜 여인들을 모으셨나요? 어떤 비밀들이 폐하를 그렇게도 괴롭히는 건가요?’
입술을 꼭 물었다.
내 이야기는 숨긴 채, 니콜라이에게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재촉할 수 없었다.
우린 언제까지 서로의 표면만 어루만지고 있을까.
“신물에 대해서 전부 설명드릴게요. 네틀톤 후작저의 예배당에 갔을 때 생긴 일이에요.”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얻게 된 과정을 압축해서 전달했다.
전생과 빙의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마성을 가졌다는 것도, 그것을 이용해 그를 유혹하려 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에도 마녀라 불리는 여자들이 있었다.
검은 고양이를 키우고, 빗자루를 타는 동화 속 마녀는 아니었다.
독특한 생김새나 재능을 가진 여성.
관습이나 권위에 도전하는 유부녀.
돈 많은 과부.
그런 여성들이 주로 마녀란 누명을 쓰고 사라져갔다.
남성들도 마녀와 동침했다거나 악마가 씌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어느 세계나 조금씩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제거하는 방식은 비슷비슷한 모양이었다.
‘마성을 가진 나는 마녀 지명 영순위겠지. 이 사실이 밝혀지면 단두대가 아니라 화형대로 보내질 거야.’
원작 엘리자벳도 그게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을 유혹해서 제 편으로 만들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 모노클에 병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을 줄은 몰랐다.”
니콜라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알아도 별수 없더라고요. 저는 치료사도 아니고, 약제사도 아니니까요.”
“신물을 착용하지 않으면?”
“폐하와 다름없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에요.”
‘평범한 인간’이라는 말에 니콜라이가 멈칫했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몸에서 스멀스멀 불안이 피어올랐다.
“말실수를 했어요.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에요.”
“그거나 그거나.”
“그러네요.”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로 시몬을 본 적 있나?”
“아주 건강했어요. 술 때문에 간이 좀 상했다는 걸 빼면요.”
“결투장에서는?”
“그땐 신물이 없었어요.”
“있었다면 시몬의 변화를 눈치챘을까…….”
니콜라이가 말끝을 흐렸다.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대리석 조각처럼 무표정했다.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그날 시몬이 발병했다. 어떤 조짐도 없었거늘.”
“발병이라고요?”
“나는 그를…… 아니, 그 병을 막아야만 했다.”
숨이 턱 막혔다.
손끝부터 차갑게 굳었다.
오랫동안 날 괴롭혀 온 의문이 풀리려는 순간이었다.
“병 때문에 죽이셨다는 말씀이에요? 대체 무슨 병인데요?”
“그것은…….”
그때 한 무리의 기병들이 지축을 울리며 등장했다.
새하얀 신관복 위에 은색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모라신시아를 상징하는 천칭 문양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성기사로군.”
“폐하를 마중 나온 걸까요?”
“마중을 나오는데 발검을 하겠느냐?”
손날을 세워 햇빛을 가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보니 대부분이 검을 들고 있었다.
목숨 건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처럼.
“아쉽게도 환영 사열은 아닌 것 같네요.”
“손님 대접이 퍽 요란하구나.”
“아무리 그래도 황제한테 너무 함부로 하는 것 아니에요?”
“그대를 닮았다.”
니콜라이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시선을 멀리 던졌다.
“어쩌시려는 거예요?”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피를 원하면 피를 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 니콜라이도 검을 든 상태였다.
왠지 즐거워 보이는 건 착각일까?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연무장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기마술을 보여주마. 나는 그대를 말에 태운 채로 저놈들 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꼭 봐야 해요?”
“후회할 텐데?”
니콜라이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가 제멋대로 굴고 싶을 때 보이는 표정이었다.
***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전하?”
카레스가 수잔과 프란츠를 내려다봤다.
수잔은 카레스의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턱을 꼿꼿하게 세운 프란츠가 명령하듯 물었다.
“폐하께선 어디로 가셨는가?”
“모릅니다, 전하.”
“언제쯤 돌아오시지?”
“그 또한 모릅니다.”
“내무대신이라는 자가 아는 건 무엇인가?”
“저의 소임은 출궁하신 폐하를 쫓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만으로 충분히 분주합니다.”
카레스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바쁘니까 꺼지라는 말로 들렸다.
