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이게 떡볶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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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이게 떡볶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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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이게 떡볶이라고?
2023.06.27.
도발적으로 눈을 치떴다.
아칸소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이용하십시오.”
“말했잖아요. 내가 볼 수 있는 건 병이나 통증을 상징하는 붉은 연기뿐이고요.”
“아뇨. 성녀님은 더 많은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할 뿐.”
아칸소가 단호하게 말했다.
확신에 가득 찬 그의 표정이 날 움츠리게 했다.
“꼭 기억하십시오. 신물을 쓰기 전, 짐승을 불러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실 테니까요.”
짐승을 불러내라니, 대체 무슨 말일까?
기억 속 몇 장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컴컴한 호수 아래로 몸을 던지던 니콜라이.
황궁 도서관에서 거칠게 날 밀어붙이던 그.
내 귓가를 더듬던 탁한 목소리.
유난히 날카롭게 빛나던 그의 송곳니.
「폐, 폐하? 제가 아는 폐하 맞아요?」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는 니콜라이가 아니었다.
니콜라이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무언가.
니콜라이보다 흉포하고, 사나운 존재.
그 일 때문에 니콜라이는 몹시 괴로워했다.
「나는 놈과 함께 그 냄새를 쫓고, 격리한다.」
「그놈은…… 내 안에서…….」
‘정말 니콜라이 안에 짐승이 사는 걸까. 그가 말했던 ‘놈’이 혹시…….’
심장이 가슴뼈를 세차게 두드렸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흘러내린 선홍빛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타오르는 노을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짐승이 뭐든 민낯을 낱낱이 벗겨보겠다고.
***
검은 벽돌 벽과 좁은 창문 때문에 신전의 식당은 우울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12인용 식탁의 장식품은 놋 촛대 한 쌍뿐이었다.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얀 식탁보가 왠지 섬찟했다.
금식기도를 올린다는 이유로 아칸소는 함께하지 않았다.
나는 니콜라이와 덩그러니 남겨졌다.
폐부를 찌르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니콜라이는 식전주로 나온 술을 조금 마셨다.
나도 바짝 마른 입술을 술로 적셨다.
‘어떻게 해야 짐승을 불러낼 수 있는 거지? 가뜩이나 어색한데…….’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식전주를 홀짝 들이켰다.
목구멍이 뜨끈해지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알싸하면서도 향긋한 와인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지자, 약간 용기가 생겼다.
‘두 개의 영혼을 가졌다고? 아무리 봐도 세계관 최고 미남일 뿐이잖아?’
니콜라이를 요리조리 뜯어봐도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다.
허점 따위는 없었다.
비인간적일 만큼 완벽한 미모를 훔쳐보며 탄식을 삼켰다.
‘혹시 감정이 짙어지면 짐승이 드러나는 걸까.’
반사적으로 입술을 더듬었다.
그의 숨결이 쏟아지던 순간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니콜라이의 그림 같은 무표정이 무너지던 순간을 어찌 잊을까.
이글거리는 화염에 휩싸인 청록색 보석을.
선연히 감정이 드러나는 바로 그때가 혹시 다른 영혼이 나오는 순간인 걸까.
그렇다면 내가 느낀 그의 진심이, 사실은 그가 아니었던 걸까.
여러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신전이 자랑하는 요리사가 성녀님을 위해 만든 요리입니다.”
침묵을 깨고 늙은 시종이 들어왔다.
그는 반원형 뚜껑을 덮은 은접시를 들고 있었다.
“성녀님 말씀대로 맵고 쫄깃한 것으로 준비했답니다.”
그제야 니콜라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잊고 있었던 허기가 천둥처럼 울렸다.
나이프와 포크를 야무지게 쥐었다.
그토록 그립던 떡볶이와 비슷한 무언가를 먹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두근두근.
반원형 뚜껑을 열었다.
“?!”
하마터면 소리를 빽, 지를뻔했다.
