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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맨날 같이 자는 줄 알겠네 (87/97)


#87. 맨날 같이 자는 줄 알겠네
2023.06.30.



“내가 회유나 하러 온 것으로 보이나?”

프란츠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느긋하면서도 도발적인 미소였다.

어린 나이 탓에 장난스러워 보일 뿐이지만, 더글라스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폐하와 많이 닮으셨어…… 친자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내가 어리석었어.’

니콜라이와 프란츠는 혈연관계가 분명했다.

머리카락 색은 다르지만, 표정이나 기질이 정말 비슷했다.

게다가 초록색 눈동자는 예브레이 황실의 상징 아닌가.


“회유가 아니면 협박입니까?”

꼿꼿하게 허리를 편 오웬이 프란츠에게 되물었다.

프란츠가 짐짓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까지 까칠할 필요는 없어.”

“…….”

“나 역시 엘리자벳에 빚을 졌다.”

“중독사건 말씀이시군요.”

“엘리자벳의 도움을 크게 받았지.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빚은 따로 있어.”

“그게 무엇입니까?”

“나, 프란츠 롭 예브레이가 황제 폐하의 하나뿐인 후계자란 사실을 일깨워준 사람이지.”

프란츠가 결연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난 이름뿐인 황태자였지. 내가 차기 황제가 되리라 믿는 사람은 없었어. 나조차 믿지 못했으니까.”

“전하……!”

더글라스가 탄식했다.


“나는 폐하를 도와서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결심했어. 이 얼마나 큰 빚이야?”

 

 


“고작 그림이나 그리는 제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오웬이 물었다.

프란츠가 대답했다.


“그대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저는 반역자이자, 도망자입니다!”

오웬이 외쳤다.

해묵은 적개심과 분노를 가득 담아.


“아니, 그대는 오웬 블랙 백작이야.”

프란츠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오웬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다래졌다.


“그, 그것은……?!”

황태자의 손에서 서류가 나풀, 흔들렸다.

오웬은 바람에 휘둘리는 갈대처럼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그럴 수밖에.

그것은 사면과 복권을 증명하는 문서였고, 하트만 제국 황제의 명임을 밝히는 옥새가 찍혀 있었으므로.


“모든 죄를 무효화 한다. 이 시간부로 그대의 작위는 복권된다. 저택과 영지도 돌려받게 된다.”

프란츠가 담백한 어조로 말했다.

눈꺼풀을 깜빡이던 오웬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전하의 사람이 되면 이 문서를 내리시는 겁니까?”

“날 그리 쩨쩨한 사람으로 봤다니, 실망이군.”

프란츠가 어른 흉내를 내며 혀를 끌끌 찼다.

그것도 잠시, 뻐기듯 콧대를 높이 세웠다.


“선물이다. 제국 최고의 천재 화가 오웬 백작의 아틀리에를 방문하는데 빈손으로 올 수 없지.”

“저, 전하!”

“엘리자벳에게 못 들었나 보군. 나는 오래전부터 그대를 흠모했다. 미술 교수로 초빙하고 싶을 만큼.”

오웬의 얼굴에 환희가 번졌다.

축축해진 눈가를 손등으로 꾹 누르며, 오웬이 고개를 숙였다.


“이 문서로 저를 회유하셨다면 혀를 깨물더라도 따르지 않았을 겁니다.”

“나도 알아. 그대는 폐황후의 협박에도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잖아?”

“전하께서 탄생하기 전의 일인데 어찌…….”

오웬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프란츠가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나는 폐황후 때문에 인생을 빼앗긴 이들을 찾고 있다.”

“연유가 무엇입니까, 전하?”

“나 역시 그 악녀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었기 때문이다.”

“……!”

“결코, 용서할 수 없다. 힘을 끌어모아 워든의 왕비가 된 악녀를 처단할 것이다.”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던 소년의 눈동자에 흉포한 빛이 번졌다.


