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또 무슨 해괴한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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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또 무슨 해괴한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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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또 무슨 해괴한 소리냐?
2023.05.30.
“아칸소 추기경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대신관이 안락의자에서 용수철 튀듯 일어났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을 가진 남자를 바라봤다.
니콜라이와 버금갈 정도로 커다란 키와 기사들보다 다부진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새하얀 피부에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으나, 눈을 가린 흰색 비단 끈 때문에 미모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저 분이 아칸소 추기경이야? 모라신시아 여신상처럼 두 눈을 가렸네?’
아칸소의 지팡이로 시선이 옮겨갔다.
그는 어떤 흔들림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말씀도 없이 누추한 곳까지 행차하시다니……. 언질을 주셨다면 제가 모셨을 텐데요.”
대신관이 굽신거렸다.
‘아칸소는 잘해야 20대인 것 같은데. 추기경이 내 생각보다 높은 위치인가 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칸소가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군더더기 없이 우아한 동작이었다.
그 지팡이 끝이 대신관의 명치를 내려찍었을 때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컥!”
외마디 비명을 터뜨리며 대신관이 풀썩 주저앉았다.
열세 번째 신전의 성기사들이 경악에 찬 얼굴로 외쳤다.
“대신관님!”
“괜찮으십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칸소가 서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열세 번째 대신관과 이곳의 모든 성기사를 대신전으로 압송한다.”
아칸소를 수행한 한 무리의 사제들이 대신관과 성기사들을 구속했다.
평범하다 못해 수수한 신관복을 걸친 그들에게서는 성기사랍시고 거들먹거리던 인간들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던 엄숙함이 풍겨나왔다.
“추기경님, 무슨 연유로 신의 늙은 종을 핍박하십니까?”
가슴을 움켜진 대신관이 항의했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아칸소가 답했다.
성서의 한 구절을 읊는 듯했다.
“신을 팔아 재물을 탐하는 자, 악마와 함께 처형대의 가장 높은 곳에서 불타리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평생 신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입 닥쳐라. 내 너의 죄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으니.”
사색이 된 대신관이 늙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칸소가 지팡이로 대신관을 가리켰다.
“그 어떤 죄보다도 성녀님을 마구간에 가두고, 성녀님께 거짓을 나불거린 죄는 무겁기 짝이 없다.”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아칸소 추기경이 성녀라는 말을 입에 올렸을 때,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저는 성녀가 아니라 엘리자벳 엠스터인데요? 좀 전까지 돈으로 대신관을 매수하려 한…….’
니콜라이가 긴 침묵을 깼다.
“성녀라니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냐?”
위협하듯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였다.
아칸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칸소가 날 바라봤다.
나도 비단 끈에 가려진 그의 두 눈을 응시했다.
‘앞을 볼 수 없는데도 내 모든 걸 꿰뚫는 것 같아.’
나와 니콜라이 그리고 아칸소.
기묘한 긴장감이 우리 세 사람을 휘감았다.
아칸소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 발치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처럼.
“종 아칸소, 여신의 대리인이신 성녀님을 뵈옵니다. 지금부터 성녀님은 소인이 직접 모시겠습니다.”
***
더글라스는 프란츠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좀처럼 평정심을 찾기 힘들었다.
클라우디아에게 니콜라이의 비밀을 들었기 때문일까.
‘폐하와 닮으신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닮지 않으신 것 같기도 하고…….’
프란츠의 얼굴에서 진실을 엿보려는 자신이 부끄러워서 얼른 시선을 거뒀다.
“황궁을 빠져나오시다니요. 너무 위험한 일을 벌이셨습니다, 전하.”
“황궁에 있다고 과연 안전할까?”
프란츠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소년답지 않은 냉소가 오늘따라 더글라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수잔. 너라도 전하를 말렸어야지.”
더글라스가 가볍게 질책했다.
수잔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수잔은 끝까지 날 말렸어. 내가 고집을 부린 거야. 그러니까 수잔을 나무라지 마.”
프란츠가 수잔을 변호했다.
수잔은 그런 프란츠를 향해 살풋 미소 지었다.
꽃망울을 틔운 물망초처럼 청초한 여동생을 바라보며 더글라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가 오웬을 만나고 싶다. 주선해줄 수 있겠는가?”
물감이 묻은 로브를 벗으며 프란츠가 용건을 꺼냈다.
“연유를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나의 스승인 엘리자벳이 악녀 취급받는 걸 참을 수 없다. 엘리자벳의 도망을 도왔던 그대는 이해하겠지?”
“이해합니다만…….”
“클라우디아 경이 4대 명문가를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무너뜨리긴 역부족이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나설 때야.”
프란츠의 연두색 눈동자가 파르라니 빛났다.
누가 이 소년을 어리다고 무시할 수 있을까.
프란츠에게서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하트만 제국 황태자로서의 기품이 흘러나왔다.
“나는 오웬을 내 미술교수로 모시고, 그의 작품활동을 후원하려 한다. 또한, 오웬처럼 억울하게 반역자가 된 이들을 구명할 생각이다.”
“폐하의 허락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하께서 반역자 신분인 오웬 님과 직접 접촉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오웬을 사면한다. 그것이 황제 대행으로서 나의 첫 결정이다.”
“황제 대행…… 이라고요?”
더글라스의 단정한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수잔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폐하께서 엘리자벳을 뒤쫓아가시며 부탁하셨다. 이걸 내게 주시며.”
프란츠가 낡은 헌팅캡을 벗었다.
