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오해는 질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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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오해는 질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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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오해는 질색입니다
2023.05.23.
‘하지만 그녀를 죽일 순 없다. 명분도 실리도 없으니까.’
예전엔 엘리자벳을 처형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야 더글라스도 정신을 차리고 악녀 따위는 포기하게 될 거라 믿었다.
‘지금의 엘리자벳은 황태자 전하를 구하고, 부패한 권력을 파헤쳤다. 더글라스도, 폐하도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어. 수잔이나 황태자 전하까지도……. 그녀를 살려두는 것이 명백한 이익이다.’
짝사랑을 품었다 해도 클라우디아는 기사였다.
자긍심을 잃지 말 것.
함부로 검을 뽑지 않을 것.
끊임없이 단련하여 정의를 바로 세울 것.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회는 없었다.
가끔 지긋지긋했다.
고백 한번 해보지 못하고, 진심 한 조각 내보인 적 없이 흘러간 시간이.
‘나도 변하고 싶다. 더글라스를 가지고 싶다.’
클라우디아의 푸른 눈이 투명하게 반짝였다.
짝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갈증을 머금고서.
“폐하와 엘리자벳이 서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할 거지?”
“라디아…….”
“엘리자벳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그녀의 행복을 원한다면 말이다.”
“엘리자벳과 폐하는 이루어질 수 없어.”
더글라스가 허허롭게 웃었다.
“폐하께서 여러 여인을 가까이하기 때문인가?”
“이유는 모르지만, 폐하는 방탕한 분이 아닌 듯해.”
“그렇다면 엘리자벳에게 진심이시겠군. 폐하는 그녀를, 그녀는 폐하를 원하는 거다.”
“진심으로 연모해서 더 불행해지는 연인도 있지.”
더글라스가 애써 입매를 끌어올렸다.
미소처럼 보이지 않아서 더 슬픈 얼굴이 되어버렸지만.
“해괴한 논리로군.”
“폐하가 소문처럼 여인을 밝히시는 건 아니지만, 여러 황비를 둔 건 사실이지. 처지 바꿔 생각해 봐, 라디아. 사랑하는 남자가 여러 아내를 거느린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도 그걸 이해할 수 있겠어?”
“!”
“그가 널 사랑한다고, 너밖에 없다고 고백하면서 새로운 아내를 계속 들인다면…… 그거 견뎌낼 수 있겠어?”
클라우디아의 눈동자가 경련하듯 흔들렸다.
제 마음 일부를 들킨 것만 같았다.
“엘리자벳은 황비 중 하나로 만족할 여인이 아니야. 두 사람이 서로를 원하고 사랑하는 만큼 이별은 빨리 다가오겠지.”
“너는 그때를 기다리는 거고?”
클라우디아가 꼬집었다.
“비루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다.”
더글라스가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졌다.
평소라면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 했을 것이다.
네 연애사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우린 친구에 불과하다는 듯.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변하고 싶었다.
“널 사랑하는 여인이라면 너의 그 한심한 모습도 보듬어 줄 거다.”
더글라스가 눈을 크게 떴다.
클라우디아가 마지막 용기를 그러모았다.
“진정 사랑한다면. 빌어먹을 상황을 바꿔놓을 거야. 상대를 독점할 수 있도록.”
더글라스의 갈색 눈동자가 둥그렇게 벌어졌다.
그가 뭐라 덧붙이기 전에 브렌든 후작에게 들었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폐하는 어떤 여인도 품지 않으셨다. 황비 중 누구와도 동침한 적이 없어.”
충격에 휩싸인 더글라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클라우디아도 처음엔 그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쉬쉬하고 있지만, 황비들은 폐하께 신체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타고나길 여인을 품지 못하는 몸이라고.”
“누가 그런 말을 했지?”
“로즈 황비. 은밀히 사람을 풀어 확인해보니 사실이더군.”
이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클라우디아는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황태자의 출생을 둘러싼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므로.
***
“사라졌던 저승꽃이 다시 시작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목구멍에서 갈라진 쇳소리가 올라왔다.
