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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원한다면 성녀가 되어주지 (80/97)


#80. 원한다면 성녀가 되어주지
2023.06.06.


그것이 잔디 사이로 고개를 내민 새하얀 묘비라는 걸,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웬 비석이지?’

숲을 배경 삼아, 새하얀 울타리를 두른 묘비 대여섯 개가 보였다.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니콜라이는 울타리를 넘었다.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쌓인 비석이었다.

이끼와 흙먼지는 없었지만, 비바람에 글자가 마모되어 있었다.

끈질기게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하얀 돌 위에 새겨진 죽은 자의 탄생일과 기일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였다.

각기 다른 날 태어나고, 죽었지만 그들의 이름은 똑같았다.

열세 번째 대신관.

그들의 공동묘지에서 니콜라이는 한 가지 낯선 점을 발견했다.


“이 신관은 100세까지 살았군. 이 신관은 95세? 여기 있는 모든 대신관이 전부 90세 이상 살았다고?”

하트만 제국인의 평균 수명은 60세에 미치지 못했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는 귀족들은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정도였다.

가난한 이들은 50세를 채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90세 이상 장수했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치유의 신이 사제들에게 특별한 수명을 내린 걸까?

신전의 영험함을 자랑하기 위해 거짓 묘비를 만든 걸까?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고요한 같은 장소에서 니콜라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땅 아래에서 은은한 떨림이 느껴졌다.

코끝을 스치는 아스라한 향기는 분명 엘리자벳의 체취였다.


“엘리자벳?”

니콜라이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 시각, 엘리자벳은 원치 않는 신비로움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



“신탁이 온다니, 무슨 황당한 소리예요?”

어디선가 돌풍이 불어왔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굵은 물방울이 폭풍우처럼 날 휘감았다.

선홍빛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고, 물에 젖은 옷자락이 피부에 찰싹 들러붙었다.

참을 수 없는 한기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성녀님!”

아칸소가 서둘러 신관복을 훌렁 벗었다.

제 몸이야 젖든 말든 내게 신관복을 덮어줬다.

한쪽 팔로 보호하듯 내 어깨를 감싸 안은 그가 말했다.


“신탁이 내려올 때 이런 일이 가끔 벌어집니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지요.”

“여긴 지하실이잖아요!”

“저도 여기서 이러는 경우는 처음 봅니다.”

“왜 지하로 데려온 거죠? 이런 일이 생길지 알았어요?”

갑작스러운 추위 탓에 이가 딱딱 부딪혔다.

바짝 긴장한 아칸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번째 신물이 여기 있습니다. 그걸 보여드려야 합니다.”

“대신관은 전혀 모르는 것 같던데요?”

“저 또한 신탁을 통해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사실 여부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태풍이 몰아치는 지하 계단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의로운 사망자가 모라신시아의 얼음을 발견했습니다. 특전이 주어집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유행가처럼 그리움과 쓸쓸함을 동시에 자아내는 목소리였다.

귀가 아닌 가슴에 퍼지는 음성과 함께 시야가 하얀빛으로 물들었다.

바람이 멎고, 물방울이 증발했다.

추위가 물러가고 불안이 사그라졌다.

뽀송뽀송하게 말린 이불에 폭 안긴 듯한 착각에 속눈썹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치유의 여신 모라신시아의 얼음으로 병의 진행을 막을 수 있습니다. 신물을 작동시키면 모라신시아의 얼음이 발동됩니다.」

 
이것이 아칸소가 말한 신탁일까?

두 번째 신물은 구경도 못 했는데, 뭘 발견했다는 거지?

머리를 꽉 채우는 혼란스러움을 삼키며 하얀빛에게 물었다.


“당신이 모라신시아야?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번에도 하얀빛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쏟아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거부하시겠습니까?」

 
또 이런 식이군!

처음 신물을 발견했을 때는 두려웠다.

의로운 사망자라 불릴 자격도, 특전을 받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신물은 달콤하기만 한 치트키가 아니었다.

그보다 내 목을 조르는 족쇄에 가까웠다.

하지만 너무 멀리 왔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이었다.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끝까지 가보자 이거지? 좋아, 받아들여! 오케이!”

악에 받쳐 외쳤다.

아칸소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그에겐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의로운 사망자가 두 번째 신물을 받아들였습니다. 세 번째 신물을 찾지 못하면 모든 특전이 사라집니다.」

 
왜 아니겠니?

내가 또 이럴 줄 알았다!


「특전이 사라지면 의로운 사망자의 영혼은 이전 세계로 되돌려집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하얀빛이 대답했다.

팔짱을 낀 내가 냉소했다.


“나도 다 알아. 이전 세계로 되돌려지면 영혼이 소멸한다는 것도.”

 


「무(無)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세 개의 신물을 가지고 역마를 뿌리 뽑으십시오.」

 
이번엔 나도 태연할 수 없었다.


“신물 모으기가 끝 아니었어? 역마를 뿌리 뽑으라니,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목구멍이 따가울 정도로 빽빽 소리쳤다.

