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늑대의 뜻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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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늑대의 뜻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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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늑대의 뜻대로
2023.07.11.
“니키를 기다려주지 못하고 몰래 비밀을 들여다보려 했잖아? 아칸소라는 신관 놈과 작당해서.”
놈이 보란 듯이 구리 모노클을 내 앞에 내밀었다.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흔들 듯 살랑거리며.
“이 사실을 니키가 알면 어떨까?”
“…….”
“배신감에 치를 떨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승리감에 젖은 목소리가 내 속을 뒤집었다.
“너 누구야?”
“그것도 모르고 덤볐단 말이야?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쯧쯧.”
실망이라는 투로 놈이 혀를 찼다.
싸구려 도발에 넘어가 줄 마음은 없었다.
“내가 너처럼 하찮은 짐승까지 알아야 해?”
팔짱을 낀 내가 입꼬리를 위로 끌어당겼다.
그의 오른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웃음을 터뜨리긴 했지만.
“하하. 얕은 수작 부리지 마, 엘리자벳. 니키에게는 몰라도 나한테는 안 통하니까.”
“폐하보다 네가 더 유능하다는 뜻이야?”
“새파랗게 어린 니콜라이와 비교당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달까.”
“그럴만하네. 넌 선황제 시절부터 예브레이 황족에게 기생했을 테니까.”
놈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날 훑어봤다.
미소를 띠고 있지만, 청록색 눈동자는 날붙이처럼 차갑게 빛날 뿐이었다.
퍼뜩, 모라신시아 여신상의 옆에서 본 늑대, 프란츠의 그림에 늘 등장하던 늑대들이 겹쳐 보였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넘겨짚네……?”
놈이 내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짐승 특유의 움직임만으로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송곳니가 새삼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한낱 짐승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니콜라이의 겉모습으로 지분거리는 놈이라면 더더욱.
“조심해, 엘리자벳. 난 니키랑 달라.”
더운 숨결이 귓바퀴를 간질였다.
요놈 봐라?
입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검지로 놈의 가슴팍을 쿡 찌르며 경고했다.
“너야말로 조심해, 늑대.”
동그랗게 벌어지는 청록색 눈동자.
놀라움도 잠시, 늑대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뭐야, 알고 있었잖아?”
내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반가운 모양이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눈동자를 빛내며 늑대가 물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언제부터 눈치챈 거야?”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호들갑을 떠는 늑대를 보며 확신을 굳혔다.
‘자의식, 자존심 모두 강한 놈이네. 니콜라이를 깔보는 척하면서 경쟁심을 드러내고 있어.’
이런 놈 하나 다룰 줄 모르고 어찌 악녀 노릇을 하겠는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모라신시아 여신 옆에는 늑대가 있잖아? 너는 저승꽃을 추적하고 격리하는 힘을 가졌고. 여신의 늑대. 너, 그거잖아?”
“제법인데? 칭찬해줄게!”
늑대가 손뼉 쳤다.
아직 감탄하기는 일렀다.
“너에게 왜 신물을 쓰려고 한 줄 알아?”
“아칸소란 놈이 널 꼬셨잖아.”
“성녀인 내가 신관 나부랭이의 말을 귀담아들었을까? 그것도 여신의 늑대를 상대로? 불경스럽네.”
늑대를 은근히 띄워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늑대에게 바짝 붙은 내가 요염하게 눈을 치떴다.
“나는 네가 건강한지 확인하고 싶었어.”
“……내 건강?”
“오랫동안 하찮은 인간 몸에 갇혀 있었잖아. 어딘가 고장 났으면 어쩌나 싶었지. 너는 막중한 임무를 가졌으니까.”
그러니까 모두 늑대, 널 위해서란 말이었다.
늑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내가 절 걱정한다는 사실이 기쁜 모양이었다.
“성녀도 별수 없구나. 나는 절대 아프지 않아. 왜냐하면…….”
뻐기듯 떠들던 늑대가 입을 다물었다.
내게 말려들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걸까?
