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 아칸소의 고백 (83/97)


#83. 아칸소의 고백
2023.06.16.


발끝으로 전해지는 진동을 느끼며 화들짝 놀랐다.

겉으로는 도도하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말이다.


“이러지 마세요, 추기경님.”

“성녀님께 저는 추기경이 아니라 그저 종일 뿐입니다. 합당한 벌을 내려주십시오.”

벌을 받기 전까지 일어나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팔짱을 꼈다.


“무슨 종이 말을 듣는 게 하나도 없어요?”

“송구합니다.”

“이런 행동도 너무 불편하다고요. 그만 일어나세요, 추기경님.”

“부디 말씀 낮춰주십시오.”

“알았으니까, 일어나요. 아칸소.”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아칸소가 환한 미소와 함께 두 뺨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였다.

차갑고 냉정한 인상으로 가득했는데.

금욕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남자였다.


‘미소만 지었을 뿐인데도 성스러움이 철철 넘치네. 아칸소 보려고 신전을 찾는 여신도들도 엄청 있겠는데?’

“명을 받들겠습니다, 성녀님!”

“이름으로 불린 게 그렇게 좋아요?”

“성녀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시고, 이렇게 모실 수 있다는 것이아말로 인생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인제 대신관을 좀 만나게 해주세요.”

아칸소가 열세 번째 대신관이 갇혀 있는 장소로 날 안내했다.

아치 모양 창문이 늘어선 복도를 걸으며 아칸소에게 물었다.


“200년 만에 등장한 성녀라면서요. 진짜인지 아닌지 증명도 안 됐는데 너무 확신하는 거 아니에요?”

“절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기쁩니다, 성녀님.”

“사기 치기 딱 좋은 상대네요.”

“성녀님께서 원하시면 얼마든지 사기 치셔도 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당하겠습니다.”

“뭐라고요?”

“아. 공범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성심으로 따르겠습니다.”

거짓 한 점 섞이지 않은 진실된 표정으로 아칸소가 허리를 숙였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작작 좀 하세요.”

“사실 교단에서 성녀 재림을 인정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가짜 성녀가 자주 있거든요.”

“성녀를 사칭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교회법에 따라 화형에 처합니다.”

“……마녀처럼요?”

“역시 성녀님이십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아칸소가 나를 치켜세웠다.

내 가슴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는 건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모라신시아 교단을 이용하려다가 마녀로 몰리면 어쩌지? 내 무덤을 내가 파는 거 아냐?’

근거 없이 마녀로 몰리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나는 마녀로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능력의 소유자지만!


“당신은 왜 나를 성녀라고 믿는 거예요?”

“저 혼자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대주교님을 포함한 교단의 판단입니다. 제가 소임을 받아 모시러 온 것이지요.”

“신탁을 받았기 때문인가요?”

“첫 번째는 신탁입니다. 두 번째는 신물의 등장이고요.”

지하에서 아칸소가 들려줬던 신탁 내용을 돌이켰다.

「두 하늘이 맞부딪힐 때 한 여인이 돌아오리라. 붉은 늑대가 검은 늑대를 깨물고, 역마를 물리치리니. 세 개의 신물이 의로운 사망자의 앞길을 밝히리라. 나의 종이여. 성녀와 함께 하늘을 구하라.」

그냥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데.

사제들에게는 목숨 걸고 떠받들어야 하는 신의 말씀인 듯했다.


“신탁에 등장하는 천계의 여인, 붉은 늑대, 의로운 사망자, 성녀가 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내가 이의를 제기했다.

아칸소가 확고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제 눈앞에 계신 성녀님이 진짜 성녀님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나요?”

“신을 모신 평생, 성녀님처럼 눈부시게 맑은 영혼을 가진 분을 본 적 없으니까요…….”

아칸소가 고백하듯 말했다.


“영혼을 본다고요?”

“시력 대신 성안(聖眼)을 얻은 덕에 몇 가지 재주를 부릴 줄 압니다.”

“어떤 식으로 보는데요?”

