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당신의 짐승을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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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당신의 짐승을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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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당신의 짐승을 보여줘
2023.07.04.
육감적인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날 둘러싼 공기가 돌연히 팽창한 것 같았다.
아니면 모조리 증발해버렸거나.
가쁜 숨을 쌕쌕거리며 고개를 픽 돌렸다.
기 싸움에서 밀린다 해도 다른 방도가 없었다.
“얌전히 방으로 가세요. 신전에서 불경스러운 말씀도 그만하시고요.”
매섭게 경고하고 싶었다.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리지 않았다면 반쯤은 성공했을지도 몰랐다.
일말의 양심은 남았는지 니콜라이가 벽에 걸린 모라신시아 여신상을 흘낏 바라봤다.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 행동해야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니콜라이.
손가락을 튕기며 호응했다.
“제가 하려던 말이 바로 그거였어요!”
“게다가 이곳은 영험한 신물이 잠들어 있던 신전 아닌가?”
“드디어 정상적인 사고를 하시네요. 천벌은 피하시겠어요, 폐하.”
겨우 가슴을 쓸어내리려는데.
니콜라이가 내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그러니까 신전 밖으로 가자.”
찌릿, 전류가 관통하는 느낌에 펄쩍 몸을 튕겼다.
내게 고정된 청록색 눈동자가 화르륵 타올랐다.
쏟아지는 열기를 견디느라, 바보처럼 말을 더듬고 말았다.
“왜, 왜요?”
“여기는 신전이니까.”
또다시 강타당한 심장.
제발 그만하라고 빌고 싶었다.
볼썽사납게 항복하게 될까 봐.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제들이 훔쳐볼지도 모르잖아? 아칸소란 놈은 귀도 엄청 밝은 것 같던데.”
니콜라이가 촉촉한 혀로 입술을 훑었다.
그는 오늘도 숨 막힐 듯 아름다웠다.
가벼운 말로 감추고 있지만, 그 역시 갈증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대가 원하면 여기서라도 좋다만.”
니콜라이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모를 감정을 짓누르며 시치미를 뗐다.
“뭘요?”
“뭐든.”
니콜라이가 부드러운 손끝으로 내 눈썹을 쓰다듬었다.
뺨을 어루만지고, 턱선을 더듬었다.
그때마다 아랫배가 지끈거리고 간질거렸다.
심장은 이미 반쯤 터진 것 같았다.
가쁜 숨을 쌕쌕거리며 애꿎은 입술 끝자락을 물어뜯었다.
벽에 걸린 모라신시아 여신상과 신전의 엄숙한 분위기 덕분에 죄책감은 극에 달했다.
항복하는 심정으로 니콜라이를 이끌었다.
“가요! 신전 밖으로!”
이왕 이렇게 된 거, 니콜라이의 짐승을 확인할 작정이었다.
유혹하는 사람은 그가 아닌, 나여야 하니까!
***
암살자는 모두 넷이었다.
프란츠는 손바닥에 돋은 식은땀을 옷자락에 문질렀다.
쉐이드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상대들도 보통이 아니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비명처럼 프란츠의 고막을 때렸다.
‘농장의 건달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처치했는데. 이러다 쉐이드가 당하면 어쩌지?’
암살자들은 쉴 틈 없이 프란츠를 노렸다.
그때마다 쉐이드의 칼날이 그들을 막았다.
오웬과 더글라스가 보호하듯 프란츠 앞에 섰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더글라스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유쾌하지 않지만 견딜 만해.”
“잔인한 광경 때문에 심기를 다치실까 염려됩니다.”
더글라스가 손으로 프란츠의 눈을 가렸다.
프란츠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부드럽게 밀쳤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또 쓰러지진 않을 테니까.”
“하오나…….”
“내 기사가 날 위해 싸우고 있잖아.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는 게 주군의 의무야.”
사실은 두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싶었다.