“아무튼, 그런 걱정 따윈 할 필요 없어, 향기로운 엘리자벳.”
달빛을 받은 놈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왠지 모를 불안감을 삼키며 손을 내밀었다.
“여신의 눈동자나 돌려줘.”
“싫다면?”
“소심한 겁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늑대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솔직하고 단순한 녀석이었다.
그럴수록 다루기 쉽지.
“너처럼 우월한 존재가 신물을 무서워하다니, 너무 이상하잖아? 너는 여신의 사도고, 신물은 고작 부속물일 뿐인데.”
“…….”
“난 너의 모든 게 궁금해. 그것도 이해 못 한다니 실망할 수밖에.”
늑대의 자존심을 긁으며 빈정거렸다.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늑대가 구리 모노클을 내밀었다.
“좋아, 성녀님. 신물을 돌려줄게.”
역시 통했구나!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순간 늑대가 모노클을 뒤로 감췄다.
“뭐 하는 거야?”
“맨입으로 준다고는 하지 않았어.”
“뭐?”
“조건이 있다고, 엘리자벳.”
니콜라이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면은 비슷하네.
“말해봐.”
“네 향기를 듬뿍 맡게 해줘.”
“……향기?”
“네게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체취를 맡고 싶어. 니콜라이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직접.”
“어떻게 하면 돼?”
“할 것 없어. 그냥 옆에 있기만 하면 되니까.”
늑대가 새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티끌 한 점 묻지 않은 순수한 웃음이라서 더 미심쩍었다.
니콜라이를 향한 그리움이 복받쳤다.
‘니콜라이를 되찾는 법도 가르쳐줬어야지, 아칸소!’
아칸소를 원망하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건 나였다.
책임도 오롯이 내 몫이었다.
“좋아. 대신 신물을 먼저 쓸 거야.”
“뜻대로 하시지, 성녀님.”
무대 위 배우처럼 과장된 태도로 늑대가 허리를 굽혔다.
구리 모노클을 오른쪽 귀에 걸고 늑대를 바라봤다.
‘뭐지? 이 초록 연기는?!’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통해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는 초록 연기가 비쳤다.
수잔에게서 봤던 것과 몹시 흡사했다.
하지만 색이 훨씬 더 짙었다.
양도 세 곱절 이상은 될 것 같았다.
이게 무슨 뜻일까?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수잔이랑 비슷한 이유는? 니콜라이의 몸 전체가 초록 연기에 잠식된 것 같아…….’
신음을 겨우 삼켰다.
눈을 가늘게 뜬 늑대가 요구했다.
“이젠 내 차례야, 엘리자벳.”
냄새만 맡겠다는데 무슨 큰일이 벌어질까 싶었다.
내 머릿속은 초록 연기에 대한 의심과 가설로 꽉 차 있었다.
“털끝 하나, 옷깃 한 올 손대지 마.”
두 눈을 감고 팔을 축 늘어뜨렸다.
어쩌면 이 순간을 죽도록 후회하게 될 줄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떨었는지도.
***
클라우디아는 기사 선발과 기사단 훈련으로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
브렌든 후작을 심문하고, 4대 명문가의 비리를 캐는 일도 멈출 수 없었다.
귀찮은 잡무도 이어졌다.
쏟아지는 파티 초대장 거절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목욕을 마치고,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자 묵직한 피로가 찾아왔다.
‘명상이나, 몸풀기 운동만으로 부족해.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데 가장 좋은 건…….’
아무도 없는 방에서 좌우를 둘러본 클라우디아가 무릎을 꿇고, 침대 밑에 숨겨둔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 클라우디아의 보물이 감춰져 있었다.
더글라스가 쓴 로맨스 소설 『제국의 붉은 별』 양장본이었다.
‘몇 번이나 읽었지만 정말 훌륭해. 문장도 군더더기 없고. 심리표현도 어쩜 이렇게 유려할 수가……!’
귀한 책이 닳거나 찢어질까 봐 조심조심 책장을 넘겼다.
