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키스와 포옹은 언제 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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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키스와 포옹은 언제 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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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키스와 포옹은 언제 하는 것이냐?
2023.06.13.
깜짝 놀라 고개를 퍼뜩 들었다.
니콜라이가 차갑게 읊조렸다.
“질문도 하기 전에 대답해 달라질 않나.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드나?”
하긴. 좀 무례하긴 했네.
반성의 의미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니콜라이의 힐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날 떠나겠노라 선언해 놓고, 뭘 따져 묻겠다는 것이냐?”
“볼일 끝나고 돌아가겠다고 했잖아요.”
“그게 언젠데?”
이번에도 대답을 찾기 어려웠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니콜라이가 코웃음 쳤다.
“그대는 황제를 세 번 버린 여인이다.”
“제가 언제요?”
“황궁에서 한 번, 여관에서 한 번. 신전에서 한 번.”
니콜라이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내 눈앞에 흔들었다.
그의 손을 홱 밀치며 발끈했다.
“버리긴 뭘 버려요? 해야 할 일을 하러 간 거지.”
“그대는 우리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니콜라이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반문했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다시 물었다.
“이제 나는 필요 없어진 건가?”
“……네?”
“함께 신전에 가자고 꼬실 때는 언제고.”
니콜라이에게 건넸던 말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이왕 나오신 마중, 저랑 같이 가요.」
‘내가 먼저 꼬신 건 사실이지. 신전까지 데려와 놓고 혼자 떠나겠다고 한 것도.’
니콜라이가 다시 한번 내 죄책감을 파고들었다.
“말을 잘 들으면 원하는 걸 해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성기사들과 칼부림을 하실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죠…….”
어설프게 변명했다.
물론 통하지 않았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더냐? 경고를 어기면 포옹도, 백허그도, 키스도, 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같은 말을 타는 것도 전부 끝이라고.”
“그, 그건……!”
“나는 그대의 말에 모두 순종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냉대 아니면 매서운 질문뿐이다.”
“흠흠.”
“대체 그 키스와 포옹은 언제 하는 것이냐?”
능글맞은 표정의 니콜라이를 보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도포를 차려입고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또 다른 자아가 날 꾸짖었다.
‘고얀 것! 벌건 대낮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런 말을 잘도 입에 올렸구나!’
그건 니콜라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랑스러운 대한의 여성이 한 입으로 두말하겠다는 것이냐? 신의를 지켜야지!’
신의를 어기는 건 안 되고,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스킨십하는 건 괜찮은 걸까?
유교걸의 가치관이 무참히 흔들렸다.
“그대가 내 앞에서 아칸소와 짝짜꿍이 맞았을 때도 참았다.”
화들짝 놀란 내가 반문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신물을 찾으러 갔던 것뿐이잖아요?!”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밀폐된 지하실로.”
“!”
“그대만 하염없이 기다리던 심정을 그대가 아는가? 낯선 남자와 쫄딱 젖어서 나타난 그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을?”
말 참 이상하게 하시네.
천하의 요녀가 된 기분이었다.
이 사람, 누군가 내 옆에 있는 꼴을 못 보는 스타일인 건가?
다행인지, 라일라에 대해 물을 타이밍은 지나간 듯했다.
장난기를 지운 니콜라이가 낮고 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건가. 그대에게 나는 고작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존재인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핑계도 찾지 못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먹먹했다.
한없이 어둠에 가까운 그림자가 심장을 짓눌렀다.
‘나만 일방적으로 상처받은 척 굴고 있지만, 니콜라이도 내게 상처받은 게 없지 않아. 사실 내가 털어놓은 진실은 한 줌도 되지 않잖아…….’
가끔은 잊어버렸다.
애써 모른 척하기도 했다.
그가 나와 똑같은 사람이고, 28살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라는 것을.
그라면 이해해 주리라 믿었다.
이해 못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또한 이기심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죄송하지만, 지금은 폐하와 돌아갈 수 없어요.”
두 번째 신물을 꾹 쥔 채 답했다.
니콜라이의 청록색 눈동자에 입김을 불면 사그라질 듯 미세한 불꽃이 일렁였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뱃속이 울렁거렸다.
그 불꽃을 잃게 될까 봐.
영원히 다시 볼 수 없을까 봐.
“엘리자벳. 복수를 원하는가?”
니콜라이가 나지막이 물었다.
“물론이에요.”
“내가 돕는다면?”
“황제시잖아요. 저 때문에 폭군이라 불리는 일이 생겨서는 안 돼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인제 와서 포기할 수 없었다.
‘클라우디아를 내 편으로 만들었다고 방심해선 안 돼. 니콜라이가 폭군이 된다면 클라우디아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빠르게 치고 들어올 거야.’
클라우디아를 황실 기사단장으로 만든 것은 크나큰 도박이었다.
도박의 대전제는 니콜라이가 ‘제대로 된 황제’란 사실이었다.
니콜라이가 폭군의 길을 택한다면 또다시 단두대를 만나게 될 터였다.
매일 밤 꿈속 단두대의 칼날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던 니콜라이.
모든 걸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보다 참혹한 운명을 견뎌야 했던 남자를 내 손으로 지켜내고 싶었다.
거짓말쟁이가 되어 떠나게 되더라도.
“저는 제 갈 길을 갈 테니까, 폐하는 폐하의 길을 가세요. 제국을 위해 현명한 결정을 해주시리라 믿어요.”
니콜라이의 얼굴에서 표정이랄 것이 사라졌다.
슬픔을 삼키는 사람 특유의 서러움만이 바람결에 흩어졌다.
그가 조용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와 닿은 건 머리카락뿐인데 혈관 전체가 화르륵 달아오르는 듯했다.
