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그녀를 가둔 사람은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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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그녀를 가둔 사람은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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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그녀를 가둔 사람은 누굴까
2023.06.20.
그가 멈춰선 곳은 나와 니콜라이가 갇혀 있었던 마구간이었다.
“신전에서 이보다 구질구질하고 냄새나는 장소가 없더군요. 잠시나마 성녀님께서 머무셨으니 성소와 다름없지만 말입니다.”
아쉽다는 듯 아칸소가 입맛을 다셨다.
아칸소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어쩐지 나와 비슷한 부류 같았다.
‘받은 대로 갚아주는 타입인가? 아니면 나처럼 하나를 당하면 열 배로 보복하는 타입? 어쨌든 맘에 들어.’
나는 마음속으로 아칸소의 캐릭터를 조정했다.
정체불명의 광신도에서 도움 될지 모르는 광신도로.
“천한 종, 고귀한 성녀님을 뵈옵니다.”
대신전 사제들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저 사람들 좀 어떻게 해봐요’, 라는 눈짓을 아칸소에게 보냈다.
아칸소는 여느 시각장애인처럼 아무것도 못 본 척했다.
입을 삐죽거리며 마구간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오오, 성녀님! 천한 종이 죽음으로도 씻지 못할 죄를 지었나이다!”
말 여물통 옆에 묶여 있던 대신관이 눈물까지 흘리며 사죄했다.
“당장 죽여주십시오! 여신께서 보내신 성녀님을 알아보지 못한 죄, 지옥에서 갚겠나이다!”
“시끄러워요.”
“서, 성녀님?!”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는 않아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돈을 갈취해왔죠?”
매서운 눈으로 대신관을 노려봤다.
대신관이 온몸을 비틀며 항변했다.
“개인적인 욕심은 없었습니다!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
“더러운 입 닥쳐라!”
아칸소가 지팡이로 바닥을 쿵 찧었다.
지팡이의 매운맛이 떠올랐는지 대신관이 움찔했다.
“허접한 변명은 종교재판에서 하거라. 성녀님의 귀한 시간을 빼앗지 말고.”
“고마워요, 아칸소.”
“편히 하문하십시오, 성녀님. 자리를 비워드리겠습니다.”
아칸소가 뒷걸음질 쳐서 사라졌다.
밖에서 기다리라고 할 참이었는데.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질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칸소의 훌륭한 눈치를 칭찬하다가 대신관을 노려봤다.
“솔직히 대답하면 목숨은 살려주라 이를게요. 내 말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하늘이 내린 성녀십니다! 뭐든 하문하십시오!”
“전전대 네틀톤 후작 각하를 아시죠? 황궁 약제사로 일하셨던.”
대신관이 메마른 입술을 우물거렸다.
뭔가를 알고 있지만, 이야기하기 껄끄러운 기색이었다.
“고민하지 말고 대답해요. 지옥행 급행 마차를 잡아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 협박이 통했을까.
어깨를 오그린 대신관이 조심스레 답했다.
“모를 수가 없지요. 여러 차례 참배하러 오셨으니까요.”
“헌금도 많이 하셨겠군요?”
“아드님께서 도박 빚을 지기 전까지는 자주 신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오셔서 뭘 하셨나요?”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성녀님 앞에서 이런 말씀 올리기 민망합니다만, 저희 신전은 치유 기도가 잘 통하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래서 대신관들이 장수한 건가요?”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깜짝 놀란 대신관이 입을 떡 벌렸다.
내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낮췄다.
“째깍째깍 답해요. 시간 끌어서 좋은 일 없으니까.”
“송, 송구합니다. 대주교님과 추기경님은 물론 모든 사제가 알고 있었던 일입니다.”
“경쟁이 제법 치열했겠군요.”
“저도 여기 부임하기 위해서 기부금을 많이 냈습니다. 사제의 봉록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거금을요…….”
“그때 빚을 진 거군요? 그걸 갚으려고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낸 거고?”
대신관이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공동묘지를 보고 알았어요. 모두가 그렇게나 장수하는 게 우연은 아닐 테니까요.”
“성녀님의 현명함에 감복했습니다.”
“묘지가 있다는 건 사망 직전까지 여길 떠나지 않았다는 거죠. 시골에 처박힌 신전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고요.”
“오오. 거기까지 꿰뚫으시다니! 평생 성녀님처럼 명석한 분을 본 적 없습니다!”
“아부는 집어치워요. 메스꺼우니까.”
대신관의 어깨가 다시 축 늘어졌다.
보기보다 솔직한 노인이었다.
그를 은근슬쩍 압박했다.
“신물이 여기 있다는 것도 잘 알았겠네요?”
“성유물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알았다면 제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그걸 대신전에 바치면 추기경이 될 수도 있……!”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대신관이 입을 꾹 다물었다.
조소가 절로 터졌다.
“대신전에서 신물의 위치를 모른 게 확실해요?”
“신물을 찾는 건 성서에 기록될 만큼 대단한 업적입니다. 신성력과 신앙심을 증명하는 가장 빠른 길이고요.”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찾았겠네요?”
“역대 대주교님과 추기경님 모두 신물 수색에 몰두하셨었습니다.”
대신관이 조심스레 답했다.
보일 듯 말 듯 눈썹을 찌푸렸다.
‘왜 하얀빛은 날 괴롭히는 거지? 신물을 모으고 싶으면 자기 광신도를 이용하면 간단하잖아?’
내 눈치를 슬쩍 보던 대신관이 말을 흘렸다.
“특히 이번 대주교님은 욕심이 좀 많으셔서…….”
“그 사람이 뭘 했죠?”
