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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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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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2023.06.02.
도전적이다 못해 무례한 말투였다.
평소와 달리 니콜라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움켜쥔 주먹만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짐승이라니? 종교적인 비유라 해도 니콜라이가 저걸 참을 리 없는데…….’
「그놈은…… 내 안에서…….」
주저하며 말을 삼키던 니콜라이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니콜라이가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신탁 따위 개나 줘라. 황궁으로 돌아가자, 엘리자벳.」
그의 손은 여전히 크고 뜨거웠다.
니콜라이는 자신이 날 얼마나 세게 붙잡고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밧줄로 묶였을 때보다 손목이 욱신거렸다.
청록색 눈동자에 담긴 분노와 불안을 읽으며 그를 밀어냈다.
「지금은 안 돼요, 폐하. 신탁이 뭔지 알아야겠어요.」
니콜라이의 몸이 보일 듯 말 듯 휘청거렸다.
「내가 가지 말래도?」
「우선은 보내주세요. 제가 어딜 가든, 찾을 수 있잖아요.」
니콜라이의 손이 내게서 떨어졌다.
그것뿐인데 온몸의 피가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는 니콜라이는 외롭고 위태로워 보였다.
나보다 커다란 남자를 두 팔 벌려 안아주고 싶을 만큼.
하지만 나는 아칸소와 함께 지하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니콜라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상처 입은 맹수처럼 붉게 부풀어 오르던 니콜라이의 눈매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니콜라이가 혼자서 환궁한 건 아닐까?
2인용 안장을 혼자 타고?
상상만으로 꽉 막힌 가슴이 와장창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지하 계단에서 선언하듯 말했다.
미간을 찌푸린 아칸소가 날 돌아봤다.
“이곳이 지하 예배당 입구입니다.”
거무튀튀한 자물쇠가 달린 나무문이 보였다.
가장 오래된 신전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모퉁이가 삭은 문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시기만 하면 신탁을 받으십니다.”
“나중에 들을게요. 아니, 못 듣는대도 상관없어요. 폐하께 돌아가야겠어요.”
“과연 폐하는 성녀님께 몹시 해로운 존재로군요.”
의사가 병명을 진단하듯 사무적인 말투였다.
가슴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당신이 뭔데 해롭고 말고를 판단해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성녀님.”
“성녀라는 말도 집어치워요. 당신들 종교랑 엮이고 싶은 마음은 개 오줌만큼도 없으니까!”
하얀빛이든, 신물이든 지긋지긋했다.
이제 겨우 클라우디아의 악몽에서 벗어난 참이었다.
원작도 충분히 비틀었다고 생각했다.
나도 내 삶을 살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사람들 곁에서.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성녀라는 호칭이 싫으시다면, 의로운 사망자라 불러드릴까요?”
가슴뼈가 심장을 콱 조였다.
그 호칭을 아는 것은 나와 하얀빛뿐이었으므로.
하얀빛. 그 존재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지만, 그 존재에게 내 목숨이 달려 있었다.
책에서 읽었던 끔찍한 장면들이 빠르게 눈앞을 스쳤다.
각종 고문 도구와 일방적인 재판.
산채로 불타오르던 죄 없는 여자들.
하얀빛의 뜻을 거역하면, 나도 그들과 같은 말로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지하의 공기가 숨쉬기 곤란할 정도로 희박해졌다.
살이 떨리도록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눈에 힘을 주고 턱을 치켜들었다.
“엘리자벳이라고 불러주세요. 그게 내 이름이니까.”
나는 두 번째 삶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지만, 기어코 살아낸 인생이었다.
타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신관이든, 신이든.
“부정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성녀님께서는 이미 모라신시아 여신의 선택을 받으셨습니다.”
“선택해달라고 한 적 없어요.”
“인간에겐 그걸 선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맞아요. 인간은 개뿔 무능력하죠. 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는 선택할 수 있어요.”
내가 코웃음 치며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아칸소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얼른 거뒀지만.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성스러운 사명을 정녕 거부하시겠다는 겁니까?”
“당신에게나 성스럽지요. 저한텐 그저 성가시고 짜증스러운 훼방꾼이나 마찬가지예요.”
“성녀님!”
“내가 싫다는데 어쩔 거예요? 죽일 건가요? 내가 죽음 따위 두려워 벌벌 떨 줄 알아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죽는다는 상상만으로 오금이 저렸다.
한번 경험해봐서 더 무서웠다.
하지만 때론 허세가 필요했다.
나를 다독이기 위해서라도.
“당신네 그 신에게 가서 똑똑히 전해요. 신물을 찾고 싶으면 공손히 부탁하라고요. 같잖은 협박 같은 거 하지 말고!”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아칸소가 퍽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여신의 말씀을 듣는 존재일 뿐, 그분과 소통하는 능력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럼 방청객 노릇이나 잘해봐요.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바이 바이.
발랄하게 손을 흔들었다.
반쯤 얼이 빠진 아칸소를 뒤로하고 계단을 두 개씩 뛰어 올라갔다.
두 번째 신물이 아깝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잠깐 후회도 했다.
‘참았어야 했나? 에라, 모르겠다. 나중 일은 나중의 나에게 맡기자!’
니콜라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묻지 못한 말과 하지 못한 말 사이에서 곪아 터질 게 분명한 상처를 얻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돌아온 나를 보며 기뻐할 니콜라이를 보고 싶었다.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박차고 올랐다.
천장에서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 건 바로 그때였다.
“비……?!”
우박만 한 물방울이 머리와 어깨에서 탁탁 깨졌다.
옷깃과 머리칼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한기에 몸을 떨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칸소의 다급한 한 마디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신탁이 내려옵니다, 성녀님!”
