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야한 생각은 혼자 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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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야한 생각은 혼자 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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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야한 생각은 혼자 다 하면서
2023.07.14.
더글라스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디아가 이어 말했다.
“그림자에 숨는 암살자 가문이었다고 해. 절대 잡히지 않고,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그런 기술이 어떻게 가능하지?”
“나도 모르겠어. 어쨌든 은신 기술은 나보다 월등해. 쉐이드의 기척을 감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니까.”
믿지 못하겠다는 듯 더글라스가 눈을 크게 떴다.
“쉐이드 일족은 오랫동안 암흑가를 지배했어. 몇 년 전 갑자기 자취를 감췄지만.”
“그때 예브레이 황실과 인연을 맺은 걸까…….”
“지금으로선 그렇게 보여.”
“암흑가 인간이 황족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드문 일이로군.”
클라우디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쉐이드 일족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지. 예브레이 황실에 빌붙어야만 했던 이유도.’
클라우디아는 쉐이드 일족 중 하나를 휘하에 둔 적 있었다.
그가 죽기 전 일족의 비밀에 대해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쉐이드의 정체를 눈치채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거였다.
“쉐이드는 황태자 전하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자세한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더글라스에게 괜한 걱정을 안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황태자궁 호위 기사를 교체하도록 하지.”
“고마워, 라디아.”
더글라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떠나려는 그를 붙잡은 건 반쯤 충동이었다.
“더글라스. 나도 부탁이 있는데.”
“뭔데?”
“전하를 만나게 해줘.”
“그건 어렵지 않지만. 왜?”
더글라스가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클라우디아는 황실 기사단장으로서 임무에 충실할 뿐, 프란츠에게는 그 이상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개혁의 깃발을 들었다지만, 니콜라이를 주군으로 섬기는 것도 아니었다.
“네틀톤 후작가는 황태자파로 분류될 거야. 오웬 백작을 복권시키면 전하를 견제하는 세력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테고.”
“각오했어.”
더글라스의 눈빛이 한층 더 뜨겁고 견고해졌다.
“네가 힘을 보태려는 분을 나도 봐두고 싶어.”
“라디아! 설마 그건…….”
환한 미소가 더글라스의 얼굴에 번졌다.
클라우디아가 차갑게 말을 잘랐다.
“아무 기대 하지 마. 그냥 봐두려는 것뿐이니까.”
“그래도 기뻐! 전하께서도 무척 반가워하실 거야!”
더글라스가 클라우디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릴 땐 이 손을 잡고 푸른 잔디밭을 달리곤 했다.
소녀의 작은 세계에서 가장 반짝이는 건 핑크색 머리카락을 나부끼는 소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마음은 다른 여인에게 쏠려 있었지만.
“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야, 더글라스.”
굳은살이 박인 손을 슬쩍 빼면서 클라우디아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냥 널 좀 더 자주 보고 싶을 뿐이야. 나는 네가 엘리자벳에게 상처받길 기다리고 있어. 그래야 내가 들어갈 틈이 생길 테니까.’
***
늑대가 내 곁으로 다가온 것까지 기억나는데.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둔탁한 두통과 함께 늑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고마워, 엘리자벳. 넌 내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는 여자야. 그리고…….」
짙은 두통이 관자놀이를 들쑤셨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치형 창문 사이로 정오의 햇살이 파고들었다.
“언제 신전으로 돌아왔지? 침대에 누운 기억도 없는데…….”
현기증과 울렁거림을 동시에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화가 단단히 난 중저음이 고막을 때렸다.
“그러게 왜 그놈과 말을 섞었지?”
“……폐하?”
화들짝 놀라 뒤돌아봤다.
니콜라이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대리석으로 깎은 조각상처럼 무표정한 얼굴.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남자가 돌아온 거였다.
“무방비 상태로 놈에게 체취를 맡게 하다니. 제정신인가?”
그의 질책마저도 반가웠다.
시큰거리는 콧잔등을 손등으로 문지른 후,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두통도, 현기증도 까맣게 잊었다.
맨발로 차가운 판석을 밟으며 그에게 달려갔다.
“폐하!”
두 팔 벌려 니콜라이의 허리를 껴안았다.
낯익은 체온이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을 덥혔다.
그가 잠시 휘청였다.
여인과의 접촉에 익숙하지 않은 남자처럼 멈칫거리는 걸 보니 니콜라이가 분명했다.
“이런다고 용서할 줄 아는가?”
니콜라이가 사뭇 냉정하게 대답했다.
슬쩍 올려다본 그의 뺨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체취도, 다정함을 숨기지 못하는 눈빛도 오로지 니콜라이만의 것이었다.
목 끝까지 차오른 그리움과 그를 되찾았다는 안도감이 샘솟았다.
“보고 싶었어요.”
“……!”
파르라니 떨리는 청록색 눈동자.
잃어버린 보물을 되찾은 것처럼 그의 모든 것이 감격스러웠다.
“정말 정말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몇 개의 단어로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그의 가슴에 볼을 비비며, 앙탈인지 어리광인지 모를 것들을 쏟아냈다.
“폐하를 못 보게 될까 봐 무서웠어요. 폐하가 너무 그리웠어요. 늑대의 목을 조르고 싶을 정도요.”
“그대는 정말…….”
예기치 못한 고백을 받은 니콜라이가 말끝을 흐렸다.