“몇 번이나 네틀톤 후작 저택을 방문하려 하셨습니다. 초대 황제께서 후작 가문에 하사하신 물건이 성유물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실패했군요.”
“나중엔 포기하셨습니다. 전전대 각하께서 열세 번째 신전을 포함한 여러 신전을 참배하는 걸 보고, 거짓 소문이라 판단하신 모양입니다.”
“진짜 모라신시아의 신물을 가졌다면 다른 곳에서 치유 기도를 올리지 않았겠죠.”
네틀톤 후작저에서 발견한 신물의 존재는 모르는 듯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진짜 본론으로 넘어갈 때였다.
“그분과 함께 왔던 금발 미녀를 기억하시나요?”
대신관의 주름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랫입술을 떨며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그분 이름이 라일라라는 것도 아나요?”
“사, 살려주십시오, 성녀님!”
“묻는 말에나 대답해요.”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발설하면 저는 죽습니다!”
“누가 당신을 죽이는데요?”
그 질문에조차 대신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라일라에 관한 모든 것은 비밀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에 대해 아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사라졌다.
하지만 거액의 헌금을 강탈할 정도로 배짱 좋은 대신관이 이토록 겁에 질렸다는 게 이상했다.
그는 대주교조차 험담하는 노인이었다.
‘대주교보다 더 높은 사람에게 입막음을 당한 건가? 그게 정말 니콜라이일까? 라일라가 살아 있을 때 그는 황태자였잖아? 라일라가 참배했던 신전이 여기일지 모른다고 짐작했을 뿐이었고.’
한 가지 생각이 불현듯 눈앞에 번쩍거렸다.
정말 니콜라이가 라일라를 사랑했다면 왜 가둔 거지?
병명을 찾지 못해서 신전을 전전할 정도로 아픈 여인을?
단순히 소유욕이라 하기엔 이상했다.
게다가 니콜라이의 아버지는 성군이라 불리는 황제이자, 평생 황후 한 명만을 곁에 둔 순정남이었다.
‘그런 남자가 아들이 연인을 가두는 걸 허락했다고? 프란츠까지 태어났는데? 니콜라이가 라일라를 감금했다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여행지를 모를 리 없잖아? 그는 분명 라일라가 이곳에 왔던 걸 모르는 눈치였어.’
심장이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이 끝났다.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라일라를 가둔 건 니콜라이가 아니야……!’
***
니콜라이가 엄지와 검지를 모아 삐익, 휘파람을 불었다.
푸른 하늘 너머에서 청회색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왔다.
다리에 작은 대나무 통을 매단 전서구였다.
잘 훈련된 전서구는 니콜라이의 손가락 위에 사뿐히 착지했다.
준비한 모이를 전서구에게 먹이며 니콜라이가 돌돌 말린 종잇조각을 펼쳤다.
-브렌든 후작, 4대 명문가 당주들이 사병을 키우고 있음을 자백. 황궁에 신고한 병력의 최소 세 배 이상. 물증 추적 중.
-3대 가문의 황비들 동요 중.
-로즈 황비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
-황태자가 독자 행동을 시작함. 네틀톤 남매의 보좌를 받으며 반역자 오웬과 접촉할 듯.
-신임 황실 기사단장을 중심으로 개혁파 귀족들이 규합 중.
-내무대신의 동향 파악 중.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음.
누구에게 쓴 편지인지, 보내는 이가 누군지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니콜라이에게 전서구를 날리기로 약속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클라우디아가 잘해주고 있군. 핀치도 애쓰고 있는 모양이고…….’
니콜라이는 프란츠에게 넘겨준 옥새 반지를 떠올렸다.
그 반지를 두 손으로 받아들 때 프란츠의 어여쁜 얼굴을 되새겼다.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과 그보다 짙은 불안을.
「황제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옥새다.」
「왜 제게 맡기시는 건가요?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폐하께서 지니셔야 하는 거잖아요?」
「나는 널 믿는다, 프란츠.」
「폐하…….」
「네가 무슨 행동을 하든 믿는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황제 대리로서 네 뜻을 펼치거라.」
프란츠의 연두색 눈동자에 환희가 번졌다.
그것도 잠깐, 두렵다는 듯 되물었다.
「폐하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지만…… 저는 아직 너무 어리고, 약해요.」
「곧 자랄 테고 더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넌 네 생각만큼 어리거나 약하지 않다. 예브레이 황실의 후예답게.」
「죽도록 노력할게요! 폐하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내가 아닌 너와 네 미래를 위해 노력하거라. 이것은 시험이 아니다. 네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폐하……!」
프란츠는 기억하지 못하리라.
니콜라이와 처음 눈 맞추던 순간을.
방긋 웃던 미소와 꼬물거리는 분홍색 손가락를 보며 니콜라이가 깊이 새겼던 맹세를.
「너와 라일라를 영원히 지켜줄게. 누구보다 강한 황제가 돼서 널 해치려는 놈들을 다 무찔러 줄게. 너는 나의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하지만 니콜라이는 라일라를 지키지 못했다.
라일라는 어린 프란츠를 남기고 죽었다.
병사였지만, 죄책감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처음엔 중독을 의심했다.
하지만 수석치료사도, 황궁 약제사도 라일라의 몸에서 독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생각이 많아지는군. 라일라가 다녀갔었던 곳이라 그런가……?’
흘러간 시간을 되짚었다.
어렵사리 부황의 허락을 얻은 라일라가 참배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어린 프란츠도 같이 간다고 했다.
그때의 놀라움과 의아함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니콜라이가 7년 전 대화를 더듬었다.
기억 속에 밀봉되어, 마치 어제처럼 떠올릴 수 있는 그녀의 목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