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 나 혼자 갖고 싶어 (89/97)


#89. 나 혼자 갖고 싶어
2023.07.07.


일순간 균형을 잃은 내가 꽃밭에 풀썩 쓰러졌다.

나를 붙들려던 니콜라이도 내 위로 넘어졌다.

통증을 느낄 겨를은 없었다.

그 모든 광경이 느리게 재생되는 동영상 같았다.

아니, 지나치게 상투적인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전생이었다면, ‘아직도 이런 걸 우려먹냐?’ 코웃음 치며 채널을 돌렸을 텐데.

막상 경험해보니, 클리셰가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이유를 알 것 같기도.


“읏.”

내 위로 포개진 그가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꽃향 위로 그의 체취가 덧씌워졌다.

강렬하고도 포근하며, 청결하면서도 남성적인 향이었다.

정신줄을 꼭 붙들어 보려 했지만, 이성은 빠른 속도로 희미해졌다.

니콜라이가 다가올 때마다 그랬다.

오늘은 더 특별했다.

그와 나의 몸이 빈틈없이 닿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내 가슴과 아랫배를 짓눌렀다.

그리고 엉켜있는 다리.

그게 싫지 않으니 더 미칠 노릇이었다.


‘니콜라이의 짐승을 깨우려고 했는데. 그 전에 내가 짐승이 돼버리겠어……!’

남자의 숨결이 거칠게 흩어졌다.

귓바퀴와 귓불에서 시작된 떨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심장박동에 맞춰 떨림은 세차게 전신을 내달렸다.

니콜라이는 일어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지그시 날 내려다보는 청록색 눈동자에 바짝 긴장한 내가 비쳤다.

결 고운 속눈썹이, 높다란 콧대가, 유난히 붉은 입술이 오직 날 향하고 있었다.


“비켜주세요.”

입안에 고인 마른침을 꼴깍 넘기며 눈을 치켜떴다.


“이제야 날 똑바로 봐주는군.”

“눈 돌린 적 없어요.”

“내게서 다른 뭔가를 보는 것 같던데?”

정곡을 찔린 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날 놀리는 건지, 달래는 건지 중저음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라일라 때문인가?”

그런 거 묻지 마요.

비참해질 뿐이니까.


“설마…… 그녀를 질투하는 건가?”

그가 머뭇거리며 묻지 않았다면 가슴을 확 떠밀었을 거였다.

발로 걷어차고 싶어졌을지도 몰랐다.

미간을 찌푸린 니콜라이의 얼굴엔 모호한 의심이 가득했다.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진 뺨을 가린 채 목소리를 높였다.


“천하의 엘리자벳이 누굴 질투해요? 그럴 리 없잖아요!”

갈무리하지 못한 당혹스러움, 원망, 민망함이 골고루 튀어나왔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었다.

내 속도 모르고 니콜라이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그대가 질투해주면 좋겠다. 내가 그대 곁의 모든 사내를 질투하듯이.”

스스로 한심하게 여기고 있음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누가 누굴 질투한다고요?”

장난치지 말라는 투로 되물었다.

시치미를 뗄 줄 알았던 니콜라이의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씹어뱉듯 말했다.


“더글라스. 오웬, 아칸소, 가끔은 프란츠까지 질투한다.”

“……!”

“그대의 시녀, 그대가 돌돌 말고 자는 이불, 그대 방에 놓인 화병까지 질투할 때도 있지.”

심한 부끄러움을 삼키듯 니콜라이가 눈을 꾹 감았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바빴다.

조금만 방심하면 헤벌쭉 입꼬리가 치켜 올라갈 것만 같았다.


‘홀딱 빠졌네, 빠졌어.’

유치한 승리감과 도취감이 가슴을 채웠다.

방금까지만 해도 첫사랑의 대용품 취급당한다고 우울했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너무 복잡하고 고달픈 일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바쁘게 오가는 날 보면서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시금 실감했다.


‘니콜라이도 날 좋아해. 하지만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과 그가 날 좋아하는 건 좀 다르겠지.’

