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위험한 짐승
(85/97)
85. 위험한 짐승
(85/97)
#85. 위험한 짐승
2023.06.23.
「부황께서 참배를 허락하셨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네틀톤 후작 각하 덕분이야. 우리 핀치도 드디어 황궁 밖 공기를 마실 수 있어!」
라일라는 무척 들떠 보였다.
몇 년 만의 외출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니콜라이는 같이 웃지 못했다.
「기도가 도움이 될까?」
「여신께서 판단하시겠지.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 기뻐.」
「여행 중에 병이 악화하면?」
「그래도 가고 싶어. 의술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니까…….」
니콜라이는 그녀가 이 좁고 아름다운 방에 머물렀으면 했다.
그녀의 건강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
어떤 핑계도 소용없었다.
라일라가 변함없는 미소로 절 기다려주길 바랐다.
「핀치까지 데려가는 건 너무 위험해.」
「부디 허락해줘, 니키. 핀치와 함께 떠나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일 수도 있어.」
이미 황제의 허락이 떨어졌다.
황태자의 의사 따위 소용없었다.
누구보다 라일라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황궁을 떠나면 누구보다 외로울 니콜라이를 잘 알았다.
친구처럼, 누이처럼, 때론 어머니처럼.
「금방 돌아올게. 폐하께서 호위 기사를 붙여주셨으니까 안전할 거야.」
「기사들이 지킬 수 있다면 폐하께서도 널 가두지 않았겠지. 페넬로페가 너와 핀치를 노린다는 걸 잊지 마.」
「황후께서는 날 왜 미워하시나 몰라.」
「폐하께서 널 사랑하시니까.」
「니키, 너도 알잖아. 폐하께서 사랑하시는 건 내가 아니라……. 돌아가신 브리짓다 황후님이라는 걸.」
라일라가 미소 지었다.
비에 젖은 카나리아보다 애처로운 얼굴로.
니콜라이는 라일라를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을 한시도 잊지 못했다.
벌꿀을 녹여낸 듯 빛나는 금발.
뻣뻣한 하녀 제복과 어울리지 않는 투명한 피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도톰한 입술까지 어머니를 그대로 닮아 있었다.
두 사람의 초상화를 나란히 놓는다면 누가 황태자를 낳은 황후고, 누가 사생아를 낳은 하녀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너도 그랬잖아. 나를 처음 본 순간 어머니라고 부를 뻔했다고.」
「어떤 미친놈이 겨우 4살 많은 여자를 어머니라고 불러?」
「치. 자기가 그랬으면서.」
「조금 놀랐던 것뿐이야. 나도 폐하도.」
「내가 브리짓다 황후님을 닮지 않았더라도 폐하께서 날 품으셨을까?」
「그런 걸 아들한테 묻지 마.」
질색이라는 듯 니콜라이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라일라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뭐 있다고.」
「네가 어머니를 닮지 않았다면 페넬로페가 발광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과연 그랬을까?」
「자객을 보내고, 음식에 독을 풀고, 시녀와 시종을 매수하고……. 또 뭘 했더라?」
니콜라이가 하나씩 계모의 악행을 손으로 꼽았다.
증거는 없었다.
라일라의 존재 자체가 페넬로페에 의해 철저히 숨겨졌다.
피해자는 라일라뿐이었고, 페넬로페는 유능하고 현숙한 황후로 명성이 높았다.
게다가 그녀는 전쟁의 신을 모시는 교단과 귀족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저승꽃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해야 하는 황제도 페넬로페의 도움이 필요했다.
「너는 예브레이 황실의 피를 이은 핀치를 낳았어. 정식 황비가 되어야 마땅해.」
「페넬로페 님을 자극하고 싶지 않아. 핀치가 안전하다면 나는 뭐라도 상관없어.」
천한 여자가 자신보다 먼저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페넬로페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라일라 암살에 번번이 실패한 페넬로페는 반쯤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황제가 라일라를 카나리아 방에 가두어 보호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몰랐다.
어쩌면 반역보다 끔찍한 사건이었을지도.
「왜 너와 핀치가 죄인처럼 갇혀야 하지? 페넬로페를 폐위하면 될 것을!」
니콜라이가 이를 악물었다.
라일라가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폐하를 이해해드려. 너까지 위험해질 수 있잖아.」
니콜라이는 황제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하지만 페넬로페가 반대한다면 황태자 자리도 위태로웠다.
황제는 니콜라이를 지키기 위해 페넬로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라일라가 카나리아 방에 갇힌 것도 반쯤은 니콜라이 책임이었다.
「내가 황제가 되면 페넬로페를 단두대로 보낼 거야.」
「쉿! 누가 들으면 황태자가 역모를 꾸민다고 할 거야!」
「그 여자가 널 포기했을 리 없어. 포기했다고 믿게 한 후, 기회를 노린다면 모를까.」
라일라는 물끄러미 호랑가시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정원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감한 듯한 음울한 표정으로.
「모라신시아 여신께서 날 굽어살펴주시지 않아도 좋아. 우리 핀치를 보호해주신다면.」
「내가 너와 내 동생을 호위할게.」
「페넬로페 님을 자극할 뿐이야. 세간의 이목이 쏠리면 더 위험해.」
「어느 신전으로 갈 건데?」
「다녀와서 말해줄게. 폐하께서 아주 특별한 호위 기사를 준비해주셨어.」
「그게 누군데?」
니콜라이의 물음에 라일라가 제 발밑의 그림자를 가리켰다.
「그림자로 이동하는 신비한 일족이래. 믿어져?」
***
대신관을 뒤로하고 마구간을 빠져나왔다.