“잠시 실례를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칸소가 정중히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손끝으로 내 이마를 쓸어내렸다.

함부로 만지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레 닿는 느낌.

아슬아슬한 간지러움이 이마에서부터 발끝까지 솟구쳤다.


 


“뭐 하는 거예요?”

화들짝 놀라 어깨를 튕겼다.

날 안심시키려는 듯 아칸소가 서둘러 손을 거뒀다.


“실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성녀님. 이렇게 하면 영혼이 아주 잘 보인답니다.”

“어떤 식으로 보는지 물었지, 제 영혼을 보라고 하지는 않았는데요?”

“성녀님의 영혼은 태양처럼 밝아서 원래도 잘 보였습니다만, 이것으로 더 확실히 알았습니다.”

일순간, 복잡하면서도 명료한 표정이 아칸소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성녀님께서 악녀의 영혼을 물리치고 그 신체를 정화시킨 것처럼, 제국의 앞날을 밝혀주시리란 것을요.”

 

***

파이프 후작은 양가죽으로 만든 거대한 안락의자에 반쯤 늘어져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그 옆에 나뒹구는 술병들.

조금 늦게 살롱에 도착한 블랙폴드 백작이 끌끌. 혀를 찼다.


“정신 차리시오, 파이프 공. 후일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소?”

부스스 일어난 파이프 후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뭘 도모한단 말이오? 브렌든, 그자가 자백을 할 거라는데? 이미 우린 다 죽은 목숨이오.”

“브렌든에겐 증거가 없소.”

“하지만 가짜 증거를 심은 게 우리라는 건 알지. 그러니 혼자 죽겠소? 납치 사건이 아니더라도 우릴 끌어내릴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인물 아니오? 그 사실을 간과했소.”

엘리자벳을 납치했을 때 파이프 후작은 그녀의 찢어진 옷조각을 몰래 보관했다.

블랙폴드 백작이 배신했을 때를 대비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블랙폴드 백작은 화를 내는 대신, 그 옷조각을 브렌든 후작 저택에 숨겨놓자고 제안했다.


“브렌든을 버려선 안 됐소. 그가 입을 열면 우리도 위험해지는데. 모든 죄를 뒤집어씌워서 없애버리려고 했다니…….”

파이프 후작이 블랙폴드 백작에게 원망 어린 시선을 던졌다.


“파이프 공. 같이 결정해 놓고 지금 날 탓하는 것이오?”

“브렌든 가문의 몰락이 남 일 같지 않아서 그렇소!”

“애초에 그 계집을 납치해서 본때를 보여주자고 한 건 파이프 공 아니었소?”

“내 기억엔 당신이었던 것 같은데, 블랙폴드?”

“지금 말 다 했소?!”

블랙폴드 백작이 벌컥 화를 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먼 공작이 음울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흥분을 다스리시오. 상대가 노리는 건 우리의 분열이오.”

지금까지 4대 명문가의 결속은 단단했다.

그들은 힘을 합쳐 정적을 무찔렀고, 특권과 권력을 공고히 다져왔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브렌든 후작 가문은 몰락 직전이고, 나머지 3대 가문은 신임 황실 기사단장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파이프 후작은 블랙폴드 백작을 탓했고, 블랙폴드는 파이프를 믿지 못했다.

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이라곤, 점잖은 체하며 본심을 숨긴 리먼 공작을 꼴사납게 여긴다는 것뿐이었다.


“상대는 새파랗게 어린 여기사요. 그깟 황실 기사단장 따위가 우릴 해칠 수 있겠소?”

블랙폴드 백작이 검은 콧수염을 신경질적으로 만지작거렸다.

리먼 공작이 크리스털 술잔을 입가로 옮겼다.


“클라우디아 경을 얕봐선 안 되오. 천재 여기사를 지지하는 젊은 기사들이 무수히 많소.”

“흥! 그래봤자 날붙이 들고 설치는 준귀족 무리에 불과하지.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뿐인 애송이들!”