은접시 위에 시커멓고 걸쭉한 소스에 절인 치즈 한 덩어리가 보란 듯이 올려져 있었다.
콧잔등을 때리는 구릿하고 매캐한 냄새.
본능적으로 코를 감싸며 물었다.
“이, 이게…… 무슨 요리인가요?”
“피미안타 지방 특산물인 매운 후추로 버무린 염소 치즈입니다.”
피미안타의 후추라면 더글라스가 선물한 바로 그 후추였다.
이 세계에 매운맛은 오직 그 후추뿐인 걸까?
식욕이 뚝 떨어졌다.
포크를 내려놓으려는데 늙은 시종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모두가 성녀님의 소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디 맛을 봐주십시오.”
“소감을 기다린다고요?”
“교단에서 성녀님께 올리는 첫 번째 요리 아닙니까? 성녀님을 기쁘게 하리란 일념으로 다들 애썼답니다.”
시종이 어린 소년처럼 수줍어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후추는 같은 무게의 금과 같은 값일 만큼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제국인들은 태생적으로 매운맛을 즐기지 않았다.
당연히 사제들이 피미안타 후추 같은 값비싼 향신료를 가지고 다닐 리 없었다.
‘나 때문에 그 비싼 걸 구해온 건가? 그럼 안 먹을 수가 없잖아!’
속으로 울부짖으며 치즈 덩어리를 조금 덜어냈다.
포크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치즈를 한 입 베어 물자, 감전된 사람처럼 몸이 퍼뜩 튀었다.
‘우엑! 맵긴 매운데, 혀가 따가워. 치즈도 쫄깃하다기보다 질척하고. 안 익힌 수제비 식감이랄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시종을 쫓아내고 물로 입을 헹구는 것뿐이었다.
“맛있……어요. 요리사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속이 매스꺼웠지만, 억지로 미소 지었다.
시종이 고집을 피웠다.
“성녀님께서 식사를 마치실 때까지 시중을 들겠습니다.”
“괜찮다니까요.”
“부디 허락해 주세요, 성녀님.”
늙은 시종이 주름진 눈을 찡그리며 애원했다.
‘이 끔찍한 걸 다 먹으란 말이야? 활명수도 없고, 응급실도 없는 곳에서?’
미안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최대한 성스러운 표정과 목소리를 꾸며냈다.
“공주 대접은 사양하겠습니다. 애써준 마음은 고마우나, 식사는 소박하고 단출하게 하는 게 습관입니다.”
“과연 성녀님……!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시종이 반성하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나는 거룩한 종교 지도자처럼 한쪽 팔을 들었다.
“가서 기쁘게 소식을 전하세요. 성녀께서 요리에 아주 만족하셨노라고.”
“황공합니다, 성녀님!”
시종이 뒷걸음질 치며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허겁지겁 물로 입안을 헹궈냈다.
“성녀 노릇이 아주 제법인데?”
기계처럼 치즈를 씹던 니콜라이가 비꼬았다.
뺨이 달아올랐다.
“노력 중이에요.”
“성녀로 대성하겠어. 부디 내게도 은총을 내려주길.”
“비아냥거리지 마세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니콜라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놀랍게도 그의 치즈는 반 이상 사라졌다.
“이 끔찍한 걸 어떻게 드셨어요?”
“영양소를 섭취할 뿐이다.”
“매운맛은 통각이라던데…….”
“말하지 않았더냐. 내가 느낄 수 있는 향과 맛은 오직 그대뿐이라고.”
고개를 숙인 니콜라이가 내 쪽으로 눈을 치떴다.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날 훑고 지나갔다.
움찔 놀라, 말을 돌렸다.
“프란츠는 잘 있을까요?”
황궁을 떠나온 후 그 애가 걱정됐다.
부쩍 튼튼해지긴 했지만, 아직 보호자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아이였다.
“그대 눈으로 확인하면 된다.”
니콜라이는 아직도 날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폐하께서 전해주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요.”
“핀치는 안전하다. 쉐이드가 지키고 있으니까.”