니콜라이도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슬픈 표정을 지을 리 없었다.
“시몬이 발병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냄새를 잘 맡는다.”
“……냄새라고요?”
“저승꽃의 악취를 특히 잘 맡는다. 아니, 오직 그 냄새만 맡으며 살아왔다. 제위를 잇는 그 순간부터.”
니콜라이의 중저음이 아스라이 흩어졌다.
선황제부터 이어진 운명.
예브레이 황실이 짊어져야 했던 대가에 대해서 니콜라이가 설명했다.
“저승꽃에 걸렸거나, 저승꽃의 씨앗을 가진 자들은 특유의 악취를 풍겨. 놈은 그 냄새를 먹고 살아가지. 나는 놈과 함께 그 냄새를 쫓고, 격리한다. 저승꽃을 감시하고, 막는 것이 황제의 의무다.”
“놈이라니요?”
“그 놈은…… 내 안에서…….”
니콜라이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수치스러운 실수를 털어놓는 소년처럼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무 무거워서 주저앉고 싶었던 비밀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의 서문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에게 모든 냄새는 그저 악취로만 느껴질 뿐, 구별할 수 없다. 내 후각은 오직 저승꽃의 악취에만 반응해왔다. 하지만 그대는 달랐다.”
문득 그가 눈을 치켜떴다.
숲과 바다의 푸르름을 담은 눈동자에 간절한 빛이 스며들었다.
“무슨 의미인가요?”
“처음 보던 날. 파티장에서 그대에게서 흘러나오는 향기를 맡았다. 즉위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니콜라이가 성큼 다가왔다.
날렵한 콧날이 닿을 듯 가까웠다.
내 목덜미에서 숨결을 빨아당긴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악취로 마비된 감각을 씻어내듯 청명한 향기였다. 달콤하면서도 싱그럽고, 강렬하지만 결코 질리지 않는. 내가 맡는 유일한 향기는 오직 그대의 체취뿐이다.”
“저의 체취를 쫓아오셨다는 게 사실이었군요.”
“그대가 너무 멀리 있지만 않다면.”
니콜라이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가 어디에 있건 나타나신 거군요. 미행한 것이 아니라…….”
태연해지고 싶었지만, 속절없이 맥이 풀렸다.
어딜 가든 니콜라이가 찾아왔다.
마법을 부리는 사람처럼.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니콜라이가 내게 손을 뻗었다.
흘러내린 선홍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부드러운 손길.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이 저릿거렸다.
내게 고정된 니콜라이의 시선에 사그라지지 않는 불꽃이 일렁였다.
그 불꽃이 내게 옮겨붙어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되고, 때론 참을 수 없는 불기둥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탁한 목소리를 내뱉을 때마다 심장이 요동쳤다.
“그대가 날 여러 번 구했다, 엘리자벳.”
“폐하…….”
“돌아버리게 만들기도 했지. 참을 수 없이 달콤했으니까.”
지금도 참기 힘들다는 듯 니콜라이가 미간을 좁혔다.
그가 엄지로 내 입술을 쓸었다.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행동이었으나, 여린 살갗에 타는 듯 낯선 감촉이 맺혔다.
숨 쉬는 것이 곤란했다.
심장은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공간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와의 거리가 점점 좁아졌다.
닿을 듯 가까워진 입술.
입안에 흠뻑 침이 고였다.
그의 입술이 어떤 감촉인지, 무슨 향인지 또렷이 기억하는 탓이었다.
“……그래서 음식 맛도 느끼지 못하시는 거예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전에서 낯뜨거운 일을 벌일 듯했다.
“황태자 시절에는 몰래 황궁을 빠져나가 꼬치구이를 먹었다. 그 맛이 이젠 기억나지 않아.”
침통한 얼굴로 니콜라이가 과거를 더듬었다.
그와 함께 갔던 남루한 식당이 어제 다녀온 것처럼 생생했다.
고소한 기름 냄새, 입맛을 돋우는 불 냄새, 각종 채소와 향신료가 어우러진 소스 냄새.
