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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허락 없이 손대지 마 (92/97)


#92. 허락 없이 손대지 마
2023.07.18.



“누가 황궁으로 따라간댔어요?”

니콜라이 얼굴 앞에서 손바닥을 흔들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듯 그는 아칸소만 노려볼 뿐이었다.


“대신전으로 간다는 말도 안 했거든요?”

아칸소에게도 똑같이 했다.

아칸소도 눈길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선언했다.


“제도의 아틀리에로 갈 거예요. 거기로 데려다줄 것 아니면 두 분 다 빠지세요.”

눈썹을 축 늘어뜨린 아칸소가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녀님 뜻이 그렇다면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대주교님을 포함한 모든 사제와 온 제국의 성도들이 성녀님만 기다리고 있지만 말입니다.”

“불쌍한 척하지 말아요. 날 모시겠다면 명령부터 따르세요.”

냉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매섭게 말했다.

조금쯤 실망해도 좋으련만.

아칸소는 오히려 나의 위엄과 카리스마에 감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종 아칸소, 성녀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지까지 신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추기경이 예를 표하자, 다른 사제들이 다 함께 허리를 숙였다.


“성녀님을 모시겠습니다!”

민망하지만 왠지 으쓱해지는데?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아보겠어?

하얀빛의 농간에 시달릴 거라면 성녀 치트 쯤이야 당당히 이용해야지!

대상단의 상속녀로 떵떵거리던 생활은 입궁하자마자 끝났다.

황족과 대귀족들 사이에서 나는 평민에 불과했다.

마성 덕분에 큰 무리 없이 버텼지만.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갈무리하며 아칸소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니콜라이가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표범처럼 아칸소의 손을 쳐내기 전까지.


“왜 이러십니까, 폐하?”

“내 허락 없이 엘리자벳에게 손대지 말라.”

“폐하야말로 성녀님의 앞길을 막으시면 안 됩니다.”

“여신이 두렵다면 물러서라. 너희 성녀님은 나와 함께할 것이다.”

“그건 폐하의 헛된 희망…….”

아칸소의 말을 자르며 니콜라이가 내 손을 움켜잡았다.


“엘리자벳, 나와 얘기 좀 하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요.”

“이걸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니콜라이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의 손에 돌돌 만 종잇조각이 들려 있었다.

의아해하는 내 귓가에 니콜라이가 속삭였다.


“황궁에서 전서구가 왔다.”

“새로운 소식이 있었나요?”

“클라우디아 경이 핀치의 검술교관을 자청했다더군.”

“네?!”

헛바람을 집어삼킬 틈도 없었다.

내 귀로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검술 수업은 중단한 상태인데요? 클라우디아 님도 무척 바쁘실 테고요!”

동그랗게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리며 높은 목소리를 토했다.

니콜라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녀가 이름뿐인 자리로 가겠다 한 이유가 무엇이겠나?”

“클라우디아 님이 전하의 사람이 되기로 했다는 건가요?”

“프란츠가 제법 잘해주고 있는 모양이다.”

“더글라스 님도 애써주셨겠지요. 수잔도요!”

두 뺨이 절로 달아올랐다.

니콜라이는 더글라스의 공을 인정하기 싫은 듯했지만, 딱히 토를 달지도 않았다.


‘클라우디아가 프란츠 쪽에 서다니! 원작에 없었던 엄청난 행운이야. 프란츠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물론 내게도……!’

가슴 벅찬 희열이 끓어올랐다.

그녀가 황실 기사단장 자리를 수락했다 들었을 때 작은 희망을 품었다.

클라우디아와 같은 편이 될지도 모른다고.

막상 그녀를 얻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복수 계획에 전면 수정이 필요했다.

클라우디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이래도 환궁하지 않겠는가?”

니콜라이가 확신을 담아 물었다.

후추 범벅 치즈 요리를 내왔던 늙은 시종이 마구간에서 블랙윙을 끌고 나왔다.

늘씬하게 쭉 뻗은 블랙윙의 등에 내 이름이 새겨진 2인용 안장이 올려져 있었다.


 

***

클라우디아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황태자궁에 도착하자마자 그랬다.


“기사라면서 웬 머리가 그렇게 길어? 치렁치렁해서 불편하지 않아?”

벌꿀처럼 반짝이는 금발 미소년이 클라우디아를 평가하듯 훑어내렸다.

이해해 달라는 투로 더글라스가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떤 경지에 오르면 머리칼은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답하면서도 클라우디아는 자신이 한심했다.


‘아무리 더글라스가 좋고,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지만…… 이 꼬마애를 상대해야 한다니.’

프란츠는 소문으로 듣던 것 이상으로 아이답지 않았다.

말투며 눈빛, 표정부터가 그랬다.

10살 소년이 아니라,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상관을 만난 느낌이랄까?


“감고 말리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텐데. 최강 기사라도 외모는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군.”

프란츠가 다소 실망했다는 투로 말했다.

클라우디아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 아닌데?”

“보기 불편하시다면 자르겠습니다.”

귀찮아서 다듬지 않았을 뿐, 클라우디아는 제 머리칼에 애착이 없었다.

반짝이는 은발이 시선을 사로잡고,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프란츠가 볼멘소리를 냈다.


“심하군. 날 함정에 빠뜨리겠다는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요?”

“황태자가 인기 절정의 기사단장 머리칼을 잘랐다고 소문이라도 나 봐. 내 입장이 대체 뭐가 되겠어?”