모자 안쪽에 적갈색 가죽 주머니가 꿰매어져 있었다.
프란츠가 그 안에 든 무언가를 꺼냈을 때, 더글라스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흐음…… 하트만 제국의 옥새 반지 아닙니까?”
황금 반지에는 제국을 상징하는 검에 찔린 심장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오직 황제만이 소유할 수 있고,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옥새.
제 손에 맞지 않는 커다란 반지를 움켜쥐고 프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는 날 신임하신다. 내가 폐하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다고…….”
“내무대신도 알고 계십니까?”
“카레스의 낌새를 보니 모르는 것 같더군.”
프란츠가 대답했다.
수잔이 흥분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래서 내무대신님을 찾아가신 거였어요?”
“미리 알리지 못해서 미안해, 수잔.”
의아해하는 더글라스에게 수잔이 빠르게 설명했다.
“전하께서 카레스 님을 찾아가 추격대를 거두라고 명하셨거든요. 카레스 님은 전하께 아무 권한이 없다고 대답하셨고요.”
“전하께서 옥새를 가지셨다는 걸 모른다는 뜻이군요.”
더글라스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권력을 쓰기 전에 주변 파악부터 한다. 누가 아군인지, 누가 적군인지. 과연 침착하고 영민하시군.’
프란츠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평소의 폐하라면 카레스에게 모두 말씀하셨을 것이다. 카레스의 반응도 퍽 이상하더군.”
“저도 느꼈어요. 전하를 일부러 도발하는 것 같달까요?”
누이동생을 돌아보며 더글라스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런 것까지 파악했느냐?”
“절 어린애로 보지 마세요, 오라버니. 16살이면 시집도 갈 수 있는 나이라고요.”
앙증맞은 외모의 수잔이 그런 말을 해봤자 귀여울 뿐이었는데.
오늘따라 수잔이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더글라스였다.
“병약하던 네가 16살이 되었다니. 대견하고, 고맙고, 또…….”
더글라스가 수잔의 분홍색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아쉽다는 말을 삼켰다.
프란츠의 눈치를 보던 수잔이 팔꿈치로 더글라스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전하 앞에서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부끄럽게.”
“수잔이 아팠어? 나는 전혀 몰랐는데.”
프란츠가 동그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
수잔이 손사래 치며 화제를 돌렸다.
“요즘은 건강해요. 전하의 보양제를 조제 하다가, 제가 먹을 약도 만들었는데 그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런 말은 없었잖니, 수잔?”
더글라스가 염려를 담아 물었다.
수잔이 애교스럽게 더글라스 팔에 몸을 기댔다.
“새로운 약을 먹었다는 걸 알면 오라버니께서 걱정하시잖아요.”
“그래도 오라비한테는 알렸어야지.”
“제가 건강해진 것도 엘리자벳 언니 덕분이에요.”
“그건 무슨 의미냐?”
“언니가 아니었다면 할아버지의 책도 찾지 못했을 테고, 보리츠 님의 허브도 얻지 못했을 테니까요. 전하 덕분이기도 하네요!”
수잔이 프란츠를 바라보며 사르르 웃었다.
프란츠는 볼을 살짝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단순히 그것뿐인데 더글라스는 프란츠를 집에서 쫓아내고 싶어졌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옥새가 내 손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상황이 급변할 것이다. 폐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해치우자. 나와 함께 하겠는가, 네틀톤 후작?”
프란츠의 시선이 더글라스에게 꽂혔다.
더글라스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네틀톤 가문은 신명을 다해 황태자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좋다. 우리 함께 엘리자벳을 위해 싸우자.”
프란츠가 더글라스에게 작은 손을 내밀었다.
더글라스가 두 손으로 프란츠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오늘의 맹세가 제국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
앞장선 아칸소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밟았다.
퀴퀴한 곰팡내를 맡으며 석벽을 짚었다.
주전자 모양의 기름 등불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좁고 미끄러운 계단인지, 싸구려 기름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희미한 등불 하나로 이 어두운 계단을 앞장서 가다니. 정말 안 보이는 거 맞아? 초능력자인가?’
아칸소의 드넓은 어깨를 노려보다가 불만을 터뜨렸다.
“어딜 가시는 거예요? 설명해주세요, 추기경님.”
“소인은 하찮은 성녀님을 모시는 시종에 불과합니다. 존칭은 거두어 주십시오.”
“추기경님이야말로 그 성녀라는 호칭 좀 그만두세요.”
질색이라는 투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칸소가 높낮이 없는 어조로 답했다.
“성녀님을 감히 다른 호칭으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불편하고 꺼림칙하다고요.”
“곧 익숙해지십니다, 성녀님.”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완고함이 아칸소에게서 느껴졌다.
내 주위엔 왜 이렇게 고집쟁이들만 나타나는 걸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니콜라이와 함께 올 걸 그랬나…….’
아칸소는 신탁을 들으려면 지하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것도 나와 단둘이서만.
「그대를 어찌 믿고 엘리자벳을 맡기는가? 지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니콜라이가 의심과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송구합니다만 폐하께서는 함께 가실 수 없습니다.」
조금도 송구하지 않은 투로 아칸소가 대답했다.
「성녀님은 저와 대신관을 포함한 모든 사제보다 귀중한 분입니다. 제가 모라신시아 여신의 이름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나는 신이나 신관 따위를 믿지 않는다.」
「폐하. 저를 성녀님께 위험한 존재로 보십니까?」
「당연한 말을 진지하게 하는군.」
「저보다는, 폐하께서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그 짐승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