잘 구워진 꼬치를 내 앞에 가지런히 놓아주던 니콜라이.
턱을 괸 그는 즐겁다는 듯 내가 음식을 오물오물 씹는 모습을 지켜봤더랬다.
‘그래서 늘 기계처럼 먹었구나. 악취밖에 느끼지 못한다니, 사는 게 너무 끔찍할 것 같아…….’
몇 마디 말로 니콜라이가 견뎌온 삶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역병의 참혹한 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생의 나는 신종 전염병으로 죽었다.
전염률과 치명률이 높고, 치료법은 없는 병은 저주 그 자체였다.
견고한 줄 알았던 의료 체계도, 콧대 높은 과학기술도, 오랜 문화로 쌓아 올린 인간성도 무너지는 건 모두 한순간이었다.
니콜라이의 세계에서는 더욱 참혹한 결과를 불러일으켰을 터였다.
‘그걸 나보고 또 겪으라고?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니야? 이러려고 빙의시켰어?’
스멀스멀 전생의 공포가 닥쳐왔다.
새하얗게 질린 눈앞에 쇠스랑처럼 검고 가느다란 죽음의 손가락이 보였다.
그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움켜쥐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으로 끌고 갈 듯했다.
“엘리자벳…….”
니콜라이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가 떨고 있다는 걸 나보다 먼저 눈치챈 까닭이었다.
“미안하다. 그대를 두렵게 할 마음은 없었다.”
“저승꽃이 번지는 걸 막을 방법은 있나요?”
“솔직히 말하면 아무 방도가 없다.”
니콜라이가 수치스러움에 이를 악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감시와 격리뿐이다. 게다가 예전과 달리 저승꽃은 뭔가 변이하고 있다.”
“모라신시아 여신이 도와주지 않을까요?”
“장담할 수 없다. 아칸소 추기경을 만났지만, 신탁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원작에도 아칸소 추기경이란 캐릭터가 등장하던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캐릭터가 있었다면 모를 리 없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꺼림칙한 불안이 뱃속을 휘저었다.
그렇다. 이제부터는 원작에 의지할 수 없는 때가 왔다.
이미 너무 많은 게 뒤집혔다.
저승꽃이란 설정도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칸소 추기경이란 사람을 만나야 해. 내가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가졌다는 걸 알아낸 첫 번째 사람이니까.’
아칸소 추기경은 하얀빛과 관련된 걸까?
도대체 하얀빛은 왜 나를 전염병이 터지기 직전의 세계로 데려온 걸까?
혼란스러워하는 내 어깨에 니콜라이가 손을 올렸다.
“그대의 향기를 맡았을 때 예감했다. 저승꽃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밀어닥쳤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쥐었지만, 현기증을 참기 어려웠다.
“그래서 절 황궁으로 끌고 오셨던 건가요?”
“그대를 놓칠 수 없었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는데.
니콜라이는 멈추지 않았다.
“그대가 처음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래서 곁에 잡아두고 싶었다.”
그래서 계약하자고 덤빈 거야?
황비가 되라고 강요한 거야?
서운함에 온몸의 피가 손끝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니콜라이가 무언가 날 이용하려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나도 그를 이용하려고 접근했으니까.
그런데도 참을 수 없는 불안과 그저 불안이라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함이 또다시 휘몰아쳤다.
첫 만남에서 니콜라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좀 더 솔직해져 봐. 그래야 더 달콤해질 것 같으니까.」
원작 폭군의 농지거리인 줄 알았다.
적어도 날 여인으로 보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니콜라이는 남자가 아니라, 황제였다.
나는 여인이 아니라, 이용 가치를 지닌 대상이었고.
‘오해하지 마, 엘리자벳. 어떻게 시작했든 그와 나눈 감정은 진짜잖아. 네 마음도 진짜고, 그의 눈빛도 진짜야. 그것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지 않아?’
곧이어 어두컴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너무 이상하지 않니, 엘리자벳? 그 중요한 사실을 왜 이제야 말하는 걸까. 네가 두 번째 신물을 찾으러 온 이 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