하지만 하얀빛은 대꾸하지 않았다.

감쪽같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축축하게 젖은 나와 아칸소만 남긴 채.


“이 자식이 새로운 퀘스트를 줬어……!”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신물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억울함과 짜증이 밀려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무슨 판타지 게임이냐? 역마를 무찌르라고? 그냥 예쁘고 부유한 상속녀로 살면 안 돼? 소설 속 여주인공들은 다 그렇게 살잖아!’

남주인공이랑 알콩달콩 사랑도 하고.

노골적이거나 구체적이진 않지만 뜨거운 밤도 보내고.

토끼 같은 자식도 낳고.

하지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복잡한 걸까.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털썩 주저앉은 날 아칸소가 부축했다.

모라신시아와 관련된 모든 게 꼴 보기 싫었지만, 도움 없이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신탁을 들으셨습니까?”

“듣고 싶지 않았는데. 진짜 관심 없었는데!”

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그래 봤자 내 두피만 아프고, 내 모근만 상할 뿐이겠지만.


“이 성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성녀님 덕분에 개안을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칸소가 오른손을 심장 위에 얹었다.

얼음 조각상처럼 무표정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두 뺨이 갓 꽃망울을 틔운 진달래색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방금 그 목소리 못 들었어요?”

“목소리요?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찬란한 성령의 빛만 보았습니다만.”

“당신은 어떤 식으로 신탁을 받았는데요?”

“열흘간 금식 기도 후 대신전 예배당에서 받았습니다. 단 세 번이었지만 모두 빛이 주는 계시였습니다. 말씀으로 주시진 않았지요.”

열흘 금식 기도라니 상상만으로 아찔했다.


“신탁이 드문 건가요?”

“신탁을 영접한 추기경은 교단 역사상 단 세 명뿐입니다. 제가 그중 하나고요.”

“……!”

“제가 대주교님과 같은 권한을 행사하는 것도 신탁 덕입니다.”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하얀빛이 진짜 신탁이라면 나도 신탁을 세 번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추기경과 동급으로 신탁을 듣다니! 성녀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잖아?’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신물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는 오랜 시간 네틀톤 후작저에 잠들어 있었다.

그것이 신물이라는 것을 알아낸 것도, 신물을 사용해 여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도 나 하나였다.


‘신물 사용자가 전에도 있었다면 예배당에 방치되진 않았겠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이대로 가다간 빼박, 성녀로 등극하게 될 것 같았다.


‘지금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성녀까지 하라고? 역마도 물리치고? 신물을 찾기 전에 과로사할 거야. 어떻게든 도망쳐야 해.’

하지만 목격자가 있었다.

아칸소를 돌아봤다.

눈동자는 가려져 있었지만, 그가 날 어떤 식으로 우러러보고 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성녀님. 어서 자리를 옮기셔야겠습니다. 감기라도 들까 염려됩니다.”

아칸소가 공손하고도 정중하게 물었다.

날 대하는 태도가 더욱 공손해진 것 같았다.


“두 번째 신물이 문 안에 있다면서요? 신탁까지 받아버렸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다소 쌀쌀맞게 대답했다.

아칸소가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바로 모시지요.”

“정말 지하에 있는 거 맞죠?”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종 아칸소를 믿어주십시오, 성녀님.”

눈썹을 축 늘어뜨린 아칸소가 애원하듯 말했다.

그 모습만 보면 지팡이로 대신관의 명치를 찌르고, 니콜라이를 동네 날건달 취급하는 콧대 높은 신관 같지 않았다.

쩔쩔매는 아칸소를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잘 이용하면 유리하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제국 내 영향력이 가장 큰 교단이라며? 그래. 원한다면 성녀가 돼주지. 딱 내가 원하는 만큼만!’

대주교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추기경이 시종을 자처하고 있었다.

어차피 신물을 찾아야 한다면 모라신시아 교단을 이용하면 편리할 듯했다.

그러자면 이 아칸소라는 남자부터 구워삶아야 했다.

이미 내 명령에 복종할 태세를 가졌지만 말이다.


“나에 관한 신탁을 들었다고 했죠? 한 글자도 빼놓지 말고 전부 말해요.”

 

***

쫄딱 젖은 내가 아칸소의 부축을 받으며 등장하자, 니콜라이가 석상처럼 굳었다.

저벅저벅.

위협적인 자세로 다가온 그가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아칸소의 손을 탁, 쳐냈다.

마치 더러운 벌레를 털어내듯이.


“손대지 마라.”

아칸소를 노려보며 니콜라이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우리 둘을 짓누르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니콜라이 품에 안겨 있다는 것만으로.


“폐하야말로 우리 성녀님께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아칸소는 멈칫하기는커녕 자신만만한 태도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니콜라이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우. 리. 성. 녀. 님?”

관자놀이에 불거진 푸르스름한 핏줄만 봐도.

아니, 한 공간에서 숨만 쉬어도 니콜라이가 풍기는 시퍼런 살기를 모를 수 없었다.


“엘리자벳이 왜 네놈들의 성녀인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도 그리 말씀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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