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내가 그대를 이용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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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내가 그대를 이용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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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내가 그대를 이용했다고?
2023.05.26.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일부러 오해할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를 애써 달랬다.
하지만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아무래도 그대는 여신에게서 선택을 받은 것 같다.」
그 뒤로 니콜라이의 고백이 시작되었다.
그가 날 뒤쫓은 건 아칸소로부터 내가 신물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였다.
기분 나쁜 목소리가 또다시 날 건드렸다.
‘속고 있어. 처음부터 널 이용했을 뿐이라면? 그게 니콜라이의 진심이었다면? 눈빛, 목소리, 입술, 숨결 모두가 잘 짜인 한 편의 연극이라면?’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상한 망상에는 사로잡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의심은 쉬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칸소 추기경의 말을 듣고 이용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거야. 마지막 희망인 널 소유하고 싶댔잖아? 생각해봐. 네가 뭐라고 황제가 직접 널 데리러 오겠어? 처음 황궁으로 납치했을 때처럼 네가 도망가버릴까 봐 잡으러 온 것뿐이라고.’
애써 고개를 저었다.
니콜라이를 바라봤다.
언제나 날 설레게 했던 세계관 최고 미남을.
상황에 따라 가면을 바꿔쓰듯 능숙하게 얼굴을 바꾸는 황제를.
제국의 생사를 어깨에 짊어진 남자를.
“폐하. 왜 저를 쫓아오신 건가요?”
“몰라서 묻나?”
“클라우디아 님을 중심으로 개혁을 시작하는 중요한 시점이잖아요. 저랑 여기 이렇게 계셔도 괜찮아요?”
클라우디아에게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황궁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면 또 다른 추측이 난무할 거였다.
개혁에 성공하려면 클라우디아 뒤에 니콜라이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그걸 모를 리 있을까?
그런데도 왜 니콜라이는 나와 함께 있는 걸까.
‘내가 같이 가자고 부탁했기 때문에? 도망자인 나랑 같이 있어서 득 될 것이 하나도 없는데?’
목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계산적으로 보였다.
그래 봤자 괴로워질 뿐이라는 걸 아는데도.
“괜찮지 않으면? 뭐, 돌아가라는 건가?”
니콜라이가 삐딱하게 물었다.
“내무대신도 반대하셨을 텐데요.”
“카레스는 모르는 일이다. 지금쯤 사라진 걸 눈치챘겠지만.”
“카레스 님께도 숨기셨어요?”
한차례 심호흡 뒤에 니콜라이가 대답했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폐하의 최측근이잖아요? 그분께도 숨겨야 했던 이유가…….”
무슨 이야기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니콜라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금이 간 가슴에서 버석버석 메마른 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데,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폐하는 성역에서 말을 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셨어요. 성기사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예상을 하셨겠지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의심. 아니면 오해.
어쩌면 진실.
나는 여전히 그를 믿고 싶었다.
내가 틀렸기를 바랐다.
그래서 더 날카롭게 물었다.
“일부러 소란을 피우신 건가요? 제가 신전과 척을 지고, 폐하께만 의지하게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니콜라이가 날 노려봤다.
억지라는 걸 나도 안다.
가끔 상처 입었다는 걸 숨기려고 일부러 화를 냈다.
애써 몸집을 부풀리며 뾰족하고 날 선 말을 쏟아내곤 했다.
그러면 덜 아플 것 같아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폐하를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나를 의심하는 건가?”
니콜라이가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거칠게 뒤로 넘겼다.
“합리적이라면요.”
“뭐가? 어떻게?”
“저승꽃 때문에 폐하께도 모라신시아의 신물이 필요하니까요.”
니콜라이의 청록색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육감적인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사이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작 신물 때문에 그대를 쫓아왔다고 생각하다니…….”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남자.
그가 눈을 위로 치떴다.
“내가 그대를 이용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우리의 시선이 맞부딪히며 파르스름한 불꽃이 튀었다.