***
먹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 아래서 니콜라이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백 개의 송곳이 부츠 밑창을 뚫고 살갗을 찌르는 듯했다.
‘엘리자벳은 이 아래 어딘가에 있겠지. 내 곁이 아니라, 아칸소와 함께……!’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뱃속을 달구었다.
짧은 분노 뒤에 흙탕물처럼 탁한 자괴감이 스며들었다.
비밀을 털어놓겠다 결심했다.
결과는 어땠는가?
어설프고 남루한 몇 마디로 엘리자벳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아내가 되어달라고 말하려 했는데. 이 제국의 황후가 되어달라고.’
황후 엘리자벳.
하트만의 심장을 머리에 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
오직 그 하나를 꿈꾸며 말을 달렸다.
틈날 때마다 2인용 안장 앞자리에 새긴 그녀의 이름을 더듬었다.
니콜라이가 하려던 건 청혼이었으나, 쓰디쓴 오해만 뒤집어쓰고 말았다.
이성의 견고한 틈이 벌어지고 감정의 회오리가 밀어닥쳤다.
그때마다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었다.
「청혼하지 않길 잘했어, 니키. 어차피 거절당했을 거야.」
늑대가 나지막이 웃었다.
니콜라이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이빨을 박은 짐승이.
「그녀는 황후가 되기 싫다잖아. 영리한 여자니까 당연하지.」
“설득할 수 있다.”
「황후가 되면 주위에서 가만히 있겠어? 모든 귀족이 그녀를 물어뜯을 거야. 목숨을 위협받을 수도 있고.」
“지킬 수 있다.”
니콜라이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황후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했을 때, 엘리자벳은 죽어도 황후가 되기는 싫다고 했다.
「어떤 여자가 미쳤다고 목숨을 내놓는 시집을 오겠어? 수십 명의 아내와 자식까지 있는 사내에게.」
“시건방 떨지 마라, 늑대.”
「그만 포기해. 서로에게 좋을 게 없어. 그녀의 향기가 판단력을 흐리고 있다는 걸 몰라?」
“엘리자벳은 저승꽃 악취를 쫓는 유일한 존재다. 그녀가 마지막 희망이라는 말에 네놈도 동의하지 않았더냐?”
니콜라이가 날카롭게 꼬집었다.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늑대가 너스레를 떨었다.
「너는 이래서 안 돼, 니키. 그 말 때문에 엘리자벳은 네가 자길 이용한다고 믿잖아?」
“진실을 말했을 뿐이다.”
「일부의 진실은 왜곡이다. 오히려 거짓에 더 가까운.」
“…….”
「네가 숨긴 진실이 또 뭐가 있더라? 나의 존재라던가. 너의 남성적 순진함이라던가. 큭큭.」
늑대가 니콜라이를 놀려댔다.
늑대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진작 그리했을 거였다.
「내 존재를 고백했다면 그녀가 이해해줬을지도 모르잖아? 네가 가짜 바람둥이란 것도 설명하기 쉽고.」
황제의 책무에 대해 털어놓았다.
저주받은 후각에 대해서도 말했다.
늑대에 대한 설명만 더한다면 나머지는 간단했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 내가 부끄러운가?」
“몹시 부끄럽다.”
「두려운 거겠지.」
“…….”
「만에 하나 엘리자벳이 황후가 된다면…… 너와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날 물려받게 될 테니까.」
니콜라이가 입 안쪽 살을 콱 깨물었다.
잊고 싶지만,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참혹한 현실이 목 끝까지 밀어닥쳤다.
‘지금은 이복동생인 프란츠가 내 피를 가장 짙게 이었다. 내 자식이 태어난다면…… 늑대는 망설이지 않고 그 아이로 선택을 바꿀 것이다.’
까마득한 현기증이 니콜라이를 내리쳤다.
영원히 다스리지 못할 짐승.
도망칠 수 없는 굴레.
늑대의 간살맞은 속삭임은 계속되었다.
「가엾은 니키. 나 때문에 가끔 이성을 잃는 것도 숨기고 싶겠지.」
“죽어버려라, 늑대…….”
「인간의 체취를 내 먹이로 공급한다는 것도 말하기 싫겠지.」
“…….”
「나와 함께 엘리자벳의 향기를 듬뿍 들이마셨던 것도!」
숨기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죽을 때까지.
하지만 그 때문에 엘리자벳의 오해를 샀다.
상처를 줬다.
그러니 자신에게는 외로워하거나 아파할 자격이 없었다.
비밀의 대가를 치러야 했으므로.
「끝까지 숨겨. 내 존재를 눈치채는 순간, 엘리자벳은 진짜 영원히 널 버릴 테니까.」
내장이 끊어질 듯 욱신거렸다.
아칸소가 했던 말이 관자놀이를 짓찧었다.
「저보다는, 폐하께서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그 짐승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황후가 되는 것만으로 엘리자벳은 공공의 적이 된다.
황후로서 황제의 책임을 나눠 가져야 한다.
늑대도 견뎌야 한다.
그 늑대를 자식에게 물려줘야 하는 운명까지.
니콜라이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뻔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엘리자벳을 사랑한다면, 그녀를 황후로 만들 생각은 집어치워. 그녀의 행복과 안전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늑대의 목소리를 한 마디, 한 마디 가슴에 새겼다.
모두 자신의 이기심이었다.
엘리자벳과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향기에 취해 모든 시름을 잊고 싶었다.
오래된 상처를 보듬어주길, 무거운 짐을 나눠주길 바랐다.
그러니 그녀는 오해한 것이 아니었다.
진실을 니콜라이보다 한발 먼저 꿰뚫은 것일 뿐.
‘모두 포기하자……. 엘리자벳을…… 위해서.’
마음의 결정을 내렸을 때, 니콜라이의 눈앞에 새하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