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 그대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 (75/97)


#75. 그대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
2023.05.19.



“이걸로 해결하겠다.”

니콜라이가 허리띠 뒤쪽에서 반짝이는 뭔가를 꺼냈다.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의 날붙이 네댓 개였다.


“그게 뭐예요?”

“주문 제작한 단도다. 그대의 물건을 빌려 써보니 꽤 쓸모 있더구나.”

인정하기 싫지만, 별수 없다는 투로 니콜라이가 대답했다.

더글라스가 선물한 단도로 시몬을 처치하던 순간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안 싸우신댔잖아요?”

배신감에 몸서리치며 발끈했다.

그가 눈부시게 빛나는 치열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내가 왜 싸우느냐? 몰살시켜버리면 간단한 것을.”

“뭐라고요?”

“안 싸워. 싸우는 건 치고받고 하는 거야.”

그 미소가 너무 해맑아서 등골이 오싹했다.


“뒷감당을 어찌하시려고요?”

“황제에게 발검한 것만으로도 처형감이야.”

“저 사람들은 폐하의 정체를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친히 가르쳐주려는 것 아니냐?”

니콜라이가 손가락 사이에 낀 단도를 치켜세웠다.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똑똑히 말씀드리는데 성기사들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마세요.”

“협박하는 것이냐?”

“이 경고도 무시하면 폐하랑 저는 여기서 끝이에요!”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니콜라이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잡혔다.


“무엇이?”

“키스도, 포옹도, 백허그도, 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같은 말을 타는 것도 전부요!”

“한 침대?”

니콜라이가 되물었다.

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얌전히만 굴면 그걸 전부 다 계속 해준다는 뜻 같잖아?

아니나 다를까, 니콜라이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알았다. 무조건 그대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

“정말이세요?”

“생쥐 몇 마리 때문에 제일 좋은 일을 금지당할 수는 없지.”

“폐하!”

니콜라이가 시원스레 웃었다.

어느새 성기사들이 우리를 포위했다.

그들은 두 뺨을 다홍빛으로 붉힌 나와 웃음을 멈추지 않는 니콜라이를 바라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승을 떠나게 될 뻔했다는 것도 모른 채.

***

열세 번째 신전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마굿간에 갇힌 거지만, 어쨌든.


“열세 번째 대신관을 만나고 싶어요.”

굵은 밧줄로 손목이 묶인 내가 말했다.

가소롭다는 듯 성기사가 코웃음 쳤다.


“성역에 함부로 말을 타고 들어서는 무례한 이교도가 감히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오.”

“꼭 봬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장로회에서 처분을 기다리시오.”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가두는 거죠? 이건 명백한 범죄예요!”

“여기선 교회법이 우선이요. 따지려거든 여신께 따시지요.”

마구간 문이 거칠게 닫혔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빗장도 모자라 자물쇠까지 잠근 모양이었다.


“뭐 저런 것들이 다 있지?”

짜증이 확 밀려왔다.

니콜라이가 무심하게 답했다.


“광신도들은 다 저렇다. 무슨 말만 하면 종교탄압이라느니 박해를 한다느니 악다구니를 써대지. 시끄러운 놈들.”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대가 얌전히 있으라 하지 않았는가?”

기가 찰 만큼 순박한 표정으로 니콜라이가 대답했다.

손목에 칭칭 묶인 밧줄도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말 분뇨와 건초 냄새가 가득한 마구간에서 블랙윙이 즐겁다는 듯 콧소리를 냈다.


‘주인이고 말이고 아주 똑같네. 다들 여유로워!’

씩씩거리는 내게 니콜라이가 말했다.


“잠시 후면 놈들이 석방을 제안할 것이다.”

“정말요?”

“거액의 기부금을 요구하면서.”

말문이 턱 막혔다.

치유의 여신을 모신다고 해서 청렴한 줄 알았는데.

어딜 가나 부패한 인간들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장사잖아요? 아니, 사기 같은데요?”

“내가 이래서 신관 나부랭이들을 싫어한다. 아칸소 추기경은 좀 달라 보이더라만.”

“그 사람을 찾아갈 걸 그랬어요.”