세상 물정 모른다는 듯 프란츠가 입을 삐죽거렸다.

클라우디아가 가까스로 한숨을 삼켰다.

둔한 수하들을 굴리고, 부패한 귀족들을 응징할 때보다 수십 배 피로했다.

보다 못한 더글라스가 끼어들었다.


“클라우디아 경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전하.”

“내 수족이 되려면 그 이상을 고려해야 할 텐데?”

“곧 적응할 겁니다. 오랜 친우인 제가 보장합니다.”

“좀 두고 보도록 하지. 수잔과 그대의 체면도 있으니.”

안락의자에 등을 기댄 프란츠가 다리를 꼬았다.

그 모습이 살벌한 황궁에서 분투하는 애처로운 황태자 같지 않았다.

살모사를 잡아먹는 영악한 몽구스면 몰라도.


‘날 속였구나, 더글라스……!’

클라우디아가 더글라스에게 살벌한 시선을 던졌다.

찔리는 바가 있는지 더글라스가 멀거니 창밖을 바라봤다.

호흡을 가다듬은 클라우디아가 물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허락하지.”

“전하께서 황위를 계승하실 계획이 궁금합니다.”

실로 불경한 질문이었다.

황태자의 역량을 의심하는 말이기도 했다.

관두라는 뜻으로 더글라스가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프란츠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심드렁한 표정을 지우고, 클라우디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동화에 등장하는 왕자님처럼 귀여운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내가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

“하문하십시오, 전하.”

“내가 황제가 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

“2할 미만입니다.”

클라우디아가 즉답했다.

프란츠가 의자 팔걸이를 탁탁 내리치며 웃었다.


“솔직하네! 아주 마음에 들어.”

“이번에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좋아. 왜 그렇게 생각하지? 모후와 외척이 없기 때문인가?”

“표면적인 이유는 그렇지요.”

“다른 이유는?”

프란츠의 연두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반짝였다.

클라우디아는 그 빛 안에서 소년의 열망을 읽을 수 있었다.


‘과연 보통이 아니군. 예브레이 황실의 피를 의심할 수 없어. 더글라스와 수잔이 괜히 황태자를 돕기로 한 게 아니야.’

사슴 남매의 안목을 높이 사며 클라우디아가 대답했다.


“제위를 물려받기 전까지 온전히 생존하실 확률이 낮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위협이 많은 건 사실이지. 하지만 쉐이드가 있잖아?”

“당장은 안전하실 겁니다. 하지만 솜씨 좋은 기사 한 명이 황위 계승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쉐이드가 나의 목숨을 지킬 순 있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다시 묻겠다. 내가 황제가 될 때까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웃음기와 장난기를 싹 지운 프란츠가 물었다.


“역사에 적힌 대로 하십시오.”

“정적을 단호히 처단하고, 내 사람을 모으라는 게로군.”

“전하의 영민함에 감복했습니다.”

클라우디아가 진심으로 고개 숙였다.

프란츠가 싱긋 웃으며 앙증맞은 손을 내밀었다.


“충언에 따르도록 하지. 그럼 그대부터 나의 든든한 측근이 되어주겠는가, 클라우디아?”

 

***

엉덩이가 아프긴 하지만, 조금씩 승마에 익숙해졌다.

니콜라이에게 안겨 있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마차로 나흘이 걸리는 거리를 블랙윙은 이틀 만에 주파했다.

신전을 떠난 후, 니콜라이는 한방을 쓰자고 고집하지 않았다.

뭔가 깊은 고민에 잠긴 듯했다.

저 멀리 황궁이 보였다.

모든 건물을 내려보듯 우뚝 솟은 궁성이 다가올수록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어.’

황궁 밖에서 척후병처럼 움직일 계획이었다.

리먼 공작가, 파이프 후작가, 블랙폴드 백작가의 견고한 권력을 무너뜨리려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브렌든 후작가가 몰락하자 그들은 더 은밀하고 교활하게 움직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직접 그들의 뒤를 캘 작정이었다.

내 손으로 악행의 증거들을 모조리 찾아내고 싶었다.


“왜 지름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가려는 건가?”

니콜라이는 내 계획이 비효율적이라며 지적했다.


“더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도 있어요?”

“훨씬 빠르고 매우 효과적인.”

황궁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출신과 신분의 한계 때문이었다.

황비도 아니고, 애첩도 아닌 나를 니콜라이가 언제까지나 보호해 줄 수는 없었다.

마성 덕분에 몇몇 위험을 넘겼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내 근심을 눈치챘는지 말고삐를 잡고 있던 니콜라이가 한 팔로 날 감쌌다.

그의 품은 언제나처럼 탄탄하고도 포근했다.


“권력을 잡아라, 엘리자벳.”

“돈으로 산 권력은 한계가 있어요.”

“아무도 발목을 잡지 못할 절대적인 힘을 가지면 된다.”

니콜라이가 허탈할 만큼 간단히 말했다.

내가 손만 뻗으면 그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투였다.


“저에겐 약간의 미모와 좀 많은 돈뿐이에요. 밖에서야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만, 황궁에는 저보다 부유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도 많아요.”

“그러니까.”

“뭘 어쩌라는 건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니콜라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황후가 되면 될 것 아닌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콧잔등을 찡그리고 니콜라이를 돌아봤다.

농담하는 사람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되어라, 엘리자벳. 하트만의 심장을 그대에게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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