책상 밑에 웅크린 채 모든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어머니가 쓰러지던 그 날처럼.
‘난 이제 4살 꼬마가 아니야. 날 노리는 놈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를 악물고 암살자들을 노려봤다.
누가 보낸 걸까?
혹시……?
프란츠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프란츠는 온갖 위험에 시달렸다.
‘폐황후가 건재할 때는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지.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가 아니었으면 견디지 못했을 거야.’
페넬로페가 추방당한 후 자객이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황태자가 공격받았다는 것만으로 피바람이 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름 모를 적들은 프란츠의 하녀를 매수하고, 음식에 독을 타고, 니콜라이와 프란츠 사이를 이간질했다.
엘리자벳이 입궁하기 전까지.
‘엘리자벳은 어디서 뭘 하는 걸까?’
프란츠는 그녀의 붉은 머리칼과 미소, 심지어 잔소리까지 그리워하고 있었다.
“크악!”
괴한 중 하나가 심장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나머지 셋도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후, 후퇴한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암살자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쉐이드의 검이 그중 한 명의 등을 꿰뚫었다.
“으아악!”
“컥!”
다른 하나의 다리에도 쉐이드의 단도가 박혔다.
필사적으로 한 명이 도망쳐나갔다.
“쉐이드. 다친 데 없어?”
쉐이드의 잘생긴 얼굴에 핏방울이 몇 점 튀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피를 털어내며 쉐이드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쉐이드 덕분에 살았는데 뭐가 죄송해?”
“전하 앞에서 사람을 또 죽였습니다.”
쉐이드가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불투명한 눈을 내리깔았다.
엘리자벳이 했던 말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프란츠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쉐이드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잘했어.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당했을 거야.”
“……정말 잘했습니까?”
쉐이드는 쉬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조금 쳐진 눈썹 탓에 외롭거나 시무룩해 보였다.
더글라스와 오웬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쉐이드 경의 임무는 전하를 지키는 것 아닙니까?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임무를 수행하신 것이니, 참 잘하셨습니다.”
“네틀톤 후작 말이 맞소. 쉐이드 경이 아니었다면 전부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정말 잘하셨소. 고맙소.”
그제야 쉐이드는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프란츠는 문득 쉐이드가 자신보다 어린 소년처럼 느껴졌다.
‘스무살이나 됐을까? 기사 서임을 받기엔 너무 어려 보여. 은신술도 대단하고…… 쉐이드의 정체는 뭘까?’
골똘히 생각에 잠긴 프란츠에게 더글라스가 충언했다.
“서둘러 환궁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전하.”
“황태자 암살에 동원된 놈들치고는 뭔가 허술해. 동료가 죽었다고 도망치는 암살자가 어디 있어? 숫자도 너무 적고.”
시신을 바라보며 프란츠가 턱을 쓰다듬었다.
더글라스 역시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옥새를 노린 놈들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 말고 내가 옥새를 가졌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한 명뿐이야.”
“그게 누구입니까?”
“내무대신 카레스.”
카레스라는 이름에 더글라스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오웬도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그는 자타공인 폐하의 충신 아닙니까?”
“폐하의 충신이지, 내게도 충신일지는…….”
프란츠가 씁쓸하게 답했다.
“옥새를 찍으면 기록이 남으니까 뒤늦게 알고 놀랐을 거야. 하지만 내가 옥새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지, 다른 곳에 보관하는지는 내무대신도 알지 못해. 있을지 없을지 모를 옥새를 빼앗기 위해 암수를 보낸다? 아무래도 이상해.”
“철두철미한 성격의 내무대신이라면 더 그렇겠지요.”
더글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이 다시 물었다.
“다른 놈이 배후란 뜻입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흐음…….”
“날 떠본 게 아닐까? 내가 누굴 만나고, 무슨 일을 꾸미는지 살펴볼. 혹은 누가 지키고 있는지.”
