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 모라신시아의 얼음 (81/97)


#81. 모라신시아의 얼음
2023.06.09.


아칸소가 날 가리켰다.

정확히는 내가 꽉 쥐고 있던 두 번째 신물을.


“신물을…… 발견한 건가?”

니콜라이가 의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내 손바닥 위에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자물쇠가 반짝이고 있었다.


“다이아몬드. 잠금쇠가 달렸군. 열쇠 구멍은 없고…….”

니콜라이가 미간을 좁혔다.

미처 털어내지 못한 흙이 눌어붙어 있었으나, 다이아몬드 특유의 영롱함과 광택은 숨길 수 없었다.

다이아몬드의 표면을 옷깃에 문지르며 답했다.


“처음 봤을 땐 녹슨 자물쇠인 줄 알았어요. 딱딱한 진흙 속에 감춰져 있었거든요.”

“어디에서 찾았지?”

“그냥 지하실 문에 달려 있었어요.”

모라신시아의 신물이 싸구려 놋쇠 자물쇠처럼 문에 덜렁덜렁 달려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지하실 입구에.


“성녀님이 아니면 영원히 찾지 못했을 겁니다. 신물을 얻은 것뿐만 아니라, 신탁까지 들으셨지요.”

아칸소가 가슴을 쭉 펴며 자랑스레 말했다.


“신탁이라니?”

“여신께서 직접 성녀님께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그 성스러운 광경을 평생…….”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듯 아칸소가 두 손을 심장 위에 포갰다.

니콜라이는 성녀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직접 이야기해다오, 엘리자벳.”

“두 번째 신물이 달린 지하실 문에 도달했을 때, 비가 쏟아졌어요.”

“지하에 비가 왔다고?”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저도 믿지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네틀톤 후작저에서 첫 번째 신물을 찾던 때처럼 하얀빛이 말을 걸어왔어요.”

“…….”

나는 애써 담담하게 하얀빛과 나눈 대화를 요약했다.


“첫 번째 신물보다 훨씬 대단해요. 모라신시아의 얼음이라 부르는 이 두 번째 신물은 병의 진행을 막아준대요. 어서 세 번째 신물도 찾아야 해요.”

 

 
니콜라이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역마를 뿌리 뽑으라는 말은 차마 전하지 못했다.

신물을 모두 찾지 못하면 내 영혼이 사라진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하얀빛이 말한 역마가 저승꽃과 같은 의미라면…… 나와 니콜라이는 똑같은 사명을 가진 거나 마찬가지야.’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니콜라이가 나를 사명 완수를 위한 도구로만 보게 될까 두려웠다.

니콜라이에게 여인이고만 싶었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분명 남자이기 이전에 황제였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의 그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짜르르.

아릿한 통증이 심장에 번졌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성녀 재림 보고서를 쓸 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칸소가 날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보고서까지 써야 하나요?”

“200년 만의 성녀 재림입니다. 역사로 기록함이 마땅합니다. 대대적인 즉위식도 거행해야 하고요.”

“사양하고 싶은데요.”

“성녀님처럼 아름답고 기품 가득한 분이 여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게 알려지면, 온 대륙이 찬양할 겁니다. 상상만으로 가슴이 벅찹니다.”

노래하듯 발랄한 어조였다.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있던 니콜라이가 차갑게 읊조렸다.


“상상으로 그쳐. 성녀 즉위는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아칸소의 얼굴에서 좀 전의 기쁨 어린 미소가 사라졌다.

무표정으로 돌아온 아칸소가 니콜라이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폐하께서 관여하실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뭐라?”

“우매한 귀족들이 성녀님을 악녀라 모함했다지요? 폐하께서는 성녀님을 구금하셨고.”

“엘리자벳은 내 백성이자, 황태자의 교육 담당이다.”

“사사로운 연은 없다는 뜻이로군요.”

“네놈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니콜라이가 아칸소의 눈을 가린 하얀 띠를 노려봤다.

아직도 모르겠냐는 듯 아칸소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성녀님은 황궁을 탈출하셨습니다. 신물을 찾으러 오시다가 부패한 사제를 만나 핍박을 당하셨고요.”

“덕분에 너희 교단이 얼마나 썩어빠졌는지 깨달았다.”

“극소수일 뿐입니다.”

“비루한 변명이 고작 그거냐?”

“제가 알았다면 불편 없이 모셨을 텐데…… 한스럽습니다.”

아칸소가 가슴께를 쥐어뜯었다.

니콜라이가 서늘한 비소를 머금었다.


“너는 죽었다 깨도 엘리자벳을 모실 수 없다. 그녀는 나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흥미로운 농담을 들었다는 듯 아칸소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성녀님은 저와 함께 대신전으로 가셔야 합니다.”

“황명을 거스르겠다는 것이냐?”

“폐하야말로 모라신시아 교단 전체를 적으로 돌리시렵니까?”

“입을 다물라! 황제를 협박해? 더는 용서할 수 없다!”

니콜라이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청록색 눈동자에서 흉흉한 기운이 쏟아져나왔다.

나도 살이 떨릴 지경인데, 정작 아칸소는 태연자약했다.


“성녀님을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를 각오가 돼 있습니다.”

“죽기를 바라니, 원하는 대로 해주마.”

어느새 니콜라이의 손이 검에 닿아 있었다.

아칸소도 지팡이를 감싸 쥐었다.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작은 예배당을 꽉 채웠다.