도망칠 때만 해도 아칸소가 니콜라이를 찾아갔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게 신탁을 전하겠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니콜라이가 물었다.


“왜 열세 번째 신전을 고른 것이냐? 가장 오래된 신전이라는 것만 빼면 특별할 것도 없는데.”

“더글라스 님의 조부께서 독실한 모라신시아 교도셨대요. 병명을 알 수 없는 환자 때문에 여러 신전을 방문하셨는데…… 열세 번째 신전에 특히 자주 오셨대요.”

“그랬군.”

“첫 번째 신물을 네틀톤 후작저에서 찾았잖아요. 그래서 이곳에 와본 거예요. 대신전에서 신물을 달라고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테니까요.”

그 환자가 ‘라일라’라는 걸 니콜라이도 눈치챘을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다른데 팔려 있었다.


“더글라스가 그러더냐?”

날 바라보는 니콜라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찔끔했다는 걸 숨기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 그가 잔소리를 쏟아냈다.


“나와 의논했으면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더글라스의 허접한 정보에 의지하니까 시간 낭비만 하는 거다.”

“폐하도 신물에 대해서는 모르시잖아요.”

“그런 물건을 손에 쥐는 건 너무 간단하다.”

니콜라이가 오만하게 턱을 쳐들었다.

호기심과 기대를 담아 그를 돌아봤다.


“어떻게요?”

“황명으로 가져오라 명하면 된다.”

“그건 강탈이잖아요!”

“군사를 풀어 전국의 신전을 뒤지는 것도 좋지. 지하창고부터 첨탑까지 압수수색을 하면 뭔가는 나오지 않겠느냐?”

“그건 약탈이고요. 하아…….”

역시 니콜라이에게 먼저 말하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종교 단체를 건드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데.


“모라신시아의 신물을 모아야 한다고?”

“첫 번째 신물을 얻었을 때, 그런 요구를 받았어요. 그래서 팔자에도 없는 보물찾기에 나선 거고요.”

“세 번째, 네 번째도 있다는 뜻인가…….”

“저도 궁금해요.”

밧줄 때문에 욱신거리는 손목을 흔들며 투덜거렸다.

니콜라이가 밧줄을 끊어줬다.

옷자락 밑으로 튀어나온 실오라기를 뜯어내듯 간단하게.

그가 클라우디아 못지않은 실력자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손목을 주무르며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하얀빛만 아니었다면 이 고생할 일도 없었을 텐데. 빙의시켰으면 거기서 끝이지, 왜 미션 같은 걸 주고 난리야? 영혼 소멸 플래그는 뭐고?’

의로운 사망자.

그것이 하얀빛이 내게 붙인 이름이었다.

전생에서 어린아이에게 산소호흡기를 양보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포자기한 심정에 삶을 놓아버린 것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로운 사망은 아니었는데.

모라신시아가 뭔가 착각한 걸까?


“아무래도 그대는 여신에게 선택을 받은 것 같다.”

니콜라이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신물도 그대만 사용할 수 있다. 초월적인 존재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설명하기 힘들다.”

“……최악이네요.”

“치유의 여신은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자애롭지 않다. 독선적이고, 괴팍하지. 멋대로 남의 인생을 착취하기도 하고.”

경험담을 털어놓는 것처럼 니콜라이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선황께서 모라신시아의 도움으로 저승꽃을 퇴치하셨잖아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 신도 마찬가지다. 내가 잘 알아. 인간보다 더 철저하게 대가를 요구하지.”

“선황께서 대가를 치르셨나요?”

여러 신학 서적을 뒤졌지만 그런 역사는 읽은 적 없었다.

그저 선황의 헌신과 모라신시아의 위대함을 찬양할 뿐이었다.


“당신의 인생은 물론 아들의 인생, 후대의 인생 모두를 여신에게 바쳤다. 저승꽃을 막고 감시하는 대가로.”

니콜라이의 관자놀이에 푸릇한 혈관이 도드라졌다.

분노와 노여움, 좌절 등 수많은 감정이 그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갔다.


‘아들과 그 후대라면 니콜라이와 프란츠잖아? 인생을 바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에는 백번 공감했다.

하얀빛도 내게 그랬다.