“쉐이드……. 그 비밀 호위 기사 말이죠.”
미소년처럼 단정한 쉐이드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났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흩뿌려진 핏방울도.
“실력은 굉장하죠. 은신술도 대단하고요. 하지만 사람을 너무 죽여요.”
“그의 특장점이지.”
“그걸 보고 프란츠가 큰 충격을 받았어요.”
“황제가 되면 그보다 더한 모습을 수도 없이 보게 된다.”
“그래서 조기 교육이라도 시키시겠다는 건가요?”
“피할 수 없다면 익숙해져야지.”
니콜라이가 냉담하게 답했다.
근무 태만 중이지만 교육담당관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프란츠는 폐하를 무척 좋아해요.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살육도 공부할 애라고요. 그런 애한테 무리한 요구하지 마세요.”
“무리한 요구라…….”
“잘 먹고, 잘 놀고, 잘 크는 게 중요한 나이잖아요?”
“미안하지만 무리한 요구를 이미 하고 와 버렸다.”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니콜라이가 말했다.
한 줄기 불길함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도대체 뭘 하셨는데요?”
“옥새를 줬다.”
“옥, 옥새를 줬다고요……?”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반면 니콜라이는 태연자약했다.
“주로 국가적인 사안을 결정할 때 사용한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지.”
“폐하!”
“그대가 아니었다면 핀치도 순순히 받지 않았을 거다. 여러모로 고맙다, 엘리자벳.”
“그걸 프란츠한테 왜 주셨는데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 니콜라이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황제를 대리하는데, 옥새를 맡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
***
더글라스는 프란츠와 함께 오웬의 아틀리에를 찾았다.
엘리자벳이 마련해준 이곳에서 오웬은 제 작품의 복제품을 그리고 있었다.
채광이 좋은 이젤 앞에 선 오웬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누추한 곳에 이렇게 찾아오시다니…….”
더글라스가 언질을 주긴 했지만 오랜 세월 예브레이 황실을 원망하고 증오했던 그였다.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잠행 중이었으므로 프란츠는 황태자의 의복이 아닌 소박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낡은 헌팅캡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도 감췄다.
언뜻 평범한 소년처럼 보이지만, 고귀한 사람만이 지니는 기품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만나줘서 고맙다, 오웬.”
“엘리자벳 양이 전하의 교육담당관이라 들었습니다.”
“내가 스승으로 여기는 유일한 분이다.”
프란츠가 단호하게 못박았다.
그 모습이 더글라스에게 은은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엘리자벳과 동네 개구쟁이들처럼 장난만 치는 줄 알았는데…… 진심으로 그녀를 따르시는군.’
엘리자벳은 프란츠의 지고한 신분을 신경 쓰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프란츠를 말버릇 고약한 꼬맹이 취급했다.
프란츠도 그녀 앞에서 황태자란 무거운 짐을 벗고 순수한 소년처럼 굴었다.
프란츠가 처음 느껴보는 해방감이었으리라.
‘전하께서 차기 황제가 되리라 믿는 사람도 엘리자벳뿐이지.’
엘리자벳은 프란츠에게 뭘 뜯어낼 생각이 없었다.
프란츠를 끌어내리고 새 황태자를 세울 마음도 전혀 없었다.
니콜라이를 제외하면, 프란츠의 가장 큰 아군은 평민인 엘리자벳이었다.
엘리자벳이 모함당하지 않았다면 프란츠는 절대 옥새를 받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10살 소년을 대리 황제로 만든 건 엘리자벳이나 다름없었다.
“왜 비천한 반역자를 찾아오셨습니까, 전하?”
오웬이 물었다.
“그대도 엘리자벳에게 빚을 졌다고 들었는데.”
“그녀가 아니었다면 전 납치범들에게 죽었을 겁니다.”
“그 빚을 갚을 기회가 생긴다면 어쩌겠는가?”
“엘리자벳 양을 핑계로 절 회유하시려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