“그들은 우리보다 신분도 낮고, 재력도 별로 없소. 하지만 뜨거운 피와 젊음을 지녔소.”

“그래서 놈들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거요?”

블랙폴드 백작이 거칠게 물었다.

리먼 공작의 낯빛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거대한 흐름이 생기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뜻이오.”

“흐름?”

“변화의 흐름. 개혁의 흐름. 오래된 권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힘을 얻길 바라는 흐름 말이오.”

화를 참지 못하고 파이프 후작이 빈 술병을 집어던졌다.

와장창, 유리병이 깨지며 날선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히 누가 내 것을 탐한다는 거야! 이 파이프가 밭 한 뙈기 빼앗길 줄 알고?!”

“진정하시오, 파이프 공.”

“반역자 새끼들. 내 딸이 황후가 되면 전부 목을 따 버리겠어!”

파이프 후작이 씩씩거렸다.

블랙폴드 백작이 코웃음을 쳤다.


“얌전하신 엠마 황비께서 그런 대업을 이룰 수 있겠소? 신시야 황비 마마 정도는 돼야지.”

“내 딸을 무시하는 거요?”

“말조심하라는 거요. 후궁에는 내 딸도 있고, 리먼 공의 따님도 있소. 누가 황후가 될지 아무도 모르잖소!”

블랙폴드 백작이 말했다.

리먼 공작은 시선을 창밖으로 던지며 미간을 좁혔다.


“폐하께서 이 모습을 기다리셨는지도 모르겠소.”

“그게 무슨 뜻이오, 리먼 공?”

“즉위식 직후 폐하께서는 황후를 맞이하라는 압박에 못 이기기는 척 우리의 딸들을 황비로 책봉하셨소.”

“4대 가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게지!”

“그런 줄 알았소. 하지만 그게 아니라, 우리에게 하트만의 심장이라는 탐스러운 미끼를 던진 거라면?”

리먼 공작이 파이프 후작과 블랙폴드 백작을 돌아봤다.

입을 꾹 다문 두 사람을 향해 리먼 공작이 말했다.


“여색에만 눈이 먼 척 우리를 속이며, 결속이 깨지기만을 기다렸던 거라면 어찌하겠소?”

“황후 책봉을 미룬 게 여러 여인을 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황비 마마들을 함께 만나 봬야겠소. 폐하의 진의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오.”

리먼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질세라 파이프 후작과 블랙폴드 백작이 뒤따랐다.

후궁 위에 드리워진 먹구름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내가 엘리자벳에게 빙의했다는 사실까지 알아낸 거야?! 이 사람이 적이 되면 내 정체는 완전히 까발려지는 거잖아?’

방심하고 있다가 약점을 잡힌 기분이었다.

사뭇 긴장한 날 아칸소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염려 마십시오. 종 아칸소,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한 적 없습니다.”

“당신이 내 편이라는 걸 어떻게 믿죠?”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알다시피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까요. 당신도, 나도.”

나도 한때는 스스로 평범한 사람이라는 게 지긋지긋했다.

힘도 없고, 돈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 속 여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최애와 함께 마음껏 우정을 나누며 모험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아에게 빙의했다면 벌써 내 손으로 니콜라이를 죽였을지도 몰라. 엘리자벳으로 빙의해서 다행이야. 니콜라이가 날 이용할 뿐이더라도…….’

스산한 바람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쳤다.

니콜라이는 내게 매혹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마음만 들켰을 뿐.


「게임은 오래전에 끝났어. 그대 눈은 거짓말에 서툴러.」

「게임을 좀 더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지.」

승리는 저만치 멀어졌고, 유혹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그 순간 날 사로잡은 감정은 패배감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

니콜라이 곁에 더 머물 수 있어서.

게임을 핑계로 서로에게 닿을 수 있어서.

그와 나는 연인도 아니고, 부부도 아니지만 조금은 서로를 점유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곳에 열세 번째 대신관이 있습니다.”

아칸소가 뜻밖의 장소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다 대신관을 가뒀다고요?”

나는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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