‘페넬로페가 추방당한 건 폐하께서 즉위하신 직후다. 그때 전하는 고작 네 살이셨는데. 이토록 강한 복수심을 품으시다니……!’

더글라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프란츠가 잃은 사람은 누굴까?

쫓겨난 황후와 어린 황태자를 둘러싼 비밀이 새빨간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다.


“함께하겠는가, 오웬 백작?”

프란츠가 물었다. 황제의 목소리로.

오웬이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복수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는 나중에 받지. 요즘은 복제품을 그리고 있다고?”

“엘리자벳 양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세간에서는 모작으로 받아들이겠지만요.”

자신의 복제품을 그리는 오웬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제국이 발칵 뒤집힐 거야. 내 미술 교수가 된다면 파장은 더욱 클 테고. 그대를 위해 화려한 파티를 준비하겠다.”

“황공합니다, 전하.”

“대신, 해줄 일이 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황실 주최 예술전을 개최할 작정이다. 심사위원장이 되어다오.”

오웬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영문을 모르는 건 더글라스도 마찬가지였다.


‘예술전이라니…… 이 또한 엘리자벳과 상의하신 걸까?’

비밀스러운 미소를 머금을 뿐 프란츠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돌아가서 파티 준비를 해야겠구나.”

“소신이 모시겠습니다, 전하.”

더글라스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그때 아무런 낌새도 없이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그스름한 광택이 감도는 검은 가죽 갑옷을 걸친 미소년.

그의 손에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이 들려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더글라스가 프란츠를 감싸 안았다.

황태자를 해치러 온 암살자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프란츠가 변호했다.


“쉐이드는 내 호위 기사야. 계속 날 지키고 있었어.”

“저는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만…….”

“원래 보이지 않아.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프란츠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쉐이드 경이 등장했다는 것은…….”

더글라스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와장창!

아틀리에 창문을 부수며 진짜 암살자가 등장했으므로.

***

식사가 끝난 뒤에도 나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옥새가 프란츠에게 있다는 게 알려지면 어쩌지? 나쁜 놈들이 그 애를 찾아간다면?!’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괴한들에게 둘러싸인 프란츠.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프란츠.

피를 흘리며 쓰러진 프란츠.

왜 그런 모습만 아른대는 걸까?


“아드님을 위험에 빠뜨리고 밥이 넘어가세요?”

탕, 소리가 나도록 식탁을 내려쳤다.

니콜라이가 냅킨으로 입가를 눌러 닦았다.

괴이한 요리가 담겨 있던 은접시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영양 섭취와 건강 유지 또한 황제의 책무다.”

“축하드려요. 책임감도 대단하시고, 위장도 튼튼하시네요.”

“말에 뼈가 잔뜩이군.”

“프란츠 걱정은 안 하세요?”

“몹시 걱정 중이다.”

건조한 중저음이 식당을 울렸다.

나는 삐뚤어진 사춘기 소녀처럼 팔짱을 끼고 빈정거렸다.


“와우. 전혀 몰랐네요. 대단하세요.”

“여기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핀치에게 도움이 되느냐? 그렇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만.”

눈썹 한 올 깜빡이지 않은 채 니콜라이가 답했다.


“옥새를 주지 않았으면 걱정할 필요도 없잖아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니콜라이의 청록색 눈동자에 짧은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다.


“황태자의 자질을 시험하시겠다는 건가요?”

“아니, 카레스를 시험하려 한다.”

내가 아는 그 카레스?

순간 숨이 턱 막히면서, 불쾌한 두통이 몰려왔다.


‘카레스는 니콜라이가 믿는 유일한 신하잖아? 얄미우리만치 유능하고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사람인데……!’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탄식을 삼켰다.

최측근을 시험해야 하는 니콜라이의 심정은 어떨까?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카레스가 배신이라도 한 건가요?”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을 뿐이다.”

“오해일 거예요. 그가 폐하를 배신해서 얻는 게 뭐 있겠어요?”