체력장 오래달리기를 했을 때처럼 무릎이 후들거리고, 눈앞이 핑 돌았다.
기다리고 있던 아칸소가 날 부축했다.
“성녀님의 옥체는 교단의 보물이자, 세상의 보물입니다. 부디 조심해주십시오.”
아칸소가 낯간지러운 말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했다.
그를 밀어내고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대신관과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아칸소가 물었다.
내가 슬쩍 말을 돌렸다.
“슬슬 배가 고프네요. 사제들은 무슨 음식을 먹어요?”
“성녀님께 바치기엔 보잘것없는 것들뿐입니다. 제 수행원 가운데 요리사가 있으니 최대한 애써보겠습니다.”
“매콤하고 쫄깃한 게 있으면 좋겠네요.”
오늘따라 떡볶이 생각이 간절했다.
따끈따끈한 국물에 모짜렐라 치즈를 얹은 떡볶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입안에 침이 담뿍 고였다.
갓 튀긴 오징어튀김, 김밥, 순대랑 같이 먹으면 복잡한 머리도 개운해지고, 울렁거리는 속도 진정될 것 같았다.
이 세계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그런 음식을 좋아하시는군요. 기억해두겠습니다.”
“폐하 몫도 부탁드릴게요. 환궁하시기 전에 요기하셔야지요.”
아칸소가 물끄러미 날 바라봤다.
두 눈을 가리고 있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성녀님께 폐하는 어떤 존재입니까?”
아칸소가 불쑥 물었다.
잠시 호흡이 흐트러졌다.
‘계약 관계자? 직장 상사? 학부형? 그것도 아니면…….’
날 감싸는 포근하고도 시원한 체취.
너른 어깨와 커다란 손.
갈증에 찬 청록색 눈동자.
영혼까지 태울 듯 뜨거운 키스가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흩어졌다.
대꾸를 찾지 못한 내게 아칸소가 다시 물었다.
“폐하 때문에 라일라라는 여인의 행적을 쫓으시는 겁니까?”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다.
“엿들은 거예요?”
“저는 지나치게 귀가 밝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무릎을 꿇으려는 아칸소의 팔을 홱 잡아챘다.
“무릎 좀 그만 꿇어요! 나중에 관절염으로 고생한다고요.”
“걱정해주십니까? 영광입니다, 성녀님.”
아칸소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였다.
“용서한 건 아니에요.”
“용서받을 때까지 성녀님을 모시겠습니다.”
“아칸소. 평소에 고집스럽고 집요하다는 소리 많이 듣죠?”
원망을 듬뿍 담아 비꼬았다.
아칸소가 감복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박에 저의 평판까지 눈치채셨군요.”
“당신 때문에 머리가 더 아파졌어요.”
“당장 두통을 없애는 약을 준비하겠습니다.”
“교단에서 약도 만들어요?”
“치유를 바라는 신도들이 많으니까요. 여신의 은혜 덕분에 치료사와 약제사가 다수 있답니다. 제법 실력이 좋습니다.”
아칸소가 은근히 자부심을 내보였다.
‘더글라스의 할아버지가 신전을 방문한 것도 꼭 기도 때문은 아니었을 거야. 뭔가 힌트를 얻으려고 하신 걸지도 몰라.’
더글라스의 조부는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두 사람을 걱정했다.
카나리아 방에 갇힌 채 시름시름 앓던 라일라.
때때로 발작하는 손녀 수잔.
두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끝까지 애썼고, 많은 연구서를 남겼다.
그러나 라일라를 살릴 수 없었다.
수잔의 병명도 밝히지 못했다.
‘과연 그분은 실패하신 걸까?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걸까?’
황도로 돌아가면 네틀톤 후작저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대신관은 라일라에 대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어. 어린 사내아이와 함께 왔다는 것만 겨우 말했을 뿐. 프란츠와 라일라에게 무슨 비밀이 있는 걸까. 니콜라이와 관련된 것이 분명한데…….’
니콜라이에게 라일라에 관해 묻지 못했다.
묻는다고 대답해주리란 보장도 없었다.
나 역시 니콜라이에게 기다려달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는 비밀이란 견고한 벽돌로 쌓아 올린 한 쌍의 등대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폐하 생각을 하십니까?”
상념에 잠긴 나를 아칸소가 흔들었다.
“당신이 신경 쓸 일 아니에요.”
차갑게 대꾸했다.
잠시 호흡을 고른 아칸소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성녀님께 이롭지 못합니다. 가까이하시면 위험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성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분께서 두 개의 영혼을 지녔다는 것을.”
두 개의 영혼이라니?
갑작스러운 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칸소의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실 저는 폐하께도 신탁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교도에게 발설할 수 없다면서요?”
“모라신시아 교단은 선황 시절 예브레이 황조와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입교하지 않았을 뿐, 폐하께서도 모라신시아 여신의 손길 아래 계십니다.”
“그런데 왜 숨겼죠?”
“그분께서는 아주 위험한 짐승을 품고 계시니까요…….”
아칸소가 고개를 떨구었다.
짐승이란 단어가 단도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폐하께서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짐승이 더 위험하다고 했죠. 그 짐승이란 게 무엇인가요?”
“성녀님.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로 폐하를 살펴보신 적 있습니까?”
“두 번이요. 하지만 붉은 연기는 보지 못했어요. 폐하께서는 건강, 그 자체세요.”
“짐승과 함께 계시니, 어떤 병마도 폐하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당연하다는 투로 아칸소가 대답했다.
답답함을 넘어선 불안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주먹으로 아칸소의 가슴을 짚고 협박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요.”
“믿지 못하실 겁니다. 성녀님께서 직접 확인하십시오.”
“어떻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