특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지만, 죽기 싫으면 신물을 찾아내라는 협박과 다름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신이 황족까지 억압할 줄이야.


“저승꽃은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왜 감시가 필요해요?”

“그건…….”

“저승꽃이 또 유행할 수도 있다는 건가요?”

니콜라이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나는 이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클라우디아와 시몬의 결투장.

내가 서 있던 울타리가 무너지고 결투가 재개되었을 때, 그는 지금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시몬이 저승꽃에 걸렸던 건가요?”

니콜라이의 눈동자가 잘게 요동쳤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가 설명조차 하지 않았던 시몬의 죽음.

모라신시아에게 휘둘려야 하는 황족의 운명.

그 모든 것은 저승꽃의 재창궐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래서 하얀빛이 날 선택한 건가?’

아찔한 현기증이 밀어닥쳤다.

모라신시아의 신물을 모으라 한 이유가 어렴풋, 드러나는 듯했다.

***

네틀톤 후작 저택 앞에 병사들이 서 있었다.

더글라스는 가택 연금 중이었지만, 병사들은 클라우디아를 막지 않았다.

방문객 금지 명령이 떨어졌더라도 제국의 샛별로 급부상한 신임 기사단장을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더글라스가 정원으로 클라우디아를 마중 나왔다.


“안색이 나쁘군.”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클라우디아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더글라스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통 입맛이 없어서.”

“엘리자벳 때문인가?”

“내가 엘리자벳 생각만 하고 사는 줄 알아?”

“아니었나?”

“날 과소평가하지 마, 라디아.”

엘리자벳을 두고 홀로 돌아왔으니 속이 타들어 가겠지.

여전히 엘리자벳만 바라보는 더글라스와 그런 더글라스를 너무 잘 아는 자신이 씁쓸한 클라우디아였다.


“폐하께서 널 얼음탑으로 보내지 않은 것이 놀랍다.”

“엘리자벳이 날 변호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몰라.

“엘리자벳도, 폐하도 허튼짓이나 하는 부류는 아니지.”

“두 분을 믿는 건가?”

더글라스의 표정에 이채가 스쳤다.

클라우디아가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무작정 신뢰하는 건 아니다.”

“네가 힘을 보태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기뻐.”

“뭐가 기쁘다는 건가?”

“나의 친우 라디아가 출셋길에 오르는데 기쁘지 않을 수가.”

더글라스의 농담에도 클라우디아는 웃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개혁이야. 폐하께서 진실하시다면 나는 예브레이 황실을 수호할 것이다.”

“패도를 걸으신다면?”

“주군을 시해한 죄를 평생 짊어지겠지.”

“라디아가 결심했으니, 제국의 앞날은 걱정 없겠군. 황태자 전하의 안녕도.”

더글라스는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한결같은 선의와 충심이 클라우디아는 못마땅했다.


“바보군. 엘리자벳을 차지하려면 폐하를 폐위시키는 게 나을 텐데.”

“내가 바보라는 게 그렇게 유명한가?”

“장난치지 마, 더기.”

“나는 진심으로 엘리자벳을 연모해, 라디아.”

알고 있다.

그러니 그런 눈빛으로 다시 일깨울 필요는 없다.

클라우디아가 입 안쪽 살을 세게 깨물었다.

더글라스의 눈빛이 너무 맑아서.

엘리자벳을 향하는 마음이 너무나 곧아서.

더글라스의 사랑을 독차지한 엘리자벳이 미칠 듯 부러워서.


“본인은 인정하지 않지만, 엘리자벳도 개혁을 꿈꾸고 있어. 폐하와 전하의 안전을 바라고. 나도 그녀와 같은 걸 바랄 뿐이다.”

“한심하다.”

“그럴지도.”

진짜 한심한 것은 가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더글라스만을 바라보는 자신이었다.


‘더글라스는 엘리자벳을 갖기 위해 폐하를 시해할 수 없어. 하지만 나는 목적을 위해 엘리자벳을 없앨 수 있다.’

무방비 상태로 두 팔을 늘어뜨린 엘리자벳이 떠올랐다.

핏줄이 비치던 투명한 피부와 가느다란 목.

그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또한 쉬 상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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