날 혼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아는 건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였다.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죄송해요. ‘그놈’이 궁금했어요. 폐하 안에서 꺼내 보고 싶었어요. 앞으로는 보고 싶지 않지만요.”
늑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부르르 몸서리가 쳐졌다.
늑대가 있다는 것조차 잊고 싶었다.
다시는 니콜라이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으므로.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니콜라이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수치스러움이 담긴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늑대는 니콜라이의 콤플렉스이자, 트라우마야. 내게 고백하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겠지. 그런 늑대를 억지로 끌어냈으니…….’
제멋대로 튀어나와 내 몸을 차지하는 존재가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니콜라이는 저주받은 운명을 후대에 물려줘야 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공포였다.
“건방지고, 교활하고, 음흉한 놈이었어요.”
“제대로 봤다.”
“우리 말을 늑대가 듣고 있나요?”
“내가 완전히 통제하고 있을 때 늑대는 의지를 갖지 못한다. 말을 걸 수도 없고, 내 육체를 차지할 수도 없다.”
“폐하께서 흔들리신다면요?”
“순식간에 날 짓누르고 잠식한다. 그대가 경험한 그대로.”
니콜라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핏줄이 불거진 손등을 내가 두 손으로 감쌌다.
“……죄송해요.”
“내가 느슨했어. 방심한 내 잘못이야.”
니콜라이가 한쪽 팔로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안겨 있는 것은 나인데 그가 내 품에 기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완벽했다면 늑대가 그대를 이용해 배를 채우는 일도 없었겠지.”
“배를 채운다고요?”
“늑대는 인간의 체취를 먹고 사니까. 냄새를 맡으며 기운을 모으지.”
“제가 정신을 잃은 것도 그 탓인가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체취와 함께 기력도 많이 빠져나갔을 것이다.”
“아…….”
“늑대가 방심했을 때 내가 놈을 다시 밀어 넣은 것이고.”
“감정에 휘둘리지만 않는다면 늑대도 폐하를 어쩌지 못하겠군요.”
이제야 조금쯤 늑대와 니콜라이의 관계가 이해됐다.
씁쓸함은 변하지 않았지만,
“늑대에게 주도권을 빼앗겼을 때 폐하께서도 늑대가 무슨 짓을 하는지 느끼시나요?”
“슬프지만 아주 또렷이.”
자신이 혐오스럽다는 듯 니콜라이가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힘차게 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왜 슬픈 일이에요? 아주 다행한 일이죠!”
“?”
“늑대가 엉큼한 짓을 했는데 폐하가 알지도 못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훨씬 끔찍할 것 같은데요?”
“……그런가.”
“물론이죠! 폐하께서 늑대의 모든 순간을 감시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얼른 돌아오신 거잖아요?”
그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싶었다.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싶었다.
내 소망을 읽은 니콜라이의 눈가도 부드럽게 휘어졌다.
“너그럽구나, 엘리자벳.”
“사실 따지고 보면 저 때문이잖아요. 제가 아니었다면 폐하께서 흥분할 일도 없으실 테고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순간 니콜라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내가 또 무슨 말실수라도?
“그것까지 눈치챘다고……?”
니콜라이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변명을 늘어놓았다.
“절대 의도한 게 아니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문제고.”
“뭐가요?”
“몸이란 게 늘 내 뜻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나도 늘 조심한다고 조심하지만, 가끔은 나도 모르게…….”
니콜라이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갔다.
영문을 모르는 내가 검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때 도포를 입고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엘리자벳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야한 생각은 혼자 다 하면서 이럴 때만 순진한 척하는구나! 흥분이라는 단어가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는 걸 모르느냐?’
감정이 복받쳐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라면?
설마……!
‘남자의 흥분! 사내의 열정! 너 때문에 말초가 자극받아 불수의근이 요동치는 그 상태 말이다, 에잉!’
꼬장꼬장한 꾸지람을 듣고 나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으악,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온몸의 피가 얼굴에 모이는 것 같았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촘촘히 돋았다.
니콜라이는 난처한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의 귓바퀴는 내 머리카락처럼 선홍빛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야릇하게 달아올랐다.
문밖에서 아칸소가 부르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몰랐다.
“마차가 준비됐습니다, 성녀님. 이만 출발하시지요.”
***
신전 앞뜰에 모라신시아 교단 문장이 새겨진 4두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흰 제복을 차려입은 사제들이 두 줄로 늘어섰다.
신전 밖으로 한 걸음 내딛자, 사제 중 하나가 붉은 양탄자를 펼쳤다.
‘뭐야, 아카데미 시상식도 아니고.’
내 발밑에서 마차까지 좌르륵 펼쳐지는 양탄자를 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과잉 의전은 질색이라고 했을 텐데요.”
“전혀 과하지 않습니다. 성녀님의 신발이 더러워지는 건 큰일이니까요.”
아칸소가 뻔뻔하게 답했다.
니콜라이가 비소를 터뜨렸다.
“꽃잎은 왜 뿌리지 않는 건가? 성녀님께서 행차하시는데 무희의 춤과 악단의 연주를 곁들였어야지.”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폐하. 다음엔 꼭 그리하겠습니다.”
“다음은 없을 것이다. 엘리자벳은 나와 함께 환궁할 테니까.”
“아뇨. 성녀님께서는 저와 함께 대신전으로 가실 겁니다.”
한 치의 양보 없이 두 남자가 팽팽하게 맞섰다.
여보세요?
제 의견은 안 물어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