“그걸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니콜라이의 입매가 굳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을 마구 치받았다.


“그래서 프란츠를 위험에 빠뜨렸다고요?”

“나는 프란츠를 믿는다. 쉐이드 또한.”

“이기적인 믿음이네요.”

“카레스를 믿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카레스가 핀치를 해할 리는 없다고. 전부 나의 착각일 뿐이라고…….”

니콜라이가 초점이 흐린 눈으로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봤다.

침묵이 찾아왔다.

니콜라이를 향한 원망과 측은함이 뒤엉켰다.


‘니콜라이가 괜히 트집을 잡을 리 없어. 카레스를 마지막으로 유혹한 게 언제더라?’

나는 주기적으로 카레스에게 마성을 사용했다.

마성의 유효기간이 끝났음에도 카레스는 여전히 내게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자질구레한 부탁을 처리해주는 것과 주군을 배신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마성을 듬뿍 뿌린 후에 진실을 털어놓으라고 명령한다면? 털어놓을 가능성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니콜라이가 식탁에서 일어났다.


“찬 바람을 쐬어야겠다.”

“카레스를 잡으러 가시는 건가요?”

“엘리자벳. 말도 밤에는 잠을 잔다.”

한심하다는 투로 니콜라이가 핀잔했다.

창밖엔 어둠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오늘 밤도 니콜라이와 같이 보내는 건가…….’

투명한 물에 옅은 물감이 번지듯, 이유 모를 안도감이 가슴을 적셨다.

은근한 설렘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이성을 수습했다.


‘혼자 남은 프란츠가 가엽지 않으냐? 이 시국에 야릇한 생각이나 하고, 음란 마귀가 따로 없구나!’

아직 노골적이거나 구체적인 상상은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찔렸다.

뭐, 조금은 했을지도 모르지만.


“저도 쉬어야겠어요!”

괜히 민망해져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는 게 좋겠다.”

“아칸소에게 가장 좋은 방을 준비해달라고 했어요.”

“위대하신 성녀님께서 주무시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니콜라이가 비소를 던졌다.

작작 좀 하라는 뜻으로 콧잔등을 찡그렸다.


“폐하를 위해 부탁한 거예요. 푹신한 침대 아니면 못 주무신다면서요?”

“필요 없다.”

“양보할 테니까 사양하지 마세요. 어제도 못 주무셨잖아요.”

“양보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대와 한방을 쓰면 되니까.”

뻔뻔스러울 만큼 당당한 니콜라이 때문에 심장이 쿵 주저앉았다.

한 방이 합방으로 들리는 까닭이었다.


‘진짜 음란 마귀가 씌었나?’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최대한 냉랭하게 말했다.


“동의도 없이 젊은 여성과 같은 방을 쓰시겠다니, 꿈도 야무지시네요.”

“한두 번인가.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을 텐데?”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니콜라이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입술 사이에서 쇳소리가 빠져나갔다.


“누가 들으면 우리가 맨날 같이 자는 줄 알겠어요!”

“누가 들으면 우리가 한 번도 동침하지 않은 줄 알겠다.”

느긋한 얼굴로 니콜라이가 내 말을 돌려줬다.

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도, 동침이라니요?”

“같이 자는 게 동침 아니면 뭐지?”

“그게 아니라……!”

“설마 그보다 좀…… 다른 생각을 한 건가, 엘리자벳?”

니콜라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선정적으로 느껴질 만큼 요염한 눈빛이 날 꿰뚫었다.

그가 한 발자국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며 눈꺼풀을 깜빡였다.


‘야한 생각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유혹게임이 끝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승리를 장담하며 선전포고까지 했다.

이것도 게임의 일부라면 패배는 눈앞에 와 있다.

물씬 밀어닥친 그의 체취 때문에 숨 쉬는 것마저 곤란했으므로.


“자부심을 가져라, 엘리자벳. 나와 한 번 이상 동침한 여인은 오직 그대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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