흥미로운 계약 상대.

무대 위의 여주인공.

놓칠 수 없는 이용대상.

그밖에 또 뭐가 있을까?

연인도 부부도 아닌 상태로 속절없이 깊어만 가는 연심을 어쩌면 좋을까.

니콜라이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달빛은 그윽했고, 꽃향은 아찔했다.

나는 니콜라이 뒤에 어른대던 라일라의 그림자를 지웠다.

가시지 않은 술기운 탓일까.

꽃향기가 만들어낸 야릇한 분위기 때문일까.

충동적인 열망이 내 안에서 끓어올랐다.

마침 구름 뒤로 보름달이 얼굴을 감췄다.

그 틈을 타 그의 입술을 훔쳤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날처럼.


 


‘당신을 가지고 싶어. 나 혼자 독점하고 싶어.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도록.’

당혹스러울 만큼 강렬한 소유욕이 나를 사로잡았다.

두 팔로 니콜라이의 목을 간절히 끌어당겼다.

기다렸다는 듯 그가 내 여린 살을 헤치고 들어왔다.

꽃잎보다 달콤한 숨결이 쏟아졌다.

꾹 감은 눈꺼풀 안으로 샛별이 반짝였다.

불안을 지우고, 쓸쓸함을 밀어내기 충분한 빛이었다.


‘당신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어. 짐승이어도 좋아. 니콜라이, 당신이라면.’

촉촉하고 부드러운 살점이 어우러지는 소리가 농밀했다.

니콜라이가 조심스럽게 내 날개뼈를 더듬었다.

그 와중에도 밀착된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허리를 뒤틀어봤지만, 집요한 그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 역시 그를 원하고 있었다.

하나로 맞붙은 숨결이 달아올랐다.

니콜라이의 체온을 담은 손이 등줄기를 따라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으읏.”

어금니 사이에 물려 있던 신음이 빠져나갔다.

니콜라이도 느꼈으리라.

한 겹 옷으로 감추기에 내 몸은 너무나 솔직히 반응하고 있었다.


“엘리자벳…….”

무언가 갈구하는 목소리.

위에서 날 짓누르고 있으면서 그는 조금씩 떨고 있었다.


“널 가지고 싶다.”

한 조각 남은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오늘 밤 당신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가 똑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원한다면. 영혼이 부서진대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차마 니콜라이를 바라보지 못하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얻어낸 그가 굶주린 짐승처럼 내 목선으로 달려들었다.

입술로 내 턱, 쇄골과 어깨를 차례로 간질였다.

한없이 부드러운 살점에서 이토록 맹렬한 전류가 튀는 걸까.

그는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니콜라이를 삼키고, 독점하고, 휘두르고 싶었다.


“……저도 폐하를 가질래요.”

꽃향기를 품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구름이 걷히고 보름달이 드러났다.

니콜라이의 근육질 몸이 딱딱하게 경직한 것도, 그의 눈빛이 기묘하게 번뜩인 것도 그때였다.

니콜라이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너의 소원이라면 들어줘야겠지?”

비밀을 품은 오만하고도 교활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본능이 새빨간 경고등을 울렸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몸과 얼굴을 가지고 있음에도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사람, 니콜라이가 아니야……!’

눈을 부릅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니콜라이. 아니, 짐승이 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아칸소의 경고가 퍼뜩 떠올랐다.


「굶주렸을 때 놈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때가 무르익었을 때,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사용하십시오.」

왜 하필 지금일까.

지금 이게 그 짐승이라면, 놈은 대체 무엇에 굶주렸길래 지금 모습을 드러낸 걸까.


「놈은 그 냄새를 먹고 살아가지. 놈과 함께 저승꽃을 감시하고, 막는 것이 황제의 의무다.」

니콜라이가 두려운 표정으로 ‘놈’의 존재를 어렴풋이 털어놓던 날 그렇게 말했었다.

저승꽃 냄새를 맡은 지 오래라 굶주린 걸까?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가죽 가방을 더듬었다.