“그대가 옳다. 그래야 하는데…… 나도 그걸 안다만…….”
“폐하.”
“그대를 보면 자꾸만 나를 위한 결정을 하고 싶다.”
니콜라이의 숨결이 귓가를 덥혔다.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성에 이끌리듯 그의 가슴에 뺨을 기댔다.
몇 겹의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심장 박동.
더운 피를 가진 사내가 뿜어내는 온기.
우리 두 사람만이 자아낼 수 있는 기묘한 떨림.
그 사이에서 그와 내 입술이 한없이 가까워졌다.
“폐하. 약속해주세요.”
“맹세라도 하마.”
니콜라이가 미소를 머금었다.
곧 사라지리란 걸 알기에 더욱 아름답고 덧없는 미소.
“저를 위해서라도 성군이 되어주세요. 그게 제 소원이에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니콜라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원이 그러냐. 성녀가 돼서 그러는 거냐?”
“유혹게임에서 승리하면 상대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기로 하셨잖아요?”
“아직도 유혹게임 타령인가? 계약을 깨고 떠난 건 그대가 아닌가?”
니콜라이가 검지로 내 명치를 짚었다.
한 점에서 시작된 열기를 곱씹으며 눈을 치떴다.
지금이야말로 팜프파탈의 매력을 발휘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제가 이겼잖아요?”
“뭐?”
“그만 인정하세요. 진작에 유혹당하셨잖아요.”
“…….”
“그래서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고 계시잖아요?”
니콜라이의 시선이 내 입술에 고정되었다.
기묘한 긴장감이 바글바글 끓어올랐다.
건드리면 툭 끊어질 듯 팽팽한 공기 속에서 니콜라이가 붉은 입술을 나풀거렸다.
“억지 부리지 마, 엘리자벳.”
통통 튀던 심장이 천길 아래로 툭 떨어졌다.
가쁜 숨을 겨우 내뱉는 날 내려다보며 니콜라이가 덧붙였다.
“게임은 오래전에 끝났어. 그대 눈은 거짓말에 서툴러.”
“그, 그게 무슨 뜻이죠?”
“게임을 좀 더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지. 다만…….”
“다만……?”
“얌전히 기다려, 엘리자벳. 그대가 완전히 패배를 인정한 뒤, 내가 소원을 말하고 그대가 들을 때까지.”
***
사람들은 로즈가 얼음탑을 탈출한 뒤 자취를 감춘 것으로 믿었다.
얼음탑이 생긴 후 첫 탈옥수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로즈는 황궁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로즈를 얼음탑에서 빼내 준 여인이 내건 조건 때문이었다.
‘황궁에 숨어 있다가 엘리자벳을 제거하라고? 암흑가 놈들도 털끝 하나 못 건드린 계집을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땟국물이 흐르는 손톱을 습관적으로 물어뜯었다.
며칠째 감지 못한 적갈색 머리카락은 흙먼지와 기름때로 엉망이었다.
퀴퀴한 악취가 풍기는 옷은 시녀들도 거들떠보지 않는 거적때기에 불과했다.
‘엘리자벳만 아니었어도 이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깡마른 손으로 물동이를 질질 끌며 이를 갈았다.
버젓이 황궁을 활보하고 있음에도 로즈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황궁에서 가장 더럽고 궂은일을 하는 최하급 하녀로 꾸민 탓이었다.
“얘! 물이 다 쏟아지잖아? 일 제대로 못 해?”
상급 하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지적했다.
예전 같다면 로즈에게 말도 붙이지 못할 천한 신분의 여자였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로즈가 굽신거렸다.
“죄송해요. 다음부터 주의할게요.”
“황태자 궁에 가봐! 전하께서 편찮으셔서 일손이 부족하대.”
“바로 가볼게요.”
로즈가 반색했다.
황태자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모처럼 가벼웠다.
그 여자가 그랬다.
엘리자벳이 도망친 후 니사가 황태자 궁 시녀로 일하고 있다고.
배신한 니사를 떠올리는 로즈의 얼굴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은혜도 모르는 천한 계집을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
이번엔 서두르지 말고 때를 기다려야 했다.
복수의 기회는 단 한 번뿐이리라.
‘그 여자가 준 약을 써야 해. 이 약만 있으면, 니사도, 엘리자벳도 다 죽일 수 있어. 복수가 끝나면 그 여자가 도피시켜주겠지. 그때까지 참자.’
로즈가 목에 건 작은 유리병을 움켜쥐었다.
시몬도 그것과 같은 약병을 받았다는 사실은 몰랐다.
4대 명문가 황비 중 하나가 본모습을 숨겨왔다는 것도, 그녀의 진짜 목적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꼭두각시가 되었음에도.
***
“대신관을 만나시겠다고요?”
아칸소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할 것이 있어요.”
“신의 이름을 팔아 성녀님을 핍박한 대역죄인입니다. 성녀님을 영접하는 영광을 줄 수 없습니다.”
“대신전으로 압송되면 더 어려워질 것 같아서 그래요.”
“저를 이용하십시오. 종 아칸소가 성녀님을 대신해 답을 얻어오겠습니다.”
아칸소가 머리를 조아렸다.
공손한 척 굴고 있지만, 내 뜻을 거스르겠다는 거였다.
가뜩이나 니콜라이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데.
짜증이 훅 끼쳤다.
“당신이 말하는 충성, 그게 고작 이건가요? 이 하찮은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아칸소가 두 무릎을 꿇었다.
“성녀님. 부디 어리석은 종을 벌해주십시오!”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마를 차가운 돌바닥에 쿵 찧었다.
이 남자는 또 왜 이래?
무섭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