발끈할 줄 알았던 프란츠의 얼굴에 묘한 빛이 스쳤다.
“브렌든 후작이 얼음탑에 갇혔다고 들었다. 엘리자벳을 납치하려 한 자도 그놈이라고.”
“소문이 빠르군요.”
“내게 독을 먹인 범인도 그놈이겠지. 엘리자벳을 도망자 취급하는 건 그만둬.”
“흠…….”
“추격대도 거둬. 엘리자벳이 무고함을 내가 증명할 것이다.”
수잔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프란츠를 바라봤다.
‘이럴 땐 정말 의젓하셔. 보양제를 드신 후로 키도 부쩍 크셨어. 조금만 지나면 나보다 커지시겠지.’
수잔은 또래보다 체구가 작았다.
16살이지만 제 나이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 수잔에게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프란츠는 경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카레스에게 프란츠는 훼방꾼에 불과한 듯했다.
“저의 권한 밖입니다, 전하. 황태자궁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황태자의 이름으로 명하는 것이다.”
“송구하옵게도 전하께는 아무 권한이 없으십니다.”
“!”
“안전한 황태자궁에 얌전히 머물러 계십시오.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프란츠를 내려다보는 카레스의 눈빛이 겨울 바다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얌전히? 전하를 협박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오해겠지? 카레스 님은 폐하의 충신이잖아?’
수잔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프란츠를 바라봤다.
힘없는 황태자란 모욕을 들었으니 참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프란츠는 웃었다.
그것도 아주 활짝.
“충고 고맙네, 카레스. 바쁜 사람 방해해서 미안하군.”
웃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수잔은 가슴 위에 손을 포갰다.
황태자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프란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수잔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물어뜯었다.
우뚝 멈춰선 프란츠가 수잔을 돌아봤다.
“솔직히 난 얌전히 있고 싶지 않은데. 수잔 생각은 어때?”
“전하의 뜻을 따르겠어요.”
“무조건 따를 필요 없어. 수잔의 의견을 듣고 싶은 거니까.”
수잔은 얼굴을 붉히며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어쩌실 생각이신데요?”
“이름뿐인 황태자 노릇은 관두고 싶어. 엘리자벳도 돕고 싶고. 일단 네틀톤 후작을 만나야겠어.”
“오라버니를요?”
“같이 가주겠어?”
프란츠가 수잔에게 손을 내밀었다.
작은 손엔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었다.
오래된 상처로 얼룩진 그 손이 짧지만 고된 삶을 증명하고 있었다.
“전하께 제가 도움이 될까요?”
“수잔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힘이 돼.”
프란츠가 수잔을 향해 미소 지었다.
저보다 작은 손을 맞잡으며 수잔이 고개를 푹 숙였다.
프란츠가 꿰고 있는 개구멍은 카나리아 방뿐만이 아니었다.
***
신전 코앞에서 성기사들과 피를 보겠다고?
이보다 최악의 상황이 있을까.
하지만 니콜라이는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신나 보였다.
“성역에서 말굽 먼지를 내다니! 당장 내리지 못하겠느냐?”
목숨을 재촉하는 줄도 모르는 성기사들 중 한 명이 외쳤다.
니콜라이가 황제라는 사실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멀쩡한길에서 말을 탔다고 시비를 거는 인간들이니 그럴 만도 했다.
“폐하. 지금이라도 내리는 게 어때요?”
“내 땅인데 내가 왜 그래야지?”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성기사 나부랭이의 명령에 따르는 황제는 세상에 없다.”
“우린 두 번째 신물을 찾으러 온 거예요. 충실한 시종처럼 따르겠다 하셨잖아요?”
입술 도장까지 찍었는데.
인제 와서 발뺌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대가 옳다. 괜히 싸움할 필요 없지.”
웬일로 니콜라이가 수긍했다.
손뼉 치며 칭찬을 쏟아냈다.
“역시 자애롭고 현명하신 폐하! 한번 참아주세요. 저들도 곧 땅을 치고 후회할 거예요.”
니콜라이가 순순히 검을 집어넣었다.
‘어머, 우리 애가 달라졌…… 아니, 우리 폐하가 달라졌어요!’
순수하게 감격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니콜라이가 뒤통수를 격하게 내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