하지만 나보다 그가 더 빨랐다.


“실망이야, 엘리자벳. 이런 거로 날 시험 하려 하다니.”

그가, 아니, 놈이 큭큭 낮은 웃음을 흘렸다.

놈의 손에 구리 모노클이 들려 있었다.

***

카레스가 황태자 궁으로 찾아왔을 때 프란츠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오랜만이야, 카레스.”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프란츠가 싱긋 웃었다.

카레스의 시선이 책 제목을 훑었다.

모라신시아 교단의 대주교가 저술한 『역마와 여신의 기적』이라는 책이었다.


“신학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백성들이 믿고 따르는 종교를 아예 외면할 수는 없지.”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이 책은 역사서에 가까워. 선황제 시절 어떻게 저승꽃을 극복했는지 쓰여 있으니까.”

카레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던 프란츠가 가볍게 물었다.


“바쁘신 내무대신께서 무슨 볼일이야?”

“제가 왜 전하를 찾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카레스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나는 10살 꼬마일 뿐인데.”

프란츠가 어린아이다운 천진난만한 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잠시, 연두색 눈동자가 예리해졌다.


“나들이 다녀온 걸 지적하려는 건가?”

카레스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솔직하게 말씀하실 줄 몰랐습니다.”

“황궁에서 카레스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칭찬 감사합니다.”

“미안하지만 잔소리는 사양할게. 카레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전혀 없었으니까, 신경 꺼.”

“황궁 밖은 위험합니다.”

“설마 황궁은 안전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농담하지 말라는 투로 프란츠가 눈살을 찌푸렸다.


“카레스도 알잖아. 힘없는 황태자에게 안전한 곳은 없다는걸.”

“그래서 힘을 가지시려는 겁니까?”

고저 없는 목소리로 카레스가 물었다.

설마 했던 마음이 한 줄 스산한 바람이 되어 프란츠를 파고들었다.

충신의 배신을 아직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얗게 질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섣불리 움직이시면 화를 입게 됩니다. 폐하의 보호막이 없을 땐 더더욱 말입니다.”

“얌전히 있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성급하고, 조심성이 부족하십니다.”

“카레스야말로 너무 성급한 것 같은데.”

카레스의 눈썹이 보일 듯 말 듯 꿈틀거렸다.


“무얼 꾸미시는지는 모르지만, 관두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폐하와 엘리자벳 님이 안 계시는 동안 전하를 지키는 것이 제 임무니까요.”

프란츠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피를 뿌리며 쓰러진 괴한들과 시무룩해진 쉐이드가 떠오른 탓이었다.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카레스?”

파르스름한 분노를 삼키며 프란츠가 물었다.

표정 변화 없이 카레스가 손바닥을 불쑥 내밀었다.


“옥새부터 내놓으십시오, 전하.”

“……!”

“지금부터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

바위틈을 헤집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가? 너도 날 가지고 싶다며!”

니콜라이는 이런 식으로 빈정거리지 않아.

너라고 부르지도 않고.

불안과 분노, 두려움이 차례로 날 괴롭혔다.

니콜라이가 다스리지 못했다는 그 짐승이 내 뒤를 쫓고 있었다.


“오해하지 마. 난 그냥 배가 고플 뿐이야.”

놈이 내 어깨를 붙들었다.

그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거 놔. 너와는 말 섞고 싶지 않아.”

“워워. 진정해. 그냥 오래 굶어서 그런 거라니까.”

그가 두 손을 들고 한 발짝 물러섰다.


“친한 척하지 말고 내 물건이나 돌려줘.”

가능하다면 니콜라이도.

날 바라보는 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신의 눈동자로 날 훔쳐볼 거잖아? 이래 봬도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편이라.”

“들키면 안 되는 뭔가 있나 보지?”

“너도 마냥 떳떳하지는 않잖아. 안 그래, 엘리자벳?”

사뭇 걱정스럽다는 듯 놈이 느물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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