“당장 떨어져요!”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든 내가 경고했다.

니콜라이도 아칸소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들의 가슴을 양손으로 밀어내며 외쳤다.


“치고받고 싸울 거면 내 눈앞에서 사라져요! 추기경님, 당신부터요!”

멈칫하던 아칸소가 얼른 고개 숙였다.


“흉한 모습을 보여 송구합니다. 성녀님.”

“저와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면 폐하께 예의부터 지키세요.”

“하오나…….”

“폐하와 사사건건 부딪치면 당신과는 만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씀만은 부디 거둬주십시오!”

아칸소가 애원했다.


“그러니까 내 명령에 따라요.”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아칸소가 두 손을 모으고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니콜라이가 물었다.


“저자와 함께 대신전으로 가려는 것이냐?”

탁하게 갈라진 중저음.

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니콜라이의 낯빛은 창백했다.

하나뿐인 연인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착각일까. 아니면 소망일까.


“대신전에 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요.”

“무엇이냐?”

“저에게 누명을 씌운 인간들에게 복수하는 거예요.”

“엘리자벳…….”

“너무 오래 참았어요. 이제 저도 반격할래요.”

아칸소는 내 모든 말에 감탄하며 열성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성녀님이십니다. 부디 여신의 이름으로 악인들을 벌해주십시오!”

“신의 이름을 빌릴 마음 없어요. 권선징악도 관심 없고요.”

“성녀님?”

“엘리자벳 엠스터의 이름으로 복수할 거예요. 아주 개인적이지만, 천벌 못지않게 호된 방식으로.”

 

***

니콜라이가 날 대신관의 공동묘지로 데려갔다.


“전부 90살이 넘도록 살았네요? 금욕적인 생활을 한 사제들이라 그런 걸까요?”

묘비를 살펴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니콜라이의 한쪽 눈썹이 가파르게 휘어 올라갔다.


“헌금을 엄청나게 뜯길 뻔하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현 대신관은 몇 살이래요?”

“아칸소 휘하 사제에게 물어보니 80이 훨씬 넘었다더군.”

“그렇게 늙었다고요? 60도 안 되어 보이던데!”

대신관의 팽팽하던 피부와 풍성한 머리숱을 떠올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간의 부러움을 삼킬 때 니콜라이가 내가 메고 있던 가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대신관들이 장수했던 이유가 모라신시아의 얼음 때문이 아닐까?”

다이아몬드 자물쇠를 꺼내 빛에 비춰봤다.

스스로 빛을 발하듯 황홀한 반짝임이 사방에 펴졌다.


“병의 진행을 막는 신물이라서요?”

“그것 말고 설명할 길이 없지 않으냐.”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는 제가 쓸 때만 신력이 발동됐어요.”

“그건 눈동자니까.”

니콜라이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대는 여신의 눈동자를 빌린 것이다. 눈동자를 여럿이 나눠 쓸 순 없어. 하지만 얼음은 다르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찬 기운을 내뿜어 주변의 온도를 내려가게 하니까.”

“시간을 멈추는 얼음이라…….”

얼음처럼 투명한 다이아몬드 자물쇠를 만지작거렸다.

이 안에 뭔가, 내가 모르는 놀라운 힘이 담긴 것만은 사실이었다.

니콜라이가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떠받쳤다.

신비롭고 영험한 기운이 흘러나와 우리를 휘감는 듯했다.


 


“사실이라면 모라신시아의 눈동자와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난 신물이네요.”

“세 번째 신물은 더 큰 힘을 가졌을지 모른다.”

“전대 네틀톤 후작께서도 열세 번째 신전의 특별함을 눈치채셨을까요?”

“더글라스의 조부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했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을 연구 중이셨대요.”

곁눈질로 니콜라이의 반응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에 잠겨 있던 니콜라이가 침묵을 깼다.


“딱 한 번 그녀가 황궁을 떠난 적 있다. 참배 여행을 간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왔을지도 모른다.”

……그녀?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의 주변에 떠오르는 여자는 한 명뿐이었다.

니콜라이의 입에서 라일라 이야기가 흘러나올 줄 몰랐다.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최대한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그분이 라일라인가요?”

“그대가 라일라를 어떻게 알지?”

의외라는 듯 니콜라이가 눈을 크게 떴다.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뜨리며 얼버무렸다.


“우연히 알게 됐어요.”

“핀치 때문인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더 캐묻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는 니콜라이의 얼굴엔 지워내지 않은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카나리아 방에 갇혀 있었다. 무덤 속 시신이나 마찬가지였지.”

니콜라이가 묘비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죽은 연인의 뺨을 더듬듯 슬픈 표정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내 심장이 욱신거렸다.


“수석치료사와 더글라스의 조부가 라일라를 오래 돌봤다. 무슨 병인지,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폐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무엇이 궁금한 것이냐.”

“대답해주실 거예요?”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긴장감을 꾹꾹 눌렀다.

수십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지만, 일단 라일라에 대해 알아야겠어.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

어떤 여인이었는지.

얼마나 사랑했는지.

지금도 그녀를 잊지 못하는지.

무슨 말을 들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는 영원히 이길 수 없을 거란 생각만 굳어질 터였다.

그래도 묻고 싶었다.

차갑게 굳은 손끝 만지작거릴 때, 니콜라이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대는 참으로 뻔뻔하다.”

떼구루루 눈동자를 굴렸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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