소장용 책은 따로 있지만, 감상용 책도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유일한 취미를 즐기는 클라우디아의 얼굴에 사춘기 소녀처럼 해맑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휘하 기사들이 봤다면, 경악할 게 분명했다.
‘우리 단장님은 저렇게 웃는 분이 아니야! 귀신아, 단장님을 내놓아라!’
그러거나 말거나.
클라우디아는 여주에게 키스하려는 남주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클라우디아의 어깨가 튀었다.
연이어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라디아. 들어가도 될까?”
“……더기?”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바쁘면 내일 다시 올게.”
“아니야. 잠깐만 기다려줘.”
태연한 대답과 달리 클라우디아의 낯빛은 창백하게 굳었다.
책을 침대 밑에 감추고,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몸놀림이 번개 같았다.
적진을 파고들 때보다 빠르면 빨랐지, 못하진 않았다.
“이제 들어와도 돼.”
한 줄기 식은땀이 헐렁한 셔츠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더글라스가 미안한 기색으로 문을 열었다.
“실례할게.”
더글라스가 기사단장 처소에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늦은 밤, 약속도 없이 찾아온 것도 처음이었다.
침착하자고 다짐하며 클라우디아가 숨을 골랐다.
“물이라도 줄까?”
응접실 안락의자에 앉은 더글라스에게 물었다.
찻잎을 들여놓지 않은 게 몹시 후회스러웠다.
찻잔도, 주전자도, 차에 곁들일 비스킷도 없었으니 차라리 다행일지 몰랐다.
“괜찮아. 네게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
더글라스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클라우디아가 그쪽으로 몸을 숙였다.
최강 여기사다운 진중함과 기백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무슨 일인데?”
“황태자 전하의 호위를 부탁하고 싶어.”
역시 일 때문이었구나.
내가 보고 싶어서 올 리가 없지.
익숙한 서걱거림을 외면하며 클라우디아가 대답했다.
“내가 나설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쉐이드 경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라디아?”
“모를 수 없지. 은밀하지만 흉포한 검을 가졌으니까.”
“쉐이드 경의 정체가 뭐야?”
“신경 꺼.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이잖아. 혹시…….”
클라우디아가 미간을 좁혔다.
짐작한 대로라는 듯 더글라스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전하께서 습격을 받으셨어. 쉐이드 경이 없었다면 위험했을 거야.”
“그리 놀랍진 않군.”
“내무대신이 전하를 찾아가 옥새를 넘기라 했고.”
“옥새? 옥새가 왜 전하께 있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더글라스가 간략히 설명했다.
오웬의 아틀리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던 클라우디아가 턱을 쓰다듬었다.
“전하께서 옥새를 갖지 않았다고 하자, 내무대신이 얌전히 물러갔다…….”
“네 생각은 어때, 라디아?”
“그에게서 살의를 읽은 적 없어. 그게 배신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아니지만.”
“폐하께서 환궁하시기 전에 무슨 일이 생길까 염려돼.”
더글라스의 단정한 얼굴이 먹구름 낀 하늘처럼 흐려졌다.
마른세수를 하는 그에게 클라우디아가 물었다.
“언제부터 황태자 측근이 된 거야, 더기?”
“너처럼 출세해보려고. 5대 명문가의 명성을 되찾는 것도 좋겠지.”
“장난치지 마.”
“수잔이 전하를 잘 따라서 그런가. 어린 분이 혼자 애쓰는 것이 안쓰러워서 그런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힘이 되어드리고 싶어.”
더글라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외로운 사람, 아픈 사람, 약한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엘리자벳이 프란츠 편이라는 것도 결정에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넌 엘리자벳이 애처롭다고 했지. 화려해 보일 뿐 외로운 사람이라고. 하지만 너는, 널 짝사랑하는 난 보지 못해. 네게 나는 늘 강한 사람이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클라우디아가 말했다.
“전하의 안전은 염려하지 않아도 돼. 쉐이드 일족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강하니까.”
“일족이라고?”
“인테드 제도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 궁금하면 알려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