침묵이 우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그때 잠겼던 문이 벌컥 열렸다.
“장로회에서 처분이 내려졌소. 성역을 침범한 죄를 씻고 싶다면 1인당 백만 골드를 헌금하시오.”
비열한 웃음을 띤 성기사가 말했다.
그가 압류한 내 짐 속에 신물이 들어 있었다.
그걸 알았대도 고작 백만 골드라는 푼돈을 요구했을까?
“성역을 이렇게 말발굽으로 더럽혔는데 고작 백만 골드로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싸늘한 조소를 드리운 내가 말했다.
성기사가 투덜거리듯 물었다.
“뭐라는 거요?”
“여신께 사죄드리는 의미로 천만 골드를 바칠게요. 예배도 올리고요.”
“……지금 진심이시오?”
마성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것만은 니콜라이 옆에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웬만한 저택을 사고도 남을 거액을 부르자 성기사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신 대신관 님께 축언을 부탁드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그, 그건…….”
“아. 이교도는 만나 뵐 수 없다 하셨지요? 그럼 포기해야겠네요.”
아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기회를 놓칠세라 성기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여신께서는 당신처럼 길 잃은 어린 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신관께서도 분명 허락하실 겁니다!”
어느새 말투도 바뀌어 있었다.
나와 니콜라이의 밧줄이 끊어진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들뜬 그에게 명령했다.
“일단 제 짐부터 돌려주세요. 아무나 건드리지 못하게 해주시고요.”
***
황궁을 빠져나오는 건 쉬웠다.
병사의 눈을 피해 네틀톤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오라버니께서 가택 연금 중이셔서 경비가 삼엄해요. 어떻게 할까요, 전하?”
수잔이 물었다.
낡은 헌팅캡으로 빛나는 금발을 숨긴 프란츠가 피식 웃었다.
“전하라는 호칭부터 바꾸는 게 좋겠어. 너무 튀어.”
“그럼 도련님이라 부를게요. 보리츠를 만났을 때처럼요.”
“급해지니까 금세 전하라고 하던데? 그냥 프란츠라고 불러.”
“네?”
“뭘 그리 놀라? 사람을 이름으로 불러달라는데.”
그 명령만은 거둬 달라는 듯 수잔이 창백한 얼굴로 손사래 쳤다.
“제가 어찌 전하의 존함을 부르겠어요!”
“엘리자벳은 반말도 하는데, 뭐.”
“언니는 전하의 스승이시잖아요. 저는 전하와 아무 사이도 …….”
수잔이 웅얼거리며 변명했다.
프란츠의 연두색 눈동자가 흐려졌으나, 잠시뿐이었다.
“정체가 들키면 황궁으로 끌려갈 거야. 방에 갇혀서 꼼짝도 못 하는 생활은 지긋지긋해.”
“전하…….”
“프란츠라고 하라니까.”
프란츠가 수잔의 호칭을 고쳐줬다.
수잔이 조마조마한 가슴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알, 알겠어요, 프란츠 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몹시 친밀한 사이가 된 것 같았다.
가슴이 콩콩 뛸 정도로.
‘우리 가문은 귀족 취급도 받지 못했는데…… 내가 황궁 약제사가 되고 전하와 가까워지다니. 전부 엘리자벳 언니 덕분이야. 얼른 언니를 도와야 해.’
수잔이 작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프란츠가 병사들을 향해 눈짓했다.
“이제 저 사람을 불러, 수잔.”
“뭘 어쩌시려고요?”
“엘리자벳에게 배웠는데. 가끔은 숨는 것보다 드러내는 것이 안전할 때가 있대.”
수잔은 프란츠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프란츠가 가방에서 피가 묻은 로브를 꺼냈을 때는 새파랗게 질렸다.
“놀라지 마. 물감이니까.”
“그런 옷을 왜 가져오신 거예요?”
“피 흘리는 병자로 보여야 하니까.”
“저는 프란츠 님을 치료하는 척하면 되는 건가요?”