“사람 목숨을 가지고 간을 봤다고요?”
오웬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구두 밑창을 적시고 있었다.
프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 좀 복잡해지겠어.”
***
어떻게 하면 니콜라이의 짐승을 불러낼 수 있을까?
아칸소는 이렇게 답했다.
「짐승은 폐하의 이성 밑바닥에 감춰져 있습니다. 굶주렸을 때 놈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때가 무르익었을 때,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사용하십시오.」
작은 가죽 크로스백을 단단히 고쳐맸다.
가방 안에는 모라신시아의 눈동자와 얼음이 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여러 사람에게 첫 번째 신물을 시험해봤다.
개인차는 있지만 붉은 얼룩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딱 둘뿐이었다.
‘니콜라이와 수잔. 수잔에겐 초록 연기밖에 보이지 않았어. 니콜라이는 아무것도 없었고. 텅 비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뭔가에 가려 있었는지 몰라.’
호기심과 두려움, 긴장감이 뱃속을 할퀴고 지나갔다.
니콜라이는 날 데리고 밤길을 거침없이 걸었다.
대신관들의 공동묘지를 지나,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에 접어들었다.
신전의 종탑이 보이지 않자, 슬슬 불안해졌다.
이름 모를 풀벌레가 찌르르 찌르르 울었다.
니콜라이는 말이 없었다.
그에게 잡힌 손아귀가 살짝 욱신거렸다.
“어딜 가시는 거예요? 이렇게 컴컴한데.”
우리의 앞길을 밝히는 건 보름달뿐이었다.
불빛 없는 밤길을 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달빛이 생각보다 밝다는 걸.
하지만 LED 형광등과 도시의 밝은 빛에 익숙한 내게 달빛은 큰 위안이 되지 않았다.
이름 모를 숲 한가운데라면 더더욱 그랬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니콜라이의 중저음이 침묵을 깼다.
“그게 뭔데요?”
“곧 알게 될 것이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그가 바위틈을 해치고 들어갔다.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옆으로 꺾어야만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젖은 돌과 축축한 이끼, 썩은 낙엽 냄새 사이로 달콤한 향이 섞였다.
바위틈 사이로 탁 트인 공간이 보였다.
“와……!”
나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새하얀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거대한 꽃밭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바위 병풍을 두른 들판엔 오밀조밀 작은 흰 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보름달을 받아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 보이는 꽃밭.
쪼그리고 앉은 나는 마음껏 향기를 들이마셨다.
“이런 데 꽃밭이 있을 줄이야. 여긴 어떻게 아셨어요?”
그윽한 향기에 취해 니콜라이를 올려다봤다.
달빛을 등진 채 그가 물었다.
“그대도 꽃을 좋아하는가?”
꽃의 아름다움도 무뎌질 만큼 아릿한 통증이 찾아왔다.
신비롭게 느껴지던 밤의 정취도 가라앉았다.
꽃밭에 데려와 준 고마움도 자취를 감추었다.
향기를 모르는 그가 꽃을 좋아했을 리 없으니까.
“라일라 님도 꽃을 좋아하셨나 보죠?”
왜 퉁명스러운 말만 나가는 걸까.
어차피 지난 일인데.
과거는 힘이 없고, 라일라는 세상을 떠났는데.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서글픔이 날 헝클어놓았다.
그가 라일라의 기억이 담긴 장소에 날 데려왔다는 것이 가슴을 찔렀다.
‘너는 그녀의 대용품일 뿐이다.’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그만 돌아갈래요.”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걸 잘 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조금쯤은 그도 상처 입길 바랐다면 너무 이기적일까.
“엘리자벳.”
니콜라이가 내 손을 잡았다.
여전히 뜨거웠으나 더는 견디기 어려웠다.
“놔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그 손을 뿌리치다 균형을 잃었다.
넘어질 때 그의 옷자락을 붙든 것도, 무릎을 찬 것도 절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