“역시 수잔은 똑똑해.”
프란츠가 칭찬의 뜻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부끄러워하던 수잔이 결심한 듯 두 손을 입가에 붙였다.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 도와주세요!”
네틀톤 저택을 지키던 병사 둘이 달려왔다.
프란츠는 붉은 물감이 묻은 로브를 두른 채 쓰러졌다.
“무, 무슨 일입니까?”
상황 파악을 하느라 병사들이 우왕좌왕했다.
프란츠를 부축하며 수잔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까지 보고 계실 건가요? 이 환자를 저택 안으로 옮겨주세요. 제가 돌보겠어요.”
***
니콜라이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림 같은 무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예배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짐짓 무거웠다.
제멋대로 뒤엉킨 실뭉치처럼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승꽃과 황제의 책무, 악취, 향기, 하얀빛…….
물론 날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건 니콜라이라는 남자였다.
“치유의 여신을 찾아오신 귀한 손님들이로군요.”
예배당에서 기다리던 대신관이 웃음으로 나와 니콜라이를 반겼다.
60대쯤? 깡마른 몸에 염소처럼 가느다란 수염을 가진 노인이었다.
주름 한 점 없는 정갈한 신관복과 새하얀 모자, 인자한 웃음이 기부금 장사나 할 인간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축언을 듣고자 하셨다고요?”
“대신관 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외진 곳까지 찾아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말씀을 나누는 게 좋겠군요.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마구간에 가둘 때는 언제고.
역시 돈이 좋지, 생각하며 대신관을 따랐다.
소박하게 꾸며진 응접실에서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자매님?”
어린 사제가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물었다.
“모라신시아의 신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으신가요?”
“나이를 먹으면 성유물에 대한 전설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지요.”
“그저 전설이라 생각하시나요?”
“여신의 권능을 어찌 세속적인 물건에 담겠습니까?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미혹되지 말라 충고하고 싶습니다. 허나…….”
대신관이 여지를 남기며 말끝을 흐렸다.
인자한 미소를 유지한 대신관이 내 눈치를 살폈다.
“오래된 신전을 지키다 보면 이런저런 소문을 듣게 되지요. 특별한 비밀을 얻기도 합니다. 아무에게나 털어놓아서는 안 됩니다만.”
비밀이라는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니콜라이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그와 둘만 한 공간에 갇혀 있었다면 숨 막히는 적막을 참지 못했을 터였다.
내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대신관이 미끼를 던졌다.
“어쩌면 그 비밀이 자매님이 궁금해하시는 성유물과 관련 있을지도 모르지요.”
점잖은 척 말을 빙빙 돌리는 노인에게 짜증이 솟구쳤다.
어차피 바라는 건 따로 있으면서.
“그래서 아신다는 건가요, 모르신다는 건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곤란하다는 듯 대신관이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자매님께 달렸지요. 저야 신의 뜻을 따를 뿐이고요.”
“알고 계신 정보를 전부 주세요. 헌금은 원하는 대로 드릴게요.”
“정식으로 입교도 하지 않으신 분이 신앙심이 깊으시군요.”
“신께서는 돈으로 신앙심의 깊이를 파악하나 보죠?”
날 선 질문을 던졌다.
늙은 여우답게 대신관은 동요하지 않았다.
“신앙심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여신의 뜻을 널리 알리려면 황금을 멀리할 수만은 없답니다.”
“아무렴요.”
“그래서 얼마를 내시겠습니까? 신앙심이 깊으실수록 제가 전할 수 있는 여신의 말씀도 깊어질 텐데.”
대신관의 눈이 처음으로 반짝였다.
이런 자도 사제랍시고 설교하고 세례도 내리고 그러겠지?
제 잇속만 밝히는 귀족들이 최악일 줄 알았는데.
썩어빠진 신관들도 재수 없기는 똑같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아쉬운 사람은 나였다.
“5천만 골드면 만족하시겠어요?”
대신관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웃음꽃이 만발